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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4부, 2장 또 하나의 세계 종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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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4부, 2장 또 하나의 세계 종교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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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또 하나의 세계 종교

 

 

사막의 바람

 

 

로마 제국의 멸망은 유럽에만 큰 파장을 남긴 게 아니었다. 유럽이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 세계와 비잔티움 제국이 지배하는 동유럽 세계로 분립하기 시작할 무렵, 문명의 옛 고향인 오리엔트에도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하지만 이번에 오리엔트의 주역으로 떠오른 곳은 유서 깊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가 아니었다. 아득한 옛날 인류 문명을 탄생시킨 그 지역들은 이미 수백 년 동안 로마의 속주로 역사를 쌓아온 곳이었으므로 새로운 변화의 주역이 되기는 어려웠다.

 

바람의 진원지는 아라비아 사막, 정확히 말하면 사막의 군데군데에 발달한 오아시스였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 문명이 태어날 때도,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으로 헬레니즘 세계가 구축될 때도, 로마 제국이 바로 인근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까지 지배할 때도, 아라비아의 사막지대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이 지역은 여전히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으며, 원시 신앙에 가까운 다신교의 종교에다 문명과 문화의 수준이 낮았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멸망이라는 세계사적 격변은 이 지역에도 서서히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우선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도시들이 생겨났다. 기껏해야 수백 명 단위의 주민들이 살면서 유목민들을 상대로 장사나 하던 오아시스 주변은 점차 인구가 밀집하면서 농경 생활을 영위하는 정착민의 수가 늘어났다. 오래전부터 이 일대의 주민들에게 성스러운 땅으로 여겨졌던 메카가 순례지의 수준을 넘어 도시로 발달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로마 제국 시절부터 무역만큼은 상당히 발달해 있었던 메카에는 점차 낙타를 타고 다니는 뜨내기 상인들 대신 낙타 행렬을 소유하고 부리는 부유한 상인들이 늘어났다. 이미 전통적인 부족사회의 체제로는 도시의 규모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지만, 부유한 상인들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정치와 행정을 좌지우지하는 낡은 체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함마드라는 인물이 출현했다.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그리스도교 등 당시 아라비아에 신흥종교로 유입된 종교들은 모두 유일신 종교였다(게다가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 조로아스터교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국교였으니까, 아라비아의 입장에서는 선진국의 종교들이기도 했다). 특히 4세기 초 로마제국이 공인한 그리스도교는 오아시스 주민들, 특히 서민들의 가슴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이슬람의 천사 흔히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교와 전혀 별개의 것으로 알지만,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교를 모태로 탄생했다. 그림은 대천사 지브릴(그리스도교의 가브리엘)이 무함마드에게 신의 계시를 전하는 장면이다. 이슬람교에서는 그리스도와 무함마드를 모두 예언자라고 여긴다(이는 이슬람교가 그리스도교의 이단으로 몰린 아리우스파를 근본으로 했다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알라는 곧 그리스도교의 신이 되는 셈이니 굳이 서로 싸울 이유가 없다.

 

 

무함마드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보는 그리스도교는 유일신이라는 중심이 확고한 데다 세계 제국 로마가 승인하고 국교로 삼은 강력한 종교였다. 하지만 그가 접한 그리스도교는 제국에서 이단으로 몰려 추방된 아리우스파였다.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알았다 해도 아리우스파를 더 신봉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신으로 인정하는 삼위일체설을 받아들인다면 유일 신앙의 이미지가 약해 아라비아에서 또 다른 유일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 테니까.

 

무함마드는 그리스도를 신(또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 신이 보낸 사자’, 즉 라술(Rasul)일 뿐이라고 여겼다. 마흔이 되던 해인 610년 그는 동굴 속에서 명상하던 중 신의 계시를 받는다. 또 한 명의 신의 사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유대교에서는 구약성서만 받아들이고 신약성서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교의 성서인 코란에도 구약의 내용은 거의 그대로 실려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뿌리가 같다고 할 수 있다. 무함마드는 당시 이집트 쪽에 널리 퍼졌던 아리우스파의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받아들였으므로 삼위일체설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아리우스파는 게르만족에게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이슬람교의 성립에도 기여했다. 정통 그리스도교(아타나시우스파)는 로마 가톨릭으로 이어져 서유럽 사회의 중추를 형성했고, 이단(아리우스파)은 주변으로 퍼져 그리스도교 세계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했다. 이래저래 중세를 그리스도교가 지배하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가 그랬듯이, 신의 사자라면 당연히 신의 말씀을 온 세상에 널리 전해야 한다.

