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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4부, 1장 유럽 세계의 원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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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4부, 1장 유럽 세계의 원형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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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부 줄기

 

 

정치적으로는 분권적이고 종교적으로는 통합적인 기묘한 사회가 서양의 중세다. 하나의 신성한 정부를 둘러싸고 여러 세속의 정부가 경쟁과 다툼을 벌이면서 서서히 오늘날의 유럽 세계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서유럽 국가들의 원형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아직도 힘에서는 동방에 뒤져 있던 서유럽 세계는 십자군 전쟁으로 그리스도교권을 확대하고자 한다.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 전쟁으로 유일은 하나의 문명권이 된다. 여기에 이베리아와 스칸디나비아 등 변방지역들까지 차례로 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후기로 접어들어 교황권이 쇠퇴하면서 중세는 뚜렷한 해체의 조짐을 보인다. 이제 서양 문명의 굳건한 줄기는 화려한 개화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1장 유럽 세계의 원형

 

 

포스트 로마 시대

 

 

로마 제국이 무너진 후유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3세기부터 로마가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동과 서로 나눔으로써, 그리고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본체를 포기하고 동방 제국을 중시함으로써 제국의 수명을 연장했으나 제국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결국 이 응급조치들이 시효를 다하면서 로마는 최종적으로 멸망한 것이다.

 

로마가 멸망한 시점에서 유럽의 판도를 한번 그려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나타난다. 이 무렵이면 벌써 현대 유럽 세계의 원형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서유럽과 동유럽은 멀리 보면 로마 제국의 분열과 서방 제국의 멸망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서방 제국의 자리를 대신한 게르만족의 여러 민족은 장차 서유럽 세계를 이루게 되며, 홀로 남은 동방 제국은 동유럽 세계의 모태가 된다.

 

만약 게르만족이 통합적인 하나의 민족이었다면, 로마 제국의 해체는 곧장 게르만 제국의 성립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게르만족은 로마인들이 제국의 북쪽에 사는 야만인들을 총칭하던 이름이었을 뿐 실은 구성이 매우 다양했다. 공통점이라면 문자가 없었다는 것(있었다 해도 후대에 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농업 국가인 로마와 달리 반농반목(半農半牧) 문화였다는 것 정도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문명은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흐른다.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이라는 밝은 문명의 중심에 힘입어 자체 문명을 발전시켰다. 적어도 문명화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인 문자와 종교(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로마에서 수입했다는 사실은 게르만족이 서양 문명의 적통을 물려받았음을 말해준다. 일찍이 오리엔트 문명이 씨앗의 형태로 그리스와 로마에 전해질 때도 문자(페니키아 알파벳)와 종교(그리스도교)가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

 

 

게르만족이 사는 지역은 원래 로마의 속주였으나, 제국 후기에 접어들면서 속주들이 거의 독립 왕국처럼 변모했다(로마가 속주군을 로마군으로 완전히 편입시키지 못하고 용병이라는 계약관계를 맺게 된 것이 그 증거다). 그러므로 로마 제국이 해체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훈족의 침략이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설령 그 침략이 없었다 해도 어차피 로마의 멸망은 가시화되고 있었고, 게르만족의 국가들이 탄생하는 것도 조만간 현실화될 터였다. 다만 훈족의 침략이 가져온 변수는 원래의 속주민들이 자기 고향인 속주를 그대로 나라로 만들지 못하고 먼 타향까지 이동해 나라를 세우도록 했다는 점이다(게르만족이 농경민족이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난리가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게 농경민족의 본성이니까).

 

