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1장 잠행자 혹은 외로운 늑대
돈키호테와 연암
여행은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여행은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한양에서 압록강에 이르기까지도 한 달여가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암은 이 과정은 일체 생략해버렸다. 젊은 날 이미 ‘팔도유람’을 했던 그로서는 조선 내에서의 여정에 대해 특별한 감흥을 맛보기 어려웠을 터, 그러므로 「도강록(渡江錄)」이 『열하일기』의 서두를 장식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는 이 사절단의 비공식 수행원이다. 중요한 결정에는 낄 수도 없고, 공식적인 성명단자에는 포함되지도 않는다. 북경에서 느닷없이 열하로 가게 되었을 때, “정사(正使) 이하로 직함과 성명을 적어서 예부로 보내어 역말 편에 먼저 황제에게 알리기로 하였으나” 연암의 성명은 단자 속에 넣지 않았다. ‘있으면서 없는 존재’,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대규모 집단의 ‘유일한’ 여행자다. 새벽에 서늘함을 타서 일찍 떠나거나 혹은 수행원들과 부담없이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는 것도, 길을 가다 만나는 이방인들에게 스스럼없이 접근하여 ‘딴지’를 걸 수 있는 것도 공식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임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수목적인 배치 안에서 움직이는 유연한 선분, 그래서인가, 이 여행이 ‘지리적 경계’를 넘어 생애 처음으로 중원땅을 밟는 거창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의 출발은 지극히 경쾌하다.
아침을 먹은 뒤 혼자 말을 타고 먼저 출발했다. 말은 자주색 갈기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뾰족한 머리와 짧은 허리에 두 귀가 쫑긋한 품이 만 리를 달릴 듯싶다. 창대는 앞에서 견마를 잡고 장복은 뒤에서 따라온다. 안장에는 주머니 한 쌍을 달았다. 왼쪽 주머니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장, 조그만 공책 네 권, 이정록(里程錄) 한 축을 넣었다. 행장이 이렇듯 단출하니 국경에서의 짐 수색이 아무리 엄하다 한들 근심할 게 없다. 「도강록(渡江錄)」
朝飯後 余獨先一騎而出 馬紫騮而白題 脛瘦而蹄高 頭銳而腰短 竦其雙耳 眞有萬里之想矣 昌大前控 張福後囑 鞍掛雙囊 左硯右鏡 筆二墨一 小空冊四卷 程里錄一軸 行裝至輕 搜檢雖嚴 可以無虞矣
마치 돈키호테가 시종 산초 판사와 애마 로시난테만을 데리고 천하를 주유하듯, 그 또한 ‘두 귀가 쫑긋’하고 ‘정강이가 날씬한’ 말과 우직한 하인 창대, 장복이만을 동반한다. 돈키호테는 머릿속에 온갖 ‘기사담’을 다 집어넣고서 길을 나서지만, 연암은 이제 마주치게 될 미지의 세계를 낱낱이 담기 위해 붓과 먹, 공책 등을 들고서 여행을 떠난다. 전자는 텍스트를 구현하기 위해 떠나지만, 후자는 텍스트를 채우기 위해 떠난다. 전자의 여행이 이미 완결된 세계를 현실에서 확인하고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면, 후자의 여행은 예정도 목적도 없이 낯설고 이질적인 모험 속으로 무작정 몸을 날리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연암이 더 ‘돈키호테적’인 게 아닐까.
하긴, 그렇기도 하다. ‘돈키호테팀’과 ‘연암팀’이 겉보기에는 유사해 보이지만, 사실 이들은 매우 상이한 배치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의 경우, 돈키호테는 기사담의 세계에 푹 빠져 현실을 도통 보려하지 않는 데 반해 산초 판사가 온갖 재치와 익살로 돈키호테의 엄숙주의를 깨뜨리는 구조라면, 후자의 경우 오히려 장복이나 창대가 철저한 소중화(小中華) 주의에 물들어 있고 연암이 그 경직된 선분을 가로지르며 온갖 ‘해프닝’을 일으키는 식이다. 기묘한 대칭!
그러나 아무리 몸이 가볍고 경쾌하다 해도 먼 길을 떠나는 자의 심정은 착잡하다. 두려움 혹은 설레임이 어찌 없으랴. 강을 건너기 전, 연암은 간단한 제의(祭儀)를 행한다.
혼자서 쓸쓸히 한잔을 부어 마시며 동쪽을 바라보니, 용만과 철산의 모든 산들이 첩첩 구름 속에 들어 있다. 다시 한잔을 가득 부었다. 문루 첫 번째 기둥에 뿌리며, 잘 다녀올 것을 스스로 빌었다. 그리고 또 한잔을 부어 그 다음 기둥에 뿌리며 장복과 창대를 위해 빌었다. 술병을 흔들어보니, 아직도 몇 잔이 남아 있기에 창대를 시켜 술을 땅에 뿌리도록 했다. 말을 위한 것이다. 「도강록(渡江錄)」
於是悄然獨酌 東望龍鐵諸山 皆入萬重雲矣 滿酌一盞 酹第一柱 自祈利涉 又斟一杯 酹第二柱 爲張福昌大祈 搖壺則猶餘數杯 使昌大酹地禱馬
비장한 결단도, 치열한 사명감도, 거창한 축원도 없다! 텅빈 눈으로 만첩청산을 바라보고 당분간 동고동락을 해야 할 장복이와 창대와 말을 위해 술을 뿌리는 것이 전부다. 그러고 보면 술이야말로 ‘먼 길 나그네의 좋은 벗’이다.
장복이와 창대는 술을 입에도 못 대지만, 연암은 틈만 나면 술을 마신다. 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술이 있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풍경 좋은 시냇가에서, 운치 있는 주루병에서, 낯선 거리에서도 술집만 보면 그저 지나치지를 못한다. 술맛이 관동의 으뜸이라는 계주성에서는 한 주루(酒樓)에 들러 여러 사람과 함께 흉금을 터놓고 취하도록 마시기도 한다. 또 파김치처럼 지친 몸으로 객관에 도달했을 때, 밥은 못 먹을지언정 소주 한잔만은 절대 잊지 않는다. 아마 『열하일기』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먹거리’를 꼽는다면, 단연 술이 될 것이다. 그러니 술로 여행을 축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잘 어울리는 제의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탈한 의례는 길 떠나는 자의 허허로운 마음이자 여정의 복선이기도 하다. 물론 예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모를 뿐! 오직 갈 뿐! 이제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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