 

 

오늘날의 메카 메카는 예로부터 오아시스 무역의 요처이자 전통적인 다신교 신앙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이곳을 정복하면서 메카는 유일신을 섬기는 이슬람교의 성지로 탈바꿈한다. 사진은 수많은 이슬람교도가 모여 있는 오늘날 메카의 모습이다. 이슬람교도에게 성지 참배는 평생의 소원이므로 이 많은 사람은 지금 그 소원을 이룬 것이다.

 

 

때마침 도시 사회를 이룬 메카는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새 질서를 수립하려면 낡은 질서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구체제를 대변하는 부유한 상인들은 무함마드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했다. 더욱이 알라(Allah, )라는 유일신을 강조하면 메카에 소장되어 있는 수많은 우상을 참관하러 오는 순례자들이 발길을 끊을 수도 있었다. 순례자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와 짭짤한 관광 수입도 놓치게 될 터였다.

 

메카의 지배층은 무함마드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에 나섰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의 법률이 생겨날 만큼 복수의 전통이 강한 곳, 오늘날까지도 가장 무시무시한 테러가 자행되는 이 지역에서 탄압이라면 정치적 박해 정도가 아니라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뜻한다. 포교 이전에 우선 목숨부터 부지해야 했던 무함마드는 622년에 암살 음모를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것을 혜지라(Hegina, 이주)라고 부르는데, 이슬람교가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기에 오늘날까지 이슬람교에서는 이해를 이슬람 달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재기를 꿈꾸며 메카에서 교세 확장에 실패한 무함마드가 동료이자 부하이자 제자인 아부 바크르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하는 장면이다. 이것을 헤지라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사실상의 패배였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대세 감각은 옳았다. 그는 메카보다 지주의 세력이 약한 메디나를 기반으로 삼아 이슬람교를 일으키고 훗날 권토중래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제국으로 성장한 공동체

 

 

메디나에 도착한 뒤 무함마드는 우선 이곳을 세력 근거지로 만들어 장차 있을 메카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을 따라 메디나로 옮겨온 이주민 집단과 메디나 현지 유력 가문들의 갈등을 해소하고 여러 씨족을 한데 묶어 움마(Umma)라는 종교 공동체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조그만 공동체로 시작했지만, 수십 년 뒤 이 움마라는 말은 우마이야라는 강력한 이슬람 왕조의 이름에 실려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슬람이라는 말은 원래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신의 명령은 신의 사자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 따라서 신도들은 신의 사자가 말하는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 7세기라면 문명의 오지를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제정일치 사회가 매우 드문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다시금 태곳적 제정일치 사회가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러한 단순명쾌한 교리 덕분이었다. 이슬람교에서는 그리스도교에서와 같은 복잡한 종교 논쟁도 없었고 성직자도 필요가 없었다. 오로지 알라를 대신하는 라술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심지어 무함마드는 대상 행렬과 인근 촌락을 약탈해 자금을 조달하면서 이것을 지하드(jihad, 성전)라고 불렀는데, 약탈에 대한 그 독특한 해석은 그대로 이슬람의 율법이 되었다(그래도 그가 약탈한 것은 대부분 부유한 상인들의 재산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메카를 탈출하던 해로부터 632년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무함마드가 변화시킨 것은 강산 정도가 아니라 세상이었다. 우선 메디나라는 작은 마을을 이슬람의 강력한 근거지로 성장시켰고, 메카를 정복해 금의환향했으며, 아라비아 반도 전역을 이슬람교로 통합했다. 그의 사후 본격적인 대외정복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닦아놓은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무함마드도 그렇게 급속히 세계적 규모의 지하드가 시작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가 죽은 바로 이듬해에 그의 뒤를 이은 칼리프(caliph, 아랍어로는 할리파인데, ‘후계자, 대행자라는 뜻이다) 아부 바크르(Abū Bakr, 573년경~634)는 지하드의 명분으로 대외 정복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여기에는 무함마드의 후계를 놓고 벌어진 다툼을 대외 정복으로 해소하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650년까지 20년도 채 못 되는 기간에 이들은 동쪽으로 페르시아, 서쪽으로 이집트와 리비아까지 정복했다. 이제 움마는 공동체가 아닌 제국으로 성장했다.

