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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3부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 3장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목소리’, 변화무쌍한 시공간을 은유로 담다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3부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 3장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목소리’, 변화무쌍한 시공간을 은유로 담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9.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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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무쌍한 시공간을 은유로 담다

 

 

그러나 중원의 풍경이 이렇게 매혹적이기만 할 리가 없다. 땅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스케일로 움직이는 대기의 흐름은 종횡무진으로 구름과 비를 몰고온다. 특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공할 소낙비를 만났을 때, 그것은 일종의 경외감을 자아낸다. 이제묘(夷齊廟)에서 야계타(野雞坨)로 가는 도중 날씨가 찌는 듯하고 한점 바람기가 없더니 갑자기 사람들의 손등에 한 종지 찬물이 떨어지며, 마음과 등골이 섬뜩해지기에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아무도 물을 끼얹는 이가 없다. 다시 주먹 같은 물방울이 모자와 갓 위에 떨어진다. 그제야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해 옆으로 바둑돌만 한 구름이 나타난다. 맷돌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삽시간에 지평선 너머 사방에서 자그마한 구름이 일어난다. 한줄기 흰 번갯불이 버드나무 위에 번쩍하더니 이내 해가 구름 속에 가려진다. 천둥치는 소리가 바둑판을 밀치는 듯 명주를 찢는 듯 요란하다. 수많은 버들잎에서 번갯불이 번쩍인다. 일제히 채찍을 날려 말을 달렸다. 등 뒤로 수많은 수레가 다투어 달리는 듯하다. 산은 미친 듯하고 땅은 뒤집힐 듯하다. 나무들은 노한 듯이 부르짖는다. 하인들은 서둘러 우장을 꺼내려 하나 손발이 떨려 선뜻 끈을 풀지 못한다.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동시에 휘몰아치니,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다. 관내정사(關內程史)

日傍有片雲 小如碁子 殷殷作碾磨聲 俄傾四面野際 各起小雲如烏頭 其色甚毒 日傍黑雲 已掩半輪 一條白光閃過柳樹 少焉日隱雲中 雲中迭響 如推碁局 如裂帛 萬柳沉沉 葉葉縈電 一齊促鞭而行 背後萬車爭驅 山狂野顚 樹怒木酗 從者手脚忙亂 急出油具 堅不脫帒 雨師風伯 雷公電母 橫馳並騖 不辨咫尺

 

 

바둑판 밀치는 소리, 맷돌가는 소리, 까마귀 소리, 명주 찢는 소리 등 청명한 하늘에 돌연 천둥번개가 휘몰아치는 과정이 역동적으로 포착되어 있다.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 소낙비의 위력이 얼마나 굉장했던지, “말은 모두 사시나무 떨 듯하고 사람은 숨길이 급할 뿐이어서 할 수 없이 말머리를 모아서 삥 둘러섰는데 하인들은 모두 얼굴을 말갈기 밑에 가리고 섰, “가끔 번갯불에 비칠 때 살펴보니, 노군이 새파랗게 질리어 두 눈을 꼭 감고 숨이 곧장넘어갈 지경이다.

 

연암의 연금술적 능력이 고도로 발휘된 대목은 특히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이다. 최초로 열하일기를 출간한 구한말의 문장가 김택영(金澤榮)은 이 글을 삼국사기온달전과 함께 조선 5천년래 최고의 문장으로 꼽았다 한다. 대체 어떤 글이길래? 물론 내 능력으론 그 진면목의 그림자도 엿보기 어렵다. 다만 이 글이 내뿜고 있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

 

