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3부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 3장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목소리’, 예기치 않은 사건 속을 경쾌히 질주하다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3부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 3장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목소리’, 예기치 않은 사건 속을 경쾌히 질주하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9. 17:40
728x90
반응형

예기치 않은 사건 속을 경쾌히 질주하다

 

 

정진사ㆍ조주부ㆍ변군ㆍ내원, 그리고 상방 건량판사(乾粮判事)인 조학동 등과 투전판을 벌였다. 시간도 때우고 술값도 벌자는 심산이다. 그들은 내 투전 솜씨가 서툴다면서 판에 끼지 말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술만 마시란다. 속담에 이른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격. 슬며시 화가 나긴 하나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렇지만 옆에 앉아 투전판 구경도 하고 술도 남보다 먼저 먹게 되었으니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與鄭進士 周主簿 卞君 來源 趙主簿 學東 上房乾粮判事 賭紙牌以遣閒 且博飮資也 諸君以余手劣 黜之座 但囑安坐飮酒 諺所謂觀光但喫餠也 尤爲忿恨 亦復柰何 坐觀成敗 酒則先酌也 非惡事

 

벽 저쪽에서 가끔 여인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가냘픈 목청에 교태 섞인 하소연이 마치 제비나 꾀꼬리가 우짖는 소리 같다. 아마 주인집 아가씨겠지. 필시 절세가인일 게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장난삼아 방 쪽으로 들어가보았다.

時聞間壁婦人語 聲嫩囀嬌愬 燕燕鶯鶯 意謂主家婆娘 必是絶代佳人 及爲歷翫堂室

 

그런데 쉰 살은 넘어 보이는 부인이 평상에 기대어 문 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생김새가 볼썽사나운 데다 추하기 짝이 없다. 나를 보더니 인사를 건넨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주인께서도 복 많이 받으십시오.” 대답을 하면서도 짐짓 머뭇거리며 차림새를 살폈다. 쪽을 찐 머리엔 온통 꽃을 꽂고, 금팔찌 옥귀걸이에 붉은 분을 살짝 발랐다. 검은색의 긴 옷을 걸치고 은단추를 촘촘히 달아서 여몄다. 발에 풀ㆍ꽃ㆍ벌과 나비를 수놓은 신발을 신고 있다. 도강록(渡江錄)

一婦人五旬以上年紀 當戶據牀而坐 貌極悍醜 道了叔叔千福余答道托主人洪福余故遲爲 玩其服飾制度 滿髻揷花 金釧寶璫 略施朱粉 身着一領黑色長衣 遍鎖銀紐 足下穿一對靴子 繡得草花蜂蝶

 

 

열하일기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이다. 투전판에서 왕따를 당하는 모습도 흥미롭지만, 가날픈 여인의 목소리에 혹해서 은근슬쩍 접근했다가 완전히 좌절(?)하고 마는 과정은 마치 얄개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도 넘어 보이는 여인네와 주고받는 어색한 인사말하며, 그 와중에도 곁눈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보는 치밀한(?) 관찰력하며, 연암의 모습은 여지없이 여드름 덕지덕지한 사춘기 얄개의 그것이다.

 

이 장면은 스토리가 그 다음날로 이어진다. 다음날 하루가 1년이나 되는 듯 지루하다. 저녁 무렵이 되자 더위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데다 잠까지 쏟아진다. 옆방에서는 투전판이 벌어져 한창 떠들썩하다[日長如年 向夕尤暑 不堪昏睡 聞傍炕方會紙牌 叫呶爭鬨].” 전날 왕따를 당했던 연암은 한걸음에 달려가 자리에 끼어 연거푸 다섯 번을 이겨 백여 닢을 따 술을 사서 실컷 마셨다. 그 전날의 수치를 깨끗이 씻은 것이다. 의기양양한 연암이 이 정도면 항복이지[今復不服否]?”하며 으스대니, 자존심이 상한 조주부와 변주부가 요행으로 이긴 거죠[偶然耳]”라고 대꾸한다. 서로 크게 웃었다. 하지만 변군과 내원이 직성이 풀리지 않았음인지 다시 한판 하자고 조르나, 연암은 발을 뺀다. 특유의 고상한 문자로 여운을 남기며, “뜻을 얻은 곳에는 두 번 가지 않는 법, 만족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네[得意之地勿再往 知足不殆]!”

 

여행이 주는 재미는 이처럼 일상을 탈출하여 놀이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특히 연암처럼 비공식적 동행자일 경우, 임무수행의 의무로부터 벗어나 다양한 장소, 상이한 그룹에 끼여들 기회가 적지 않다. 일상의 시공간적 리듬을 벗어난 데서 오는 긴장과 이완, 이질적인 습속들 사이의 충돌 등 예기치 않은 사건들의 발생도 바로 그때 일어난다. 연암은 이 자유의 공간위를 경쾌하게 질주한다.

 

 

 

 

인용

목차

열하일기

문체반정

박지원 이력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