 

 

최초의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와 함께 앉아 있다. 이들이 단순히 피신 생활을 하는 데 그쳤다면 오늘날의 이슬람교는 없었을 것이다.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사후 초대 칼리프가 되어 정치와 종교의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이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종교 토론이었을까, 정치 토론이었을까?

 

 

그러나 명실상부한 제국이 되려면 아직 한 고비를 더 넘어야 했다. 중심 없는 제국은 없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권력의 안정이었다. 아부 바크르를 비롯해 네 명의 칼리프가 지배하던 661년까지의 시기는 종교가 정치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부른다. 이때에는 칼리프가 세습되지 않고 원로들에 의해 추대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제 제국으로 성장한 마당에 추대라는 고답적인 형식은 걸맞지 않았다. 더구나 워낙 급속도로 정복이 이루어진 탓에 처음부터 권력이 삐걱거렸다. 3대 칼리프 우스만과 4대 칼리프 알리가 연이어 암살되었다.

 

명쾌한 교리 덕분에 종교가 튼튼하므로 성직자는 없어도 되지만, 현실 정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신생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는 권력의 안정이 필수적이다. 세습제만큼 안정된 권력이 또 있을까? 알리가 칼리프에 오른 지 1년 만에 부하의 손에 죽자 그와 경쟁하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는 이제부터 자신이 속한 우마이야 가문이 칼리프를 세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해서 우마이야 왕조(661~750)가 탄생했다. 드디어 움마는 명실상부한 제국이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마치 정복을 위해 태어난 듯했다. 왕조 체제로 내실을 다진 이슬람 제국은 문명 세계 전체를 통일하겠다는 기세로 정복 활동을 재개했다. 머잖아 제국은 동쪽으로 인도에 접경했고, 북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까지 손에 넣어 중앙아시아 일대를 호령하게 되었으며, 서쪽으로는 카르타고를 넘어 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진출했다.

 

711년 세계의 서쪽 땅끝에 도달하자 이슬람군의 지휘관 타리크는 더 이상 서쪽으로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방향을 돌리면 북쪽에는 불과 10여 킬로미터 너비밖에 안 되는 해협이 있었고, 그 너머로는 다시 대륙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타리크는 해협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건너 온 타리크는 작은 언덕에 군대를 주둔시킨 채 북쪽을 전망했는데, 그 언덕은 이후 그의 이름을 따서 자발 알 타리크(‘타리크의 산’)라고 불리게 된다. 그 이름에서 유럽과 아프리카를 가르는 지브롤터 해협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대 그리스인들은 지브롤터 해협의 아프리카 쪽에 있는 바위산을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불렀으니까 이슬람의 정복이 없었다면 오늘날 지브롤터 해협은 헤라클레스 해협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슬람 명칭인 지브롤터는 해협의 유럽 측에 있는 산이고, 유럽 명칭인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아프리카 측의 산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대륙이 서로 바뀐 것은 정복 주체가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즉 유럽의 그리스는 아프리카 쪽의 산에 유럽식 이름을 붙였고 아프리카 쪽에서 유럽으로 진출한 이슬람은 유럽 쪽의 산에 이슬람식 이름을 붙였다. 해협의 현지(지금의 모로코)에 살았던 부족도 그 해협을 가리키는 나름의 명칭을 가졌겠지만 그것은 후대에 전하지 않는다. 힘이 약하면 제 땅 이름조차 지을 권리가 없다.

 

유럽에 이른 이슬람군은 에스파냐의 서고트 왕국까지 정복해 옛 로마 제국에 이어 또 다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인류 역사상 최대 영토를 자랑했던 13세기 몽골 제국도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에 그쳤다).