로마가 멸망한 뒤 게르만족은 유럽 각지에서 로마 문명의 한 조각씩을 이어받아 문명을 이루고 정식 국가를 건설했다. 도나우 강 연안에 살던 서고트족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서고트 왕국을 세웠고, 엘베 강 유역에 살던 반달족은 북아프리카까지 건너가 나라를 건설했으며, 흑해 연안에 살던 동고트족은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가 로마의 공백을 메웠다(반달족과 같은 고향의 롬바르드족은 6세기 후반에 이탈리아로 이동한다), 또 지금의 벨기에와 독일 북부에 살던 앵글족과 색슨족, 유트족은 브리타니아로 건너가 초기 영국사에 등장하는 여러 개의 왕국을 세웠다앵글은 나중에 잉글랜드라는 말의 어원이 되고, 색슨은 독일의 작센과 같다. 여기서 보듯이 오늘날 유럽에서 사용되는 여러 언어는 어원을 같이하는 어휘가 많은데, 특히 지명이나 인명이 그렇다. 일종의 사투리처럼 지역에 따라 발음이 약간씩 달랐을 뿐이다. 이 점은 중세 유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물론 이 나라들이 그대로 후대에까지 이어지지는 않지만, 이미 여기서 오늘날 서유럽 세계의 원형이 나타나고 있다(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족은 9세기에 바이킹의 이동으로 알려진 제2차 민족대이동 시기에 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승자가 임자 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서로마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그림은 비잔티움 황제 제논의 명령으로 이탈리아에 온 테오도리쿠스(왼쪽)가 오도아케르(오른쪽)와 대결하는 장면인데, 둘다 게르만족이었으므로 서로마는 어차피 게르만족의 수중에 떨어질 참이었다. 이 대결에서 승리한 테오도리쿠스는 제논의 뜻과 달리 이탈리아에 동고트 왕국을 세우고 딴살림을 차렸다.

 

 

 갈리아의 판도

 

 

서유럽에 있던 로마의 속주들 가운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곳은 갈리아였다. 갈리아는 제국의 변방이면서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했고, 속주들 가운데 가장 역사가 길고 가장 로마화되었던 곳이다. 그러므로 로마의 멸망으로 서유럽 세계의 원형이 생겨난다면 당연히 갈리아는 그 중심이야 할 것이며, 동시에 로마 문명의 상속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갈리아는 기원전 1세기에 카이사르에게 정복된 이래로 수백 년 동안이나 로마의 속주였고 로마의 특별 관리를 받았으므로 제국이 멸망할 무렵에는 로마와 다를 바 없는 문명의 수준을 자랑했다. 하지만 갈리아도 작지 않은 지역이므로 갈리아 내에서도 편차가 심했다. 크게 가름하면, 이탈리아에 가까운 남부는 로마화가 크게 진척되었으나 북부는 그렇지 못했다(오늘날 남프랑스를 가리키는 프로방스라는 명칭은 고대에 로마의 속주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갈리아의 북부에는 동쪽에서 온 게르만족의 일파인 부르고뉴족과 프랑크족이 각기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남부는 로마의 영향력이 워낙 강하게 남아 있었으므로 제국이 멸망하자 곧 힘의 공백 상태가 생겨났다. 갈리아 동남부의 프로방스는 로마의 일부나 다름없었으므로 주인 없는 땅이 되었고, 서남부의 아키텐에는 서고트족이 자리를 잡고 툴루즈 왕국을 세웠으나 그들의 주력이 에스파냐 쪽으로 빠져나간 터라 툴루즈는 새로운 힘의 중심을 형성하지 못했다.

 

따라서 북부를 지배하는 자가 갈리아 전체의 주인이 될 것은 분명했다. 니벨룽겐의 노래에서처럼 훈족의 공격으로 부르고뉴 왕국이 무너지자 이제 갈리아 북부를 호령하는 세력은 프랑크 왕국 하나만 남았다. 프랑크는 포스트 로마 시대에 힘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갈리아에는 점차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이제 대세를 탄 인물만 나오면 된다. 그 인물이 바로 클로비스(Clovis, 465년경~511)였다. 그는 로마의 장군 시아그리우스를 물리친 다음, 알라만족을 내쫓고 갈리아의 중부와 알프스 이북 일대를 손에 넣었다당시 프랑크는 알라만족의 고향인 현재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부근을 알레마니아라고 불렀다. 여기서 비롯되어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다른 언어권과는 전혀 다르게 독일을 알마뉴(Allemagne)라고 부른다. 독일의 명칭은 어느 언어에서는 지금의 영어명(Germany)처럼 게르만이라는 어원에서 나왔는데, 유독 프랑스에서만 다른 어원을 사용하는 데는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아키텐의 툴루즈 왕국, 이곳을 정복해야만 갈리아를 완전히 통일할 수 있다. 그런데 서고트족은 프랑크보다 한 수 위의 강성한 민족이므로 힘만으로 물리치기에는 버거운 상대였다. 그래서 클로비스는 속세의 힘 대신 신성의 힘에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496년에 그는 스스로 세례를 받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당시 게르만족의 거의 모든 민족은 아리우스파였으므로(복잡한 삼위일체의 개념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게 훨씬 쉬운 교리였기 때문이다) 클로비스의 행동은 상당한 정치적 모험이었다. 그의 승부수는 통했다. 다행히 아키텐에는 아직 로마의 영향력이 많이 남아 있었다. 서고트 지배층은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파였으므로 클로비스의 개종은 지배층과 원주민들을 분열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아키텐의 주교와 원주민들이 합세하면서 클로비스는 서고트족의 지배자들을 거뜬히 추방해버릴 수 있었다.

