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과 돌과 잠
그는 타고난 장난꾸러기다. 사람들 사이의 장벽을 터주면서 동시에 자신 또한 기꺼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사건들마다 ‘유쾌한 악센트’를 부여하는 악동!
새벽에 길을 떠나면서 보니 지는 달이 땅 위에서 몇 자 안 되는 곳에 걸려 있다. 푸르고 맑은 기운이 감도는데, 모양은 아주 둥그렇다. 계수나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고, 옥토끼와 은두꺼비가 가까이서 어루만져질 듯하다. 항아의 고운 비단 옷자락에 살포시 흰 살결이 내비친다. 나는 정진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참 이상도 하이.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네그려.” 정진사는 처음엔 달인 줄도 모르고 나오는 대로 응수한다. “늘상 이른 새벽에 여관을 떠나다 보니 동서남북을 분간하기가 정말 어렵구만요.” 일행이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일신수필(馹汛隨筆)」
曉發 落月去地數尺 蒼凉完完 桂影扶踈 玉兎銀蟾 如可撫弄 而姮娥氷紈 旖旎映膚 余顧鄭曰 恠事 今日自西而昇 鄭初未覺其月也 隨答曰 每自宿店初發 實難辨東西南北也 諸人皆大笑
달이 하도 밝아 해로 착각한 것이다. 설악산에 갔을 때 정말 이런 상황을 직접 겪은 적이 있다. 한계령에서 7시간 정도 능선을 타고 중청봉에 이르기 직전 일몰이 시작되었다. 한참 일몰이 연출하는 장엄한 분위기에 젖었다 다시 오르기 시작했는데, 중청산장에 도달하는 순간, 월출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 일행 중 눈치없는 누군가 “어? 해가 또 뜨네?”하는 바람에 일제히 배꼽을 잡았다. 그날이 보름이었기 때문에 달이 정말 해처럼 밝았던 것이다. 때를 놓칠세라, 나는 『열하일기』에도 그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다며 나의 ‘고전교양’을 과시하는 쾌거(?)를 올렸다. 연암 같으면 그 순간에 기상천외의 농담으로 대청봉까지 웃음이 물결치게 했을 테지만.
물론 그 자신이 이런 ‘농담따먹기’에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낮 불볕이 내리쬐는 탓에 숨이 막혀 더 오래 머물 수가 없어서 결국 길을 떠났다. 정진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정진사에게 중국이 성을 쌓는 방식이 어떻더냐고 물었다. 정진사가 대답한다. “벽돌이 돌만은 못하겠지요.”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일세. 우리나라는 성을 쌓을 때 벽돌을 쓰지 않고 돌을 쓰는데, 이건 좋은 계책이 아니야. 일반적으로 벽돌이란(길게 이어지는 벽돌론)” (중략)
日方午天 火傘下曝 悶塞不可久居 遂行 與鄭進士或先或後 余謂鄭曰 “城制何如” 鄭曰 “甓不如石也” 余曰 “君不知也 我國城制不甎而石 非計也 夫甎
내가 예전에 박제가(朴齊家)와 성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거든. 그때 어떤 사람이 벽돌이 “단단하다 한들 돌만 하겠어요?”하자 박제가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벽돌이 돌보다 낫다는 게 어찌 벽돌 하나에 돌 하나를 비교하는 것이겠소?”하는 거야. 정말 맞는 말 아닌가? 벽돌 한 장의 단단함이야 돌만은 못하겠지만, 돌 한 개의 단단함이 벽돌 만 개의 단단함에는 못 당하지. 그렇다면 벽돌과 돌 중 어느 편이 더 이롭고 편리한지 쉽게 구별할 수 있지 않은가? 「도강록(渡江錄)」
余嘗與次修論城制 或曰 ‘甓之堅剛安能當石’ 次修大聲曰 ‘甓之勝於石 豈較一甓一石之謂哉’ 此可爲鐵論 大約石灰不能貼石 則用灰彌多 而彌自皸坼 背石卷起 故石常各自一石 而附土爲固而已 甎得灰縫如魚膘之合木 鵬砂之續金 萬甓凝合 膠成一城 故一甎之堅 誠不如石 而一石之堅 又不及萬甎之膠 此其甓與石之利害便否 所以易辨也
대충 짐작하겠지만, 정진사도 장복이와 창대 못지않게 앞뒤가 막힌 인물이다. 그런데 연암은 그런 인물을 대상으로 벽돌예찬론을 장황하게 펼치고 있는 것이다. 독백보다는 낫다고 여겼으리라. 하지만 안 그래도 날씨는 무덥고 갈 길은 먼데 연암의 말이 귀에 들어올 턱이 없다. 당연히 정진사는 잠든 지 오래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몸이 꼬부라져서 말등에서 떨어질 지경이었다[鄭於馬上傴僂欲墮].”
내가 부채로 그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째서 잠만 자고 듣질 않는 건가[長者爲語 何睡不聽也]!” 정진사가 웃으며 말한다. “벌써 다 들었지요.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는 거 아닙니까[吾已盡聽之 甓不如石 石不如睡也]?” “예끼! 이 사람아!” 나는 화가 나서 때리는 시늉을 하고는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게 그 유명한 벽돌과 돌, 잠의 에피소드다.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甓不如石 石不如睡也].”는 정진사의 ‘봉창 두드리는 소리’는 『열하일기」를 대표하는 명언(^^) 중의 하나다. 앞에서 장황하게 이어지는 벽돌론은 그 자체로 한편의 중후한 에세이지만, 한참 논변이 무르익는 와중에 느닷없이 정진사의 잠꼬대가 이어지면서 기묘한 변박을 만들어낸다. 이런 식의 패턴은 『열하일기』만이 구사할 수 있는 독특한 화음이다. 왜냐하면 누구도 이런 식의 언표배치를 상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지한 글쓰기와 유쾌한 콩트가 엄격하게 구획되어 있는 지금도 그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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