 

한편 동북방으로 나아간 이슬람군은 계속해서 당시 중국 당 제국의 주요 무역로였던 비단길 인근까지 진출했다. 당의 수도 장안에 색목인(色目人, 중국에서 서역인을 부르던 이름)들의 출입이 잦아지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후대의 일이지만, 아라비아인들은 이 무렵에 중국과의 교통을 터놓은 것을 계기로 중국의 문물을 유럽으로 전달하는 문명의 가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들을 통해 중국의 3대 발명품인 화약과 인쇄술, 나침반이 서양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더 후대의 일이지만, 3대 발명품은 유럽에서 대항해시대와 르네상스가 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며, 뒤이은 유럽의 동양 침략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된다.

 

 

슈퍼 베이비 갓 태어난 이슬람 문명이 금세 세계 문명으로 발돋움한 것은 역사의 커다란 미스터리다. 이슬람은 불과 한 세기 만에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신기록이다.

 

 

 문명의 충돌

 

 

이슬람 제국이 단기간에 놀라운 팽창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물론 종교의 힘도 컸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오리엔트 지역은 권력의 공백 상태로 남아 있었다단지 권력의 공백만이 아니라 종교의 공백이기도 했다. 당시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였는데, 이것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멸망하면서 함께 힘을 잃었다. 조로아스터교보다 더욱 강력하고 세계적인 종교는 그리스도교와 불교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탄생한 그리스도교가 서쪽(유럽)으로 전달되고,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가 동쪽(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으로 전달되면서 팔레스타인과 인도 사이의 오리엔트 일대는 종교적 공백 상태에 빠졌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속주였으므로 당연히 비잔티움 제국이 챙겨야 했지만, 당시 비잔티움은 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 데다 서방 제국의 부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이 지역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지금의 이란, 그러니까 옛 페르시아의 고토를 지배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이미 전성기가 200년이나 지난 터라 신흥 이슬람교의 젊은 피를 당해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막에서 조그만 횃불로 시작한 이슬람 제국은 생겨난 지 불과 20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세 개의 대륙에 들불로 번져 로마 제국에 버금가는 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다(로마가 국가를 수립하고 나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는 데까지 걸린 기간이 700년 이상이었던 데 비하면 이슬람의 성장 속도는 가히 세계 신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끝 간 데를 모르던 이슬람의 팽창은 8세기 초반 두 차례의 패전을 당하면서 멈추게 된다. 유럽 대륙의 동과 서 양쪽 관문에서 겪은 실패였는데, 혹시 그것은 유럽 문명이 장차 세계를 제패하게 되리라는 암시였을까?

 

