스릴 만점의 잠행
실제로 그의 시선 혹은 필력은 불가사의할 정도다. 길에서 만난 여인네들의 장신구, 패션, 머리 모양에서부터 곰이나 범, 온갖 동물들의 모양새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 한번은 객관 밖에서 재주부리는 앵무새의 털빛을 자세히 보려고 등불을 달아오는 동안에 주인이 가버리는 일도 있었다. 북진묘에서 달밤에 신광녕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수차(水車) 세 대가 막 불을 끄고 거두어 가려는 것을 잠깐 멈추어 세우고 ‘수총차(水統車)’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그 제도를 상세히 체크하기도 했다. 또 열하에선 담장 너머로 광대 소리가 들리자 일각문 안을 엿보려고 사람들 머리 사이 빈곳으로 바라보는데, 한 사람이 연암이 오랫동안 발꿈치를 들고 선 것을 보고는 걸상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올라서서 바라보게 하는 일도 있었다. 밤새워 필담을 나누느라 말 위에서 코를 골며 자다가 낙타를 놓치게 되자, “이 담에는 처음 보는 물건이 있거든 비록 졸 때거나 식사할 때거나 반드시 알리렷다![勑是後若逢初見之物 雖値眠値食 必爲提告]”며 장복이와 창대를 마구 꾸짖는다. 그러니 일행들이 그에게 ‘구경벽’이 심하다고 놀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그의 가장 큰 목적은 이국의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다. 친구를 만나는 일은 좀더 많은 시간, 정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건 어쩔 수 없이 밤을 이용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주로 ‘야음을 틈타’ 대열에서 일탈한다. 여기에는 몸싸움이나 체력만 필요한 게 아니라, 일행을 따돌리기 위한 속임수도 요구된다. 거짓말을 하고,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고, 기묘한 제스처를 쓰는 등의 갖가지 전략들이 동원된다. 그럴 때, 그의 여행은 바야흐로 ‘잠행’이 된다.
예컨대 성경(盛京)을 통과할 때, 낮에 술집에서 장사꾼들과 만나 의기투합하자 밤에 가상루(歌商樓)라는 누각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첫날의 잠행이 성공한 뒤, 다음날 또 다시 탈출을 도모한다. 좀더 대담해진(?) 그는 수행원 변계함에게 함께 가자고 제의한다. 그런데 변군이 눈치없이 수역(首譯, 수석통역관)에게 가도 좋으냐고 묻는다. 수역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성경은 연경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함부로 밤에 나다닌단 말씀이오[盛京無異皇城 豈可夜行]”하니 변군이 기가 팍 꺾이고 말았다. 그러나 연암의 행동은 한술 더 뜬다. “수역은 오히려 어젯밤 우리 일을 모르는 모양이다. 만일 알게 되면 나도 붙잡힐까 두려워 일부러 알리지 않고 홀로 빠져 나가면서 장복이더러 혹시라도 나를 찾는 이가 있거든 뒷간에 간 것처럼 대답하라고 일러두었다[首譯實不知昨夜事也 若知之則恐幷吾見阻 故諱之 遂潛身獨步出 留張福 囑以或有索我者 對以如廁].” 대담한 속임수 혹은 치밀한 포석.
