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의주로에 경성감옥이 만들어진 이유
그렇다면 일본은 형무소를 왜 한양으로 들어서는 의주로의 초입길에 만든 것일까?
▲ 서대문 형무소가 만들어질 당시의 모습.
서대문 형무소는 왜 의주로에 만들어졌나?
일본은 청나라를 향해 시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의 사신이 들어오던 길목에 버젓이 감옥을 만들어 놓고 “청나라 너희들 이젠 조선에 대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지마!”라고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고 있으니, 연암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 「황교문답(黃敎問答)」에서 황제가 왜 열하로 피서를 떠났는지 밝힌 대목과 정조의 능행(陵幸) 장면이 떠올랐다.
연암은 삼종형(三從兄)을 따라 황제 고희연의 축하사절단 자격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몇날 며칠을 고생한 끝에 북경에 도착했지만, 황제는 북경에 없었다. 열하로 이미 피서를 떠난 뒤였던 것이다. 더욱이 황제는 북경까지 오느라 이미 진이 다 빠진 사절단에게 하루 빨리 열하로 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그 때문에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너[一夜九渡河記]는 천신만고를 경험해야 했다.
그런데 ‘열하(熱河)’라는 지명으로도 알 수 있듯이, 여름에 피서를 할 만한 곳은 아니다. 더욱이 그곳은 몽골과의 접경 지역으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도 없다. 열하에 도착한 후, 열하의 지세를 본 연암은 황제가 왜 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열하까지 피서를 오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번에 내가 열하의 지세를 살펴보니 열하는 천하의 정수리 같았다. 황제가 북쪽으로 거동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골통을 깔고 앉아서 몽골의 숨통을 움켜잡자는 것이었을 뿐이다.
今吾察熱河之地勢, 葢天下之腦也. 皇帝之迤北也, 是無他, 壓腦而坐, 扼蒙古之咽喉而已矣. 『熱河日記』 「黃敎問答」
황제가 열하로 피서를 떠난 이유는 바로 몽골에게 ‘쳐들어오면 가만 안 둔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더운 여름에 열하에 피서산장을 만들어 그곳에서 피서한다는 명목으로 몽골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 열하일기는 황제가 북경이 없었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던 책이다. 물론 연암의 호기심어린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정조의 능행(陵幸)을 들 수 있다. 노론세력이 득세하는 한양에선 자신의 정치적 기반, 군사적 기반이 미약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수원화성을 건설했다. 표면적인 명분은 효심이었지만, 실제로는 미약한 정치적 기반을 정비하기 위한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노론세력들은 정조의 능행을 보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고, 장용영(壯勇營) 군사들의 열병식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무언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 능행을 한 후엔 화성행궁의 서장대에 올라 장용영의 군사훈련을 정조는 지휘햇다.
두 사람 모두 이러한 행동을 하는 데엔 표면적인 이유와 실제적인 이유가 분명히 달랐다. 표면적인 이유는 피서이고 효도하려는 마음이었지만, 실제로는 호시탐탐 자신들의 권력을 노려오는 세력(몽골, 노론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의주로에 형무소를 설치하여 무언의 시위를 함과 동시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만방에 드러내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12옥사를 걸어가고 있는 상현이의 뒷모습. 3부에선 12옥사에서 만난 리영희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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