첫 번째 패배는 동유럽의 콘스탄티노플에서였다.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이슬람 제국은 자연히 비잔티움 제국과 직접 맞부딪히게 되었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는 서로 이질적인 종교인 데다 포교적 성격이 워낙 강했으므로 서로에게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 제국은 한창 기세가 오른 참에 잠재적인 강적을 제거해버리기로 결심했다. 당시 이슬람으로서는 위협 요소를 없앤다는 의도가 컸지만 비잔티움을 손에 넣으면 광대한 유럽 세계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서유럽 세계는 비잔티움 제국에 비해 크게 약했고 수많은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므로 실제로 정복에 나섰다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먼저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썩어도 준치, 로마의 영광은 과거의 일이고 이제는 그 후광만 남았다 해도 비잔티움의 동로마 제국은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사실 이슬람은 애초부터 비잔티움 제국을 최대의 적수로 여기고 있었다.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 무아위야는 정복 사업을 재개하면서 첫 목표를 비잔티움 제국으로 정한 바 있었다. 그러나 674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군은 성벽을 공략하는 데는 실패했다. 비잔티움군의 신무기인 그리스의 불이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결국 무아위야는 비잔티움 측의 화의를 받아들여 오히려 매년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퇴각했다. 717년 여름, 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는 이교도의 침략으로부터 그리스도교 문명권을 수호하겠다는 확고한 각오를 가지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이슬람군을 맞았다. 한 측은 공성, 다른 측은 수성이었는데, 성을 깨뜨릴 만한 화력이 없던 시대에 어느 측이 유리할지는 뻔했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은 천혜의 요새였다아시아와 유럽의 절묘한 경계선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은 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천연의 항구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남쪽에는 프로폰티스(마르마라 해)가 있고, 흑해로 연결되는 북동쪽에는 옛날부터 골든혼(황금)이라 불려온 8킬로미터쯤 되는 길이의 넓고 깊은 내해가 자리 잡고 있어 바다를 통한 공략은 거의 불가능했다. 더구나 마르마라 해는 양 끝이 보스포루스와 헬레스폰토스(다르다넬스)의 두 좁은 해협으로 막혀 있기 때문에 대함대를 동원한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따라서 육로로 공략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 길은 유럽 쪽으로 트여 있다는 게 이슬람 측의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싸움은 50년 전과 비슷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비잔티움군의 투석기 공격으로 다시 쓴맛을 본 이슬람군은 함대에 승부를 걸었다. 이슬람 함대는 우선 지중해와 흑해 양 방면의 바닷길을 차단해 보급로를 끊은 뒤 콘스탄티노플로 접근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비잔티움을 구한 것은 가짜 화약이었다. ‘그리스의 불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신무기는 황과 수지를 섞어 만든 물질에 불을 붙여 적선에 던지는 것이었는데, 화약처럼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 불이 붙으면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이슬람 함대는 이 신무기를 던지며 버티는 비잔티움의 소함대를 당하지 못했다(이후 그리스의 불은 유럽 문명을 구해낸 일등 공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전쟁의 불문율을 깨고 싸움은 한겨울에도 간간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봄 이슬람 함대는 재차 도전했으나 또다시 실패했다. 조급해진 이슬람군은 콘스탄티노플의 남쪽으로 상륙해 도시를 공략하고자 했는데, 결국 이곳이 최종 승부처가 되었다. 불가리아 동맹군이 합세한 비잔티움군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이슬람군을 무참히 도륙했다(당시 불가리아는 비잔티움 영토 내에서 종속국으로 있었으나 신흥 강국이었다), 공격을 개시한 지 꼭 1년만에 이슬람은 비잔티움 침략을 깨끗이 포기하고 물러나야 했다. 아직 싹을 튼튼히 틔우지 못한 서양 문명의 뿌리가 온전히 보존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뿌리를 위협하는 칼날은 4년 뒤에 대륙의 서쪽 끝에서도 다가왔다. 유럽의 서쪽 관문에 상륙한 이슬람 세력은 711년 에스파냐의 터줏대감인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20년 동안 이곳을 식민지로 굳혔다. 그런 다음에 에스파냐 총독 압둘 라만은 피레네 산맥을 넘기로 결정했다. 산맥을 넘으면 250년전 클로비스가 개창한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이 있었는데, 이곳을 정복하면 서유럽에서 이슬람의 적수는 없었다.

 

 

이교도를 막아낸 성벽 조상의 음덕은 동양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창 강성했던 8세기 초반 이슬람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고 유럽 세계를 수호한 것은 바로 콘스탄티누스가 공들여 만든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었다. 유럽을 그리스도교 문명권으로 만들고자 한 콘스탄티누스의 노력은 400년이 지난 뒤에도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한편 클로비스 이후 메로빙거 왕조는 여러 차례 분열과 재통합을 거듭하면서 크게 약화되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왕권의 약화에 반비례해 귀족들이 성장한 덕분에 오히려 프랑크 왕국은 국력이 크게 신장된 상태였다(왕권과 국력이 반비례하는 전통은 근대 이전까지 유럽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으로서도 이슬람의 침략은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과연 이슬람군은 피레네를 넘은 뒤 프랑스 서부의 아키텐을 손쉽게 접수하고 프랑크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왔다.

 

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낸 사람은 당시 왕국의 힘센 귀족이었던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 688년경~741, 프랑스와 독일의 초기 역사와 관련된 인물이기에 독일식으로 카를 마르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이었다. 732년 이슬람군과 프랑크군은 프랑스 중서부의 투르에서 맞붙었다. 여기서 만약 이슬람이 승리했더라면 이후 서유럽이 주도하는 중세의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전투의 승패를 가른 것은 이 전투를 보는 관점의 차이였다. 프랑크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를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한다는 자세로 전력을 다해 맞선 반면, 이슬람 원정군은 애초부터 유럽을 이슬람권으로 만들겠다는 각오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이슬람 제국은 동쪽, 즉 비잔티움 제국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간다는 계획은 있었으나 지브롤터 쪽은 원래 생각하지 않았다(이는 당시 동유럽이 서유럽보다 훨씬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었음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그랬기 때문에 제국의 주력군 대신 에스파냐 지방군을 피레네 너머로 파견한 것이다. 당시 이슬람군은 물자가 허용하는 한에서만약탈과 원정을 행한다는 규칙에 따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투르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크군은 굳이 이슬람군을 추격하지 않았고, 이슬람 측은 두 번 다시 피레네 너머로 원정군을 보내지 않았다. 이 전투의 역사적 중요성은 오히려 후대에 더욱 강조되었다. 그러나 후대의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이 전투가 과대 포장되었고, 이슬람 역사에서는 기록에서 빠졌다.