고북구는 거용관(居庸關)과 산해관(山海關)의 중간에 있어 장성의 험난한 요새로 손꼽히는 곳이다. 몽고가 출입할 때는 항상 그 목구멍이 되는 까닭에 겹으로 된 난관을 만들어 그 요새를 누르고 있다. 연암은 배로 물을 건너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나가면서 이 험준한 전쟁터 특유의 분위기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때마침 상현(上弦)이라 달이 고개에 드리워 떨어지려고 한다. 그 빛이 싸늘하게 벼려져 마치 숫돌에 갈아놓은 칼날 같았다[時月上弦矣, 垂嶺欲墜, 其光淬削, 如刀發硎].” 칼날 같은 초승달, 그 싸늘함에 등골이 서늘하다. 잠시 뒤 달이 고개 너머로 떨어지자, 뾰족한 두 끝을 드러내면서 갑자기 시뻘건 불처럼 변했다. 마치 횃불 두 개가 산에서 나오는 듯했다[少焉月益下嶺, 猶露雙尖, 忽變火赤, 如兩炬出山].” 칼날에서 횃불로, 거기다 밤은 더욱 깊어 북두칠성의 자루 부분은 관문 안쪽으로 반쯤 꽂혔다. 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이 싸늘하다. 숲과 골짜기도 함께 운다[北斗半揷關中, 而蟲聲四起, 長風肅然, 林谷俱鳴].” 이 음산한 숲에 전쟁의 기억들이 사방에서 출몰한다. “짐승같이 가파른 산과 귀신같이 음산한 봉우리들은 창과 방패를 벌여놓은 듯하고, 두 산 사이에서 쏟아지는 강물은 사납게 울부짖어 철갑으로 무장한 말들이 날뛰며 쇠북을 울리는 듯하다[其獸嶂鬼巘, 如列戟摠干而立, 河瀉兩山間鬪狠, 如鐵駟金鼓也].” 창과 방패, 말발굽과 북소리가 뒤엉키면서 괴괴함이 한층 고조된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니다. 마지막 한 문장이 아직 남아 있다.

 

 

하늘 저편에서 학 울음소리가 대여섯 차례 들려온다. 맑게 울리는 것이 마치 피리소리가 길게 퍼지는 듯한데, 더러는 이것을 거위 소리라고도 했다.

天外有鶴鳴五六聲淸戛, 如笛聲長+, 或曰: “此天鵞也.”

 

 

전쟁터의 광경이 어지럽게 묘사되다가 맑고 투명한 학의 울음소리로 긴 여운을 이끌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 글은 그 명성에 걸맞게 한 글자, 한 문장도 빈틈이 없다. 마치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서 꿈틀대는 듯 생생하다.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이 흡인력의 정체를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나의 내공(!)으로는 그저 불가사의할 따름.

 

덧붙이자면, 연암은 전쟁의 은유를 즐겨 구사한 인물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에서는 글쓰기를 전쟁의 용병술에 비유한 바 있고,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도 놀란 파도와 성난 물머리와 우는 여울과 노한 물결에 대해 휘감아 거꾸러지면서 울부짖는 듯, 포효하는 듯, 고함을 내지르는 듯 사뭇 만리장성을 깨뜨릴 기세다. 1만 대의 전차와 1만 명의 기병, 1만 문의 대포, 1만 개의 전고(戰鼓)[犇衝卷倒, 嘶哮號喊, 常有摧破長城之勢. 戰車萬乘, 戰騎萬隊, 戰砲萬架, 戰鼓萬坐]”로 비유하고 있다. 전쟁의 메타포가 지니는 역동성을 십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가 말했던가? 인간은 은유적 동물이라고, 니체의 의도는 인간의 말은 원초적으로대상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그렇다면 수사학이란 언어의 본래적 특질이 가장 빛나는 영역이라고 해야 할 터, 이처럼 연암은 변화무쌍한 중원의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은유적 동물로서의 능력을 맘껏 발휘했던 것이다.

 

 

 고북구의 망루

고북구는 천연의 요새다. 망루 위에서 바라보면 사방으로 장성이 뻗어 있다. 불후의 명작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가 바로 여기에서 탄생되었다.

 

 

인용

목차

열하일기

문체반정

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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