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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동양사, 3부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전통과 결별한 한족 왕조: 영락제의 세계화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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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동양사, 3부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전통과 결별한 한족 왕조: 영락제의 세계화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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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의 세계화

 

 

영락제가 즉위하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은 수도를 난징에서 북쪽 연경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몽골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는 것도 있었으나 여기에는 자신의 세력 근거지를 전국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뜻도 있었다. 1420년 궁성(지금의 쯔진청紫禁城)이 완성되자 영락제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베이징(北京)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전 수도인 금릉(金陵)은 난징(南京)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편의상 베이징과 난징이라는 이름을 계속 써왔지만 실은 영락제가 처음으로 만든 이름들이다.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집권한 영락제는 대외 정책에서도 태조와 어긋났다. 적극적인 북방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일찍이 송 태조 조광윤은 전대(당말오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북방을 포기하면서까지 내적 안정을 꾀했고, 그보다 오래도록 큰 혼란(이민족 왕조)을 겪은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도 조광윤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락제는 오히려 북방을 평정하는 것만이 나라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 그의 판단은 옳았다. 당시 몽골 초원에는 오이라트(Oyrat Oirat, 瓦剌)족이 강성해지면서 호시탐탐 중국 북방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50년 전까지도 지긋지긋한 몽골 치하에 있지 않았던가? It's now or never!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영락제는 1410년부터 15년에 걸쳐 직접 50만 대군을 이끌고 다섯 차례나 출정한 끝에 마침내 북방을 평정했다. 이제 한동안은 북변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역대 한족 제국의 황제로서 직접 고비 사막을 넘은 것은 그가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오랜만의 한족 제국인 탓에 건국 직후 변방을 다지는 일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북방만큼 걱정할 것은 아니었으나 변방은 남방에도 있었다. 영락제는 먼저 베트남 지역을 복속시켰으나 더 이상 나아가려면 육로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정화(鄭和, 1371~1435년경)에게 군대와 함선을 주고 역사적인 남해 원정을 명했다정화는 이슬람교도로 일찍부터 영락제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환관이었는데, 원래 이슬람교도로 마()씨였다. 무함마드에서 음차한 성일 것이다. 색목인은 이미 몽골 시대에 정부에 중용되었으므로 영락제에게는 어릴 때부터 그 혈통이 친숙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복귀한 한족 왕조였지만 몽골 제국의 유산이 완전히 근절된 것은 아니었다.

 

웅장한 궁성 주원장(朱元璋)이 언제까지 강남의 난징을 수도로 할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아들 영락제는 연경(베이징)을 세력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이 쯔진청(紫禁城)을 짓고 수도를 연경으로 옮겼다. 쯔진청(자금성)이라는 이름은 북극성과 그 주변의 별을 가리키는 자휘원(紫微垣)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천자를 북극성에 비유한 고대 중화사상의 맥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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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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