 

 

모든 종교의 성지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 사원(모스크)이다. 흔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의 성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그만큼 세 종교는 뿌리가 같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서아시아 세계의 형성

 

 

비록 유럽의 정복은 단념했지만, 이슬람 세력은 최소한 그간의 정복지만큼은 확실하게 챙겼다. 그리스도교권이던 북아프리카는 이슬람권으로 탈바꿈했고(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에스파냐도 이슬람 문화로 새 포장을 했다. 오늘날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로 이어지는 북아프리카 지중해권 지역이 모두 이슬람교 국가인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1492년까지 800년 동안이나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에스파냐에도 지금까지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라비아 본토 이의의 지역들 중 이슬람이 침투하면서 가장 크게 변모한 지역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였다.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란을 포함해 이슬람 문명권의 서아시아 세계가 탄생한 것은 바로 그 시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교의 건파가 특히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경우다. 그전까지 오랫동안 파르티아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특별한 정체성이 없었던 이 지역은 이슬람 문명권에 속하게 되면서 일약 중앙아시아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이슬람권의 변방에 있었던 게 이 지역에는 오히래 이득이었던 셈이다), 10세기 이후 아프간족은 남쪽으로 진출해 친자보와 북인도에 여러 왕조를 세웠으며, 더 이후에는 티무르 제국과 무굴 제국을 세우고 서아시아와 인도를 지배하게 된다(20세기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립하게 된 것도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급히 먹으면 체하는 법이다. 이슬람의 급속한 팽창에는 아무래도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라비아 본토의 몇 배에 달하는 피정복지에서는 곳곳에서 이슬람의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이 잇달았다. 더 큰 문제는 종교 내부의 분열이었다. 그리스도교가 그랬듯이 처음에는 통합적이던 이슬람교는 세력이 커지면서 종교적 쟁점들이 생겨났다. 그중 가장 주요한 것은 칼리프의 문제였다.

 

 

사실 문제의 싹은 아부 바크르가 무함마드를 계승하면서부터 있었다. 일부 이슬람교도들은 칼리프를 추대하는 제도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무함마드의 혈통을 따른 사람만이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4대 칼리프 알리가 암살되자 이 문제는 심각해졌다. 알리는 바로 무함마드의 사위였던 것이다(이슬람교가 생기기 이전까지 아라비아는 모계 사회였으므로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한 알리는 무함마드의 적통이었다). 무함마드의 혈통과 알리를 추종한 사람들은 알리에 이어 칼리프를 세습하기 시작한 우마이야 왕조에 대해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이들이 이룬 조직을 시아파라고 부른다(‘시아무리, 일파라는 뜻으로 알리 시아’, 알리를 따르는 무리에서 나온 말이다). 이들은 전체 이슬람교도에 비하면 극히 소수였지만 시아파가 결성됨에 따라 나머지 다수파는 수니파(‘범례’, 즉 예언자와 그 전통을 따르는 무리)로 묶이게 되었다.

 