 

이처럼 로마의 텃밭에서 시작했고 로마의 영향력을 적절히 이용했기에, 프랑크 왕국은 다른 게르만 왕국들과 달리 단명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었다(로마와 밀접했던 갈리아가 아닌 다른 지역이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클로비스의 개종으로 프랑크 왕국은 로마의 문화적 전통만이 아니라 종교적 전통까지 이어받으면서 옛 로마 문명의 적통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사실 프랑크 왕국이 오래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 점과 관련이 있었다.

 

이단인 아리우스파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은 당시 서유럽 일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로마 교황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그리스도교에서는 초대 로마 교황을 그리스도의 수제자인 베드로로 간주한다(오늘날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은 그의 무덤 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베드로 자신도 당대에는 자기가 교황인 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2대 교황부터 5세기 중반까지는 교황들의 이름만 전해질 뿐 활동 내역이나 업적이 없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는 레오 1세를 초대 교황이라고 봐야 한다. 이때부터 로마 교황은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레오 1세는 로마 제국의 정치적 권력이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에게 있다면 최고의 종교적 권위는 교황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이 종교적 권위를 세속적 권력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유럽의 중세에 로마 교황이 교리상으로는 부정된 정치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중세 초기에 프랑크 왕국이 세속의 권력으로서 교황을 뒷받침해준 덕분이 크다. 이후 역사까지 고려한다면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덕분이었다.

 

혹시 클로비스는 그런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종교적 개종이라는 정치적 도박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설령 그랬다고 해도 프랑크는 당시 작은 왕국에 불과했으므로 그는 자신이 수천 년 뒤 프랑스 공화국의 국민들에 의해 프랑스 역사상 첫 번째 왕으로 간주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인 메로비스의 이름을 딴 메로빙거(Merovinger) 왕조는 프랑스 역사에서 공식적인 첫 번째 왕조가 된다.

 

 

프랑스의 건국자 메로빙거 왕조의 문을 연 클로비스의 네 아들 모습이다. 이때부터 프랑스 땅에 로마-게르만의 역사가 시작되었기에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클로비스를 초대 국왕으로 삼고 있다. 이들의 옷에 그려진 꽃은 백합인데, 중세 프랑스 왕가의 상징화다. 아직 중세의 문턱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가능하다. 이 그림은 1000년 뒤인 15세기에 그려진 상상의 초상화니까.

 

 

 홀로 남은 로마

 

 

유럽 전역에서 오늘날 유럽 국가들의 원형이 생겨나기 시작할 즈음, 로마도 그 물결에 합류했다. 물론 과거와 같은 통일 제국의 로마도 아니고 서방 제국도 아닌 동방 제국, 즉 동로마다. 제국의 중심을 동방으로 옮긴 두 명의 의사(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판단은 절반만 옳았다. 제국의 수명을 늘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결국 서방 제국을 잃음으로써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유럽 신흥 왕국들과 경쟁하는 고만고만한 수준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동방 로마 제국을 로마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고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 부른다(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이 비잔티움인 데서 나온 이름이다).

 

옛 로마의 화려한 영광은 잃었어도 비잔티움 제국은 여전히 강국이었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건국 운동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6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정말 오랜만에 유능한 군주가 등장했다. 그는 바로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483~565)였다.

