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원
열하에서 보낸 시간은 모두 엿새였다.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연암의 심정은 못내 아쉽다. “일찍부터 과거를 폐하여 하찮은 진사 하나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별안간 나라를 떠나서 만 리 밖 머나먼 변방에 와 엿새 동안을 노닐”다 이제 다시 돌아가자니, 감회가 없을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떠나고 머무는 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사항이다. 국가간 외교사절단을 쫓아온 것이니만큼 공식일정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열하는 정녕 매혹적인 공간이었다. 거기다 황제의 특별한 배려까지 더해져 연암은 생애 가장 특이한 엿새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황제의 편애는 조선 사신단에 예기치 않은 불운을 안겨다준다. 바로 티베트의 지도자 판첸라마를 접견하도록 은혜(혹은 명령)를 베푼 것이다. 황제 쪽에서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준 것이나, 조선 사신단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유학자가 불교, 그것도 사교(邪敎)에 가까운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베푼 영광을 거절한다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변명이 거듭될수록 상황은 한층 악화되었다.
처음엔 은전이었던 것이 이제는 지엄한 명령으로 바뀌고 말았다. 울며 겨자먹기로 마지못해 접견을 마쳤으나, 조선 사신단의 불공함은 황제를 노하게 만들었다. 황제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 나라는 예(禮)를 알건만 사신은 예를 모르네그려.” 따지고 보면, 황제 쪽에서도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황제가 스승으로 떠받드는 존재에게 한낱 변방의 국가 사절단이 오랑캐니 어쩌니 하면서 예를 표할 수 없다고 뻗대었으니.
황제가 그만 북경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리자 예부에서는 예기치 않은 트러블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곧 떠날 것을 재촉한다. 분위기가 이렇듯 싸늘하니, 돌아오는 여정이 고달플 건 당연하다. 백하(白河)를 지날 때다.
이제 연경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근신의 보호와 전송은커녕 황제 또한 한마디 위로의 말씀도 없다. 사신들이 번승(판첸라마) 접견하기를 꺼려한 탓이다. 열하로 갈 때와 올 때의 대우가 이토록이나 달랐다. 저 백하는 며칠 전에 건너던 물이고 모래 언덕은 지난번에 서 있던 곳이다.
今玆還京 旣無近臣之護送 皇帝亦無一語勞勉之諭 盖由使臣不肯見佛 而有此不承權輿之歎 察其氣色 來往頓異 彼白河向日所渡之水也 彼沙岸去時所立之地也
제독이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이나 물 위에 떠 있는 배도 그때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제독은 말 한마디 없고 통관 그저 머리를 숙이고 있다. 저 강산은 유구한데 세상 인심은 삽시간에 달라져버렸다.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提督手中之鞭 汎彼河上之船一也 然而提督無聲 通官垂頭 江山不殊 擧目有炎凉之異
바로 얼마 전 그곳을 지날 때는 “군기가 나와서 우리를 맞이해주고 낭중은 강을 건너는 일을 감독하고 황문(黃門)은 길을 인도해주었다. 제독과 통관들이 친히 강가에서 채찍으로 지휘하여 그 기세가 산을 꺾고 강을 메울 만큼 당당했는데[軍機道迎 郞中護涉 黃門探程 提督通官氣勢堂堂 臨河擧鞭 有摧山塡河之形]”, 이제 돌아가는 길은 이처럼 냉담하기 짝이 없다. 서글픈 귀환! 갈 때는 일정이 빠듯하여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나아갔지만, 돌아오는 길은 여정이 느긋했던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북경에 돌아오니, 뒤에 남았던 역관과 비장, 하인들이 모두 길 왼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다투어 손을 잡으며 그간의 노고를 위로한다. 기쁨의 상봉! 다만 내원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일행들을 빨리 보고 싶어서 일찍 밥을 먹고 동문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길이 서로 어긋난 것이다. 창대가 장복이를 보더니, 그 사이 서로 떠났던 괴로움을 말하기 전에 대뜸, “너 별상금 얼마나 챙겼니[汝有別賞銀帶來]?” 한다. 장복 역시 안부를 나누기 전에 얼굴에 가득찬 웃음으로, “넌, 상금이 몇 냥이더냐[賞銀幾兩]?” 하니, 창대는, “천냥이야. 의당 너와 반분해야지[一千兩 當與爾中分].” 한다. 헤어질 땐 곧 죽을 듯이 울고불고 난리더니, 죽을 고비를 다 넘기고 다시 만나서는 고작 ‘돈타령’이라니. 과연 ‘환상의 2인조’답다! 이어지는 황제에 대한 농짓거리들, 거짓말 아닌 것이 없으나 장복이를 포함하여 제법 똑똑한 하인들도 창대의 ‘뻥’에 다 속아넘어간다.
여러 역관이 연암의 방에 모여들었다. 모든 사람이 연암이 가져온 봇짐을 흘겨보곤 한다. 그 가운데에 먹을 것이나 없을까 하는 표정이다. 곧 창대를 시켜 보를 끌러서 속속들이 헤쳐 보게 했으나, 별다른 물건이 없고 다만 붓과 벼루가 있을 뿐이었다. 두툼하게 보인 것은 모두 필담과 난초(亂草, 갈겨 쓴 초고)로 된 ‘메모 노트’였던 것. 그제야 여러 사람이 모두 허탈하게 웃으며, “어쩐지 이상하더라. 갈 때엔 아무런 행장이 없더니, 돌아올 젠 짐이 이렇게 부풀었잖아[吾果怪其去時無裝 歸槖甚大也].” 한다. 장복이는 계속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창대더러 “별상금말야, 어디다 두었어[別賞銀安在]”하며 몹시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페이드 아웃(fade out)’! 무협영화 뺨치는 ‘대장정’은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 라마교 사원
열하에 있는 티베트 불교 사원. 티베트식 전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데, 아, 갑자기 노스님이 나타나셨다. 사진 실력 미달로 자비로운 미소를 담아내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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