정복이 완료된 8세기 중반 무함마드의 가계인 아바스 가문은 시아파의 이념과 피정복지에서의 갈등을 교묘히 이용해 우마이야 왕조를 타도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이슬람 왕조의 명칭은 아바스로 바뀌었다. 아바스 왕조(750~1258)는 피정복지에서 원주민들에 대한 차별 정책을 철폐하고, 아라비아인의 특권도 폐지했다. 제국의 통합을 위한 조치였다. 그렇게 보면 이전에도 이슬람 제국이라는 명칭을 썼으나 엄밀한 의미의 이슬람 제국이 성립된 것은 아바스 왕조 때의 일이다그러나 우마이야 왕조를 거부하고 아바스 왕조의 성립에 일조한 시아파는 새 왕조에 대해서도 반발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바스 가문보다 알리 가문이 더 정통이었다. 시아파는 칼리프 제도 자체에 반대했으므로 당연히 종교 율법에서도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이들은 오로지 코란만을 진리이자 법으로 여겼고, 코란에 대한 일체의 주석과 해석을 거부했으며, 이슬람의 진정한 지도자 이맘(Imam)이 언젠가 다시 부활할 것임을 믿었다. 반면 시아파에 비해 종교적 정체성이 느슨한 수니파는 아바스 시대에 정체성을 확고히 다졌으며, 시아파와 달리 새 왕조에 적극 협력했다. 이런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탓에 오늘날까지도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은 적대적인 성격을 잃지 않고 있다. 오늘날 시아파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아바스 왕조의 적극적인 통합 정책으로 이슬람 제국은 피정복지에 대한 정치적 차별은 물론 종교적 탄압도 중단했다. 물론 이슬람교로 개종시키는 포교 사업은 충실히 전개했고, 또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지만, 개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다. 굳이 불이익이라면 이슬람 개종자들에게 베풀었던 면세의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것 정도였다. 팔레스타인의 그리스도교도와 유대교도는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해도 자신들의 신앙을 바꾸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종교적 정체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바스의 관용 정책 덕분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슬람에 맞설 만한 힘을 키운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이슬람이 그리스도교의 성지를 탄압하고 있다고 사실을 왜곡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지하드, 즉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이슬람의 지도자들 메카 정복에 성공한 무함마드가 제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다. 이 제자들이 훗날 칼리프가 되어 일종의 제정일치 체제인 이슬람 제국을 다스렸다. 초기 칼리프들은 정복에만 능한 게 아니라 신앙에도 충실했고 문화적 소양도 갖추어 신생 제국의 내외적 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다.

 

 

 부활한 오리엔트

 

 

이슬람 제국이 탄생하고 성장함에 따라 인류 문명의 고향이었던 오리엔트는 옛 페르시아가 무너진 이후 1000년 만에 다시 세계 문명의 중심지라는 위상을 되찾았다. 로마가 멸망한 뒤 지중해 문명이 서유럽 세계로 전달되기까지의 공백기(서유럽의 중세 초기에 해당하는 기간)를 틈타 문명의 서진이 잠시 유보되고 동쪽으로 회귀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슬람 제국의 칼리프들 중에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군주들이 많았다. 그 덕분에 이 시기에는 아랍 문화가 절정기에 달했다. 특히 아바스 왕조는 피정복지의 원주민들을 신분과 인종의 차별없이 관직이나 학술계에 많이 받아들였으므로, 이 시기에 이슬람 문화는 이슬람권에만 국한되지 않고 세계 문화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게다가 이슬람 문화권이 중앙아시아로 확산되어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중국의 당 제국과 교류하게 된 것은 비단옷에 꽃을 더한 격이었다. 실제로 당의 비단에 아랍 특유의 꽃무늬(아라베스크) 장식이 더해진, 문자 그대로의 금상첨화도 있었겠지만, 헬레니즘과 페르시아의 찬란한 문화적 전통에다 새로이 이슬람 문화가 더해진 것도 금상첨화였다.

 

그러나 아랍 문화의 진정한 은 과학이었다. 의학과 물리학, 천문학천문학 지식은 대양을 항해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런데 바다가 없는 아라비아에서 천문학이 발달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다는 없어도 그에 준하는 것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사막이다. 부족민들을 이끌고 넓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부족장은 천체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어야만 시간에 맞추어 다음 오아시스까지, 최소한 그들이 있는 곳까지 부족민과 가축 들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한낮에는 이동이 불가능했으므로), 오히려 바다가 있는 지중해 세계에 비해 아라비아에서 더 천문학이 필요했다는 것은 곧 지중해를 항해하기보다 아라비아 사막을 이동하는 게 더 어려웠다는 이야기가 된다등 근대 자연 과학의 학문들이 발달한 것은 당시 아라비아에서 이루어진 성과에 힘입은 바가 크다. 특히 화학은 연금술의 형태로 유럽에 전해짐으로써 중세 유럽의 침체된 과학의 명맥을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중세 서양의 전설에서 마녀가 각종 약품을 실험하는 일종의 화학자로 등장하는 데는 그런 배경이 있다). 화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chemistry는 연금술(alchemy)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나온 말이며, 알코올(alchohol)과 알칼리(alkali) 같은 과학 용어들도 마찬가지다(‘al’은 아랍어의 정관사에 해당한다).