만나서 하는 일은? 잠행이 주로 밤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만나면 밤새 술을 마시며 필담을 나눈다. 새벽녘이 되어 의자에 걸터앉은 채 꾸벅꾸벅 졸다가 훤하게 동이 트면 놀라 깨어 여관으로 돌아오곤 한다. 물론 그는 잠행에는 ‘도가 텄기’ 때문에 절대 들키지 않는다. 장복이의 입만 막으면 되는 것이다. 몇날 며칠을 이런 식으로 잠행을 시도하는데, 가장 압권은 이런 대목이다. 길에서 중국인 친구, 비생(費生)을 만나니 그가 연암을 이끌고 가게로 들어가서 밤에 가상루에서 다시 모이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래원 일행이 길가에서 배회하다가 나를 찾아 점포 안으로 들어오기에 나는 황급히 필담하던 원고를 숨기고 머리를 끄덕여 승낙을 표했다. 비생도 내 뜻을 알아차리고는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까딱거린다. 변계함이 종이를 찾아 그와 문답하려고 하기에 나는 일어서서 나오며, “함께 얘기할 상대가 못 되어.”하니 계함도 일어선다. 비생은 문까지 따라나와서 내 손을 잡고 다짐의 뜻을 넌지시 내비치기에 나도 머리를 끄덕이며 나왔다. 「성경잡지(盛京雜誌)」
來源輩徘徊街上 尋余入舖中 余忙收談草 首肯爲諾 費生亦會余意 含笑頤可 季涵索紙 欲與問答 余起出曰 “無足與語” 季涵笑而起 費生臨門 握余手以諭意 余點頭而去
계함을 따돌리면서 비생과 눈짓을 주고받고, 손으로 신호를 보내는 모습은 마치 ‘코믹 첩보물’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한다. 저녁이 되자 밥을 재촉해 먹고는 혼잣말로 “더위에 기침이 특히 심하니 일찍 자야겠군[困暑特甚 當早宿].”하고는 “뜰로 내려와서 서성거리다가 틈만 있으면 나갈 궁리[遂下庭徘徊 爲乘間出門之計]”를 한다. 연암은 총망한 걸음으로 마루로 올라갔다가 도로 나오면서 뜰을 거닐고 있는 일행들에게 “형님이 매우 심심해 하시더군[兄主太伈伈]”하며 눙을 친다. 형님은 곧 정사 박명원이다. 일행들을 그쪽으로 따돌린 다음 재빨리 문을 나가면서 장복에게는 “어제처럼 잘 꾸며 대려무나[善彌縫如昨日]”하고 입막음을 한다. 탈출이 거의 마무리되기 직전, 계함과 수역이 들어온다. 앗, 위기! 그러나 “마침 수역과 계함이 마루에 올라서 돌아보지 않는 틈을 타[首譯與季涵 上堂不顧]” 가만히 빠져 나온다. 휴―― 거리에 나서자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진다. “더위도 약간 물러가려니와 달빛이 땅에 가득하다[暑氣乍退 月色布地].” 달빛을 가득 안고 친구들이 있는 예속재(藝粟齋)를 향해 달려가는 연암, 이렇게 톰 소여의 모험을 보는 듯, 춘향이를 만나러 가는 이몽룡의 탈주를 보는 듯, 그의 잠행은 유머러스한 스릴과 서스펜스로 가득하다.
뒷장면도 멋지다. 예속재에 이르니 전생이 손에 붉은 양각등을 들고 와 가상루로 가기를 재촉하므로, 또 다른 친구와 함께 담뱃대를 입에 문 채 문을 나섰다. 한길은 하늘처럼 넓고, 달빛은 물결처럼 흘러내린다. 가상루에 도착하니 여러 벗들이 난간 밑에 죽 늘어서 있다가 연암을 보고는 모두들 못내 반겨하며 안으로 맞아들인다. 방 안에는 정성껏 차려진 식탁이 촛불 아래 그윽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긴 이야기들. 오고가는 필담 속에 쌓이는 우정! “이토록 고귀하신 손님을 모시고 하룻밤 아름다운 이야기로 새우는 건 참으로 한평생 가도 얻기 어려운 좋은 인연일까 합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낸다면 하룻밤은커녕 석 달이 넘도록 촛불을 돋우어 밤을 새워도 무슨 싫증이 나리까[陪奉高賓 打了一宵佳話 眞是畢生難得之良緣 如此度世 雖十旬秉燭 有甚倦意].” 한마디로, 그들은 연암의 풍모에 완전 매료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