 

아직 로마 제국이 멸망한 지 100년도 채 못 되는 시점에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는 당연히 로마의 부활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라 안을 안정시켜야 했고, 안정을 위해서는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했으며, 기강을 바로잡으려면 법을 정비해야 했다. 그래서 그가 맨 먼저 한 일은 법전을 편찬하는 것이었다. 그 성과가 기존의 로마법을 집대성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다. 그 자신의 이름에도 가장 걸맞은 작업이었다(로마어로 유스jus인데, 여기서 법적 정의를 뜻하는 영어의 justice라는 말이 생겼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이렇게 디딤돌을 마련한 이유는 로마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데 있었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까? 이탈리아가 목표지만 동고트족은 강하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는 너무 멀다. 황제는 아프리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비교적 약한 반달 왕국이 옛 카르타고 땅을 지배하고 있다. 게다가 반달족은 수십 년전 로마 시를 함락시키고 잔인한 살육과 파괴를 저질렀으니, 그곳은 사슬의 약한 고리만이 아니라 복수의 대상이기도 하다. 533년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당대의 영웅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505년경~565)를 사령관으로 삼고 기병 5000명과 보병 1만 명으로 아프리카 원정군을 편성했다(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질시하고 있었으므로 원정 겸 추방이었을 것이다).

 

수적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원정군이었으나 이들에게는 무형의 큰 무기가 있었다. 그건 바로 대부분이 훈족 출신의 용병이었다는 점이다. 반달족이 고향을 버리고 머나먼 아프리카까지 오게 된 이유가 바로 훈족의 침략 때문이 아니었던가? 과연 꿈에서도 무서운 훈족 병사들이 아프리카에까지 쳐들어온 것을 보자 반달군은 사기를 잃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비잔티움군은 카르타고를 공략한 지 불과 사흘 만에 거뜬히 점령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534년 봄에 금의환향했다. 그러나 황제는 벌써 그다음 프로그램을 짜놓고 있었다. 로마가 없는 로마 제국은 없다! 이게 황제의 생각이었으니 다음 목표는 당연히 이탈리아였다. 그해 가을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의 독촉으로 또다시 원정을 떠나야 했다. 이번에는 유럽 전선으로.

 

원정군은 시칠리아를 통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갔다. 비잔티움군은 오래전부터 동고트족과의 전쟁을 준비해왔지만, 예상한 대로 그들은 만만치 않았다. 나폴리까지는 그런대로 정복했으나 더 이상의 북진은 어려웠다. 2년간의 악전고투 끝에 로마를 손에 넣었지만, 돌아갈 고향도 없어진 고트족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로마 제국의 고향에서 비잔티움군은 동고트족과 20년에 걸쳐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벨리사리우스는 그 도중에 본국에서 일어난 반란마저 진압해야 했다). 이윽고 554년 비잔티움군은 동고트를 섬멸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것은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오랜 전란으로 이탈리아 전역이 황폐화되었던 것이다. 비잔티움군은 동고트의 수도였던 라벤나에 총독을 둠으로써 로마와의 연관성을 유지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어쨌든 유스티니아누스는 다시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선언할 수 있었고, 에스파냐의 일부까지 손에 넣었다. 이제 로마의 부활은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러나 죽은 과거를 되살리기에는 제국의 힘이 모자랐고, 더욱이 황제는 이미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의 부활을 위해 신명을 바친 황제이자 라틴 문화권이 배출한 마지막 로마 황제라는 기록을 역사에 남기고 죽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지 겨우 3년 만에 이탈리아는 다시 이민족의 손에 넘어갔다.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롬바르드 왕국을 세우자 제국의 이탈리아 근거지는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비잔티움 본국이 위기에 처하는 사태가 계속되는 바람에 관리가 불가능해졌다. 북쪽에서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침략해온 데다 동쪽에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일어나 이집트와 시리아를 빼앗아간 것이다.

 

이미 정치적ㆍ문화적ㆍ인종적으로 끝난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려는 유스티니아누스의 계획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다. 이 점을 잘 깨달았던 후대의 비잔티움 황제들은 두 번 다시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 사실은 꾸려고 해도 꿀 수 없었다. 제 한 몸 꾸려나가기에도 벅찼으니까. 이미 문명 세계는 지중해권을 벗어나 북쪽으로 확대일로에 있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옛 로마 제국과는 다른 역할을 부여받고 있었던 것이다

 

 

법을 만든 황제 중세 초기만 해도 비잔티움 제국은 유럽 세계의 중심이자 최강국이었다. 비잔티움 황제들은 이민족에게 빼앗긴 이탈리아를 되찾기 위해 애썼다. 그림에 나오는 유스티니아누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법전을 만들어 제국을 정비하고 이탈리아를 절반쯤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 그림은 6세기 중반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에 그려진 모자이크화니까 실제로 당시 유스티니아누스의 모습을 닮았을 것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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