 

화학과 더불어 아랍 자연과학의 위대한 유산은 수학이다. 아라비아숫자와 algebra(대수)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아랍 문화권에서는 수학이 크게 발달했고, 삼각함수의 개념도 생겨났다(아랍인들은 인도에서 ‘0’의 개념을 도입했는데, 사실 아라비아 숫자도 인도 숫자를 본떠 만든 것이다. 당시 인도가 유럽과 직접 교류했다면 오늘날 인도 숫자라는 명칭을 써야 했을 것이다).

 

 

신학보다 과학을 택한 알라 유럽이 신학에 빠져 있을 무렵, 아라비아에서는 과학이 만개했다. 그림은 천문학을 연구하는 이슬람 학자들의 모습이다. 이들이 자연과학을 발전시키고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보존, 연구하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르네상스는 없었을 것이다.

 

 

굳이 피타고라스를 끌어대지 않더라도 수학은 철학과 통한다. 수학이 발달한 아랍 문화권에서는 철학도 크게 발달했다. 이슬람 학자들은 종교상의 쟁점들을 다루기 위해 옛 그리스 철학의 전통에 의존했다. 그에 따라 그리스가 쇠퇴한 이후 오랫동안 유럽 세계에서 잊혔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리엔트에서 충실히 계승되었다. 특히 12세기 아베로에스가 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 서유럽의 스콜라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가운데는 원래 그리스어로 쓰였음에도 아랍어에서 유럽어로 번역된 게 많다). 이렇게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그리스 고전의 연구는 이후 서유럽 세계가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로 접어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르네상스라는 말 자체가 고전 문화의 부활이라면, 아랍 문화는 그 부활의 다리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학문의 발달만 가지고 문화의 중심 노릇을 다했다고는 할 수 없다. 학문과 더불어 문화의 중요한 기둥을 이루는 것은 예술이다. 주로 모스크(이슬람 사원)를 장식하는 용도로 발달한 아랍 미술은 아라베스크라는 독특한 양식을 이루었으며, 아라비아의 모자이크 기법은 아랍 세계가 끝내 정복하지 못한 비잔티움 제국으로 전달되어 비잔티움 예술의 꽃이 되었다. <알라딘>이나 <신드바드의 모험> 같은 만화영화에서 보는 둥근 지붕의 아름다운 왕궁과 모스크 건축도 이 시대의 산물이다. 음악에서는 현악기의 발달이 주목할 만하다. 페르시아에서 생겨난 류트는 에스파냐에 전달되어 오늘날 에스파냐를 기타 음악의 강국으로 만들었으며(‘기타라는 악기 이름 자체도 아랍어다), ‘아라비아풍이라는 독특한 음악적 분위기를 이루었다.

 

아랍 문화권은 유라시아의 허리에 해당하는 지역적 특성상 다른 지역들의 문화를 수입하기도 쉬웠고, 아랍 문화를 여러 지역으로 전파하기도 쉬웠다.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아랍 문화의 더 중요한 의의는 후자의 측면에 있다. 즉 아랍 문화는 유럽의 동쪽 끝(비잔티움)과 서쪽 끝(에스파냐)을 통해 유럽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점에서 더 큰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유럽은 이슬람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정치적·종교적 정체성을 보존한 채 아라비아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결과 서양 문명의 뿌리를 싹으로 틔워내고 줄기로 키워내는 성과를 거두었으니, 세계사적으로 보면 아라비아는 조연이고 유럽이 주연이었던 셈이다.

 

 

칼리프의 생활 초기 칼리프들에 비해 제국이 안정된 아바스 시대의 칼리프들은 점차 종교적 풍모를 잃고 정치적 군주와 비슷하게 변해갔다. 그림은 칼리프의 생활을 보여준다. 맨 위층에서는 칼리프가 목욕을 하고 있고, 가운데 층에서는 하인들이 칼리프의 머리를 빗겨주고 있으며, 아래층에서는 칼리프가 편안히 누워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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