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고원으로 이루어진 텍스트
『열하일기』는 수많은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형식상으로는 압록강을 건너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마테오 리치의 무덤에서 끝나지만 그것은 사실 시작도 끝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중도에 있으며, 따라서 어디서 읽어도 무관하게 각각은 서로 독립되어 있다. 또 연행을 마치고 돌아와 연암협에서 다시 메모지를 들고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연암 자신의 윤색도 적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리하다가 만 경우도 있다.
내가 중국에서 돌아온 지 오래되어 당시를 회상하노라면 감감하기는 아침놀이 눈을 가리는 듯하고, 아득하기는 마치 새벽 꿈결의 넋 빠진 상태 같다. 그래서 남북의 방위가 바뀌기도 하고 이름과 실물이 바뀌기도 하였다.
余旣自中國還, 每思過境, 愔愔如朝霞纈眼, 窅窅如曉夢斂魂. 朔南易方, 名實爽眞.
「황도기략(黃圖紀略)」의 한 대목이다. 이런 식으로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 진술이 곳곳에서 출현한다. 그런 점에서 『열하일기』는 텍스 전체가 미완성의 ‘벡터’를 지닌다. 그러나 여기서 미완성은 결여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완결된 체계를 넘어 무한히 뻗어나간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니체가 “차라투스투라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완결된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다”고 할 때, 그 찬사는 『열하일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실제로 지금까지 『열하일기』는 그렇게 읽혀왔다. 명확한 정본이 없이 수많은 전사본이 떠돌아다니면서 심심찮게 개작ㆍ윤색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ㆍ「호질(虎叱)」, 「상기(象記)」 등은 전체 텍스트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버전’으로 채취되어 왔다. 그만큼 『열하일기』에는 “다양하게 형식화된 질료와 매우 상이한 날짜, 속도들”(들뢰즈/가타리)이 존재한다.
여행과 유목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여기서 여행은 유목과 아름답게 포개진다. 그는 인간, 자연, 동물 등 무엇이든 접속하고 들러붙어 그 표면의 충돌‘들을 세심한 촉수로 낱낱이 잡아낸다. 그의 촉감적 능력이란 실로 경탄할 지경이어서 산천, 성곽, 배와 수레, 벽돌, 언어, 의복제도 등으로부터 ‘장복이의 귀밑 사마귀 여인네들의 몸치장’, ‘장사치들이나 낙척한 선비들의 깊은 속내’, ‘1시간에 70리를 달리는 말의 행렬’ 등에 이르기까지 삼투(滲透)하지 않는 영역이 없다. 『열하일기』의 수많은 고원들은 바로 감각들이 다양하게 교차하는 유목적 여정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심도 뿌리도 없이 우발적인 흐름에 따라 줄기를 뻗어나간다는 점에서 하나의 ‘리좀(rhizome)’이다.
문체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열하일기』는 정통고문체에서 패사소품체를 종횡으로 넘나든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수많은 변이형들이 산포된다. 우리말 대화는 문어체의 고문으로 표현하되, 중국말 대화는 굳이 구어체인 백화문으로 표현하여 언어의 차이를 부각하는가 하면, 또 조선식 한자어를 고문체 안에 뒤섞거나 빈번히 속담, 은어, 욕설 등을 구사함으로써 ―― 마치 돈키호테의 시종 산초 판사가 그러하듯 ―― 이른바 ‘특수어들의 경연’을 연출해낸다. 정조가 명명한 소위 ‘연암체’의 실체는 바로 이 주류적 언어를 ‘더듬거리게’하고, 나아가 문체의 경계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균열 그 자체에 있는 것일 터, 그러므로 패사소품이 되는 부분만 잘라버리면 어엿한 고문이 되리라 보는 것은 그야말로 착각이다. 리좀(rhizome)의 한 부분을 잘라 땅속 깊숙이 심는다고 어찌 수목의 뿌리가 될 것인가.
고문과 소품, 사실과 허구, 주체와 대상의 경계까지를 모호하게 흐려버리는 이 괴상한 ‘책기계’를 수목이 아닌 리좀이 되게 하는 배치, 그 스릴 넘치는 장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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