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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3부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 1장 잠행자 혹은 외로운 늑대, 이질적인 것과 접속하려는 욕망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3부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 1장 잠행자 혹은 외로운 늑대, 이질적인 것과 접속하려는 욕망

건방진방랑자 2021. 7. 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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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적인 것과 접속하려는 욕망

 

 

연암의 목적은 관광이 아니다. 명승고적을 둘러보거나 기념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일 따위에는 애시당초 관심이 없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보이는 것에서 숨겨져 있는 것들을 보려 한다. 그런 까닭에 사신을 비롯하여 구종배(驅從輩,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되놈의 나라라서 산천이며 누대조차 노린내가 난다고 눈도 주지 않은채 오직 목적지만을 향해 나아가는 집합적 배치 속에서 연암은 그 길을 함께 밟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옆으로 샌다’.

 

이질적인 것들과 접속하려는 그의 욕망에는 경계가 무궁하다. 북경 안팎에 있는 여염집과 점포들을 유람할 때, 그는 이렇게 투덜거린다.

 

 

그러나 이번에 내가 구경한 것은 겨우 그 백분의 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 역관들에게 제지를 당하기도 하고, 더러는 들어가기 힘든 곳을 문지기와 다투어가면서 바야흐로 그 안으로 들어가면 시간이 언제 가는지 총총하여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다. (중략)

然余所遊歷 僅百分之一 或爲我譯所操切 或爭難門者 方入其中 則顧影怱怱 惟日不足

 

겨우 비석 하나를 읽는데도 문득 시간이 훌쩍 흘러버려, 자개와 구슬처럼 찬란하고 아름다운 궁궐 구경도 그저 문틈으로 달리는 말을 내다보는 격이고, 빠른 여울을 지나는 배처럼 건성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다섯 감각기관인 눈, , , , 피부는 모두 피로한 상태이고, 베껴 적으려다보니 문방사우가 모두 초췌하다. 항상 꿈속에서 무슨 예언서를 읽는 것 같고, 눈에는 신기루가 어른거려서 뒤죽박죽 섞이고 희미해져서 이름과 실제의 사적이 헷갈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귀국한 뒤에 기록했던 작은 쪽지를 점검해보니 종이는 나비날개처럼 얇고 자그마하며, 글자는 파리 대가리처럼 작고 까맣다. 앙엽기서(盎葉記序)

纔讀一碑 輒移數晷 貝闕琳宮 隙駟灘船 是以五官幷勞 四友俱瘁 恒如夢讀籙書 眼纈海蜃 顚倒依稀 名蹟多錯 歸拾小錄 或紙如蝶翅 字如蠅頭

 

 

역관들의 눈을 피하고, 문지기와 다투는 건 쉬운 일이다. 정말 곤혹스러운 건 시간이 부족한 것, 눈이 피로한 거란다. 거꾸로 말하면, 그의 여행은 이 무수한 난관들을 돌파하면서 이루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몸싸움을 하고, 촌각을 다투는 시간을 쪼개, 보고 또 보고 베끼고 또 베끼고 다시 되새김질하는 그의 모습은 사무 처절하기까지 하다. 그런가 하면 이런 모습은 또 얼마나 감동적인가?

 

 

세 겹의 관문을 나온 뒤,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새기려고 패도를 뽑았다.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내고 붓과 벼루를 행탁(行槖, 행장을 넣는 여행용 전대나 자루) 속에서 꺼냈다. 꺼낸 물건들을 성 밑에 주욱 벌여놓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물을 얻을 길이 없었다. 아까 관내에서 잠깐 술을 마실 때 몇 잔을 더 사서 안장에 매달아두었던 것을 모두 쏟아 별빛 아래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셔 크게 여남은 글자를 썼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出三重關 遂下馬 欲題名于長城 而拔佩刀 刮去甎上蘚花 出筆硯於囊中 陳之城下 四顧無覔水之處 關內小飮時 又沽數杯 懸于鞍邊 爲達曙之資 於是盡瀉之 磨墨於星光之下 蘸筆於凉露之中

 

 

술과 먹, 별빛, 그리고 붓과 이슬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야상곡’! 이때가 혹독한 야간행군 속에서 험하디 험하다는 북방의 요새 고북구(古北口)’를 지나는 순간임을 떠올리면 이 야상곡의 멜로디는 더 한층 황홀하다.

 

 

고북구

반룡산(蟠龍山) 입구. 길게 뻗어 있는 장성의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다. 군데군데 설치된 망루에는 이곳을 지나간 이들이 남긴 글씨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연암이 남긴 흔적도 그 어딘가에 남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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