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서대문 형무소와 남영동 1985
차가운 건물을 안내도에 따라 걷는다. 형무소는 역사가 박제된 공간이다. 분명 그곳에서 여러 감상을 느끼는 게 정상일 테지만, 박물관 자체가 그렇듯 그냥 휙 보고서 지나치니 어떠한 감상도 어리지 않는다.
▲ 차가운 건물, 그리고 박제된 역사. 그 안에 사람의 온기를 넣지 않으면 그건 그냥 '나와 상관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서대문 형무소보단 『남영동 1985』
지하에 재현된 고문하는 광경이나 고문 도구들은 ‘아플 것 같다’는 피상적인 느낌만 주었을 뿐, 그다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그만큼 지금 사람들이 영상이 주는 시각(청각)적인 충격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누군 그러더라 영상으로 본 베이징 자금성의 위용은 어마어마한데, 막상 현장에서 직접 보니 초라하더라고 말이다. 나 또한 제주도 성산일출봉을 보면서 ‘에게’하고 느꼈던 적이 있었다.
▲ 2011년에 갔던 제주도 라이딩. 그 때 성산일출봉을 보고 영상에서 보던 것과 많이 달라 실망했었다. 때론 영상이 더 위대하다.
이에 반해 『남영동 1985』는 고문의 현장감을 시각적으로 충실히 보여줬다. 이 영화는 김근태 의원이 남영동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으며 점차 인격이 무너지고 피폐해져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 묘사된 고문 장면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옥죄고 그 통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도록 만든다. 물을 입에 들이부을 땐 숨이 가빠오고, 전기를 통할 땐 온몸이 감전된 양 저려온다. 영화임에도 그걸 보고 있으면 현재적인 아픔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영상이 주는 현실감을 온몸으로 맛본 터라, 오히려 실제 역사가 있고 아픔의 상흔들이 남아있는 공간에서는 무덤덤해지고 말았다. 이게 바로 영상이 실제를 압도하는 역효과라 할 수 있다.
▲ 실제는 영화보다 더 잔인했을 것이고, 서대문형무소는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남영동 1985』보단 서대문 형무소
그렇게 관람방향에 따라 건물과 건물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12옥사에 이르러선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들어간 방향에서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백기완 선생님이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라는 책을 통해 어린 소년이 맞선 시대의 참상을 보았고, 온갖 고초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그걸 이겨낸 정신의 오롯함을 보았다. 집회현장에서 백기완 선생님을 먼발치서 볼 때마다 그가 걸어왔던 삶과 지금도 걸어가고 있는 삶에 대해 존경이 절로 일어나곤 했는데, 그 분을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이곳에서, 그것도 처음에 볼 수 있다는 게 꿈같이 느껴졌다.
서대문 형무소 내의 12옥사는 백기완 선생님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인물들이 전시된 곳이다. ‘이곳에 투옥되었던 많은 독립투사의 정신이 민주화투사에게 이어졌고 그런 정신은 현재진행형이다’라고 서대문형무소에선 스토리텔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에 와서 ‘역사가 어떤 현재적인 관점으로 서술되고 있나?’를 보고 싶었는데, 12옥사에선 그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와 같은 스토리텔링에 보수단체들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백기완 선생, 김근태 의원, 이소선 여사 모두 정당한 역사적인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이념에 따라 평가가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이들의 활동이 이념에 따라 나누어질 필요는 없음에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대문형무소는 이념의 소용돌이에서 중심을 잘 잡고 역사를 현재적인 이야기로 잘 풀어내고 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 12옥사에서 만난 김근태 의원과 백기완 선생님. 그분들의 역사가 재현된 공간이기에 12옥사는 특별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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