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추락하는 제국
몰락의 시작
번영과 몰락의 교체는 한순간이었다. 5현제의 끝, 그러니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끝으로 로마 제국은 순식간에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그러나 그 단초는 역설적이게도 아우렐리우스가 제공했다.
아우렐리우스는 5현제 중에서 유일하게 아들을 낳은 황제였다(로마 황제 모두를 통틀어도 아들을 낳은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인지상정일까? 그는 몇 대째 지속되어온 양자 상속제를 파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몇 대째 지속되어온 로마의 평화를 파괴하는 결과를 빚게 될 줄은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현명하다고 아들도 현명할 수는 없다. 마르쿠스의 아들로 제위를 계승한 콤모두스(Commodus, 161~192)는 우선 아버지가 시작한 모든 정복 사업을 포기해버렸다. 하드리아누스처럼 내치에 주력하기 위해서? 천만의 말씀,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다. 이런 지배자가 대개 그렇듯이, 그는 공포정치로 일관했다. 또한 그런 지배자가 대개 그렇듯이, 그는 얼마 못 가 친위대장에게 살해되었다.
여러모로 네로와 닮은 콤모두스, 그렇다면 그의 사후에 벌어지는 일도 네로와 닮아야 할 것이다. 과연 이번에도 제위 계승을 놓고 치열한 내전이 벌어졌다. 네로 시대에 베스파시아누스의 역할을 한 것은 아프리카 출신으로 처음 제위에 오른 세베루스(Lucius Septimius Severus, 146~211)였다. 무관 출신인 그가 군사독재를 꾀한 것은 당연하지만, 군사독재는 무력으로 집권한 것이기에 대개 정통성이 취약한 법이다. 그런데 세베루스가 권력의 정통성으로 삼은 것은 특이하게도 300년 전의 로마였다. 그는 마리우스와 술라를 계승하겠다고 공공연히 주장한 것이다.
어쨌든 세베루스는 군인으로서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친위대를 개편해 권력의 물리적 기반을 다진 다음, 멀리 제국의 동쪽으로 달려가 여전히 로마에 굴복하지 않는 파르티아를 물리쳤다. 그러고는 숨 돌리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서쪽 끝으로 달려갔다. 브리타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 철학자 황제 이 위풍당당한 모습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팍스 로마나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였다. 그 자신이 철학자였으면서도 그는 양자 상속의 전통을 깨고 자신의 피붙이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현명하지 못한 짓을 저질렀다. 그것은 곧 제국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를 빚었다.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속주 접경지대에서의 반란, 그러나 사정은 예전과 달랐다. 로마는 약해지고 있었고, 그에 반비례해 이민족들은 강해지고 있었다. 칼레도니아의 스코트족과 픽트족은 하드리아누스 장성을 부수고 브리타니아 남부까지 치고 내려왔다. 분노한 세베루스는 이 기회에 칼레도니아까지 점령해 브리타니아를 완전히 영토화할 마음을 먹었는데, 이것이 의욕 과잉이자 판단 실수였다. 그는 요크에서 전사함으로써 브리타니아에서 죽은 유일한 황제가 되고 말았다. 결국 브리타니아 속주의 경계선은 하드리아누스 장성으로 확정되었다(오늘날의 하드리아누스 장성은 당시 파괴된 이후에 재건된 것이다).
군사적 측면에서 세베루스는 베스파시아누스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뛰어난 행정 능력을 겸비한 베스파시아누스와 달리, 세베루스는 오로지 군인이었다. 두 아들에게 전해진 그의 유언장에는 “서로 합심해라, 병사들을 후대하라,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라.”라고 되어 있었다.
세베루스의 아들 카라칼라(Caracalla, 188~217)는 첫째 유언을 무시하고 둘째와 셋째 유언만 지켰다. 몇 개월 동안 공동 황제로 있던 동생 게타를 죽이고 단독 황제가 되었고(그전에 그는 자기 장인도 살해한 터였다), 자신의 병사들을 비밀경찰로 만들어 공포정치를 실시했던 것이다. 짧은 재위 기간 내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동방 정벌을 계획한 그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군대의 손에 살해되었다. 그가 남긴 유일한 업적은 212년에 로마 시민권을 무제한으로 모든 속주민에게 확대 부여한 것인데, 실은 그 목적도 세금을 많이 거두어 자신의 병사들에게 봉급을 충분히 주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이것을 계기로 로마 본토 주민과 속주민 사이에 지위상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그가 의도하지 않은 발전이었다.
▲ 황제의 사치 5현제 시대 동안 억눌려왔던 황제의 사치와 방탕은 그 시대가 끝나자마자 화산처럼 분출했다. 그림은 오로지 자신의 군대만 특별히 배려하며 공포정치를 일삼았던 카라칼라가 지은 공중목욕탕의 복원도다. 황제의 품성과는 무관하게 이 목욕탕은 로마의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주며, 당시 로마 시의 종합 오락 센터였다.
위기는 위기를 부르고
지금까지 우리는 로마 황제들의 치적을 소상히 밝혀가며 로마의 역사를 더듬어왔지만,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다. 말기적 증상을 완연하게 보이는 3세기 이후의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가 거의 무능력하고 무의미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우선 재위 기간이 극히 짧고 권력이 대단히 불안정했다. 카라칼라의 제위를 이은 마크리누스(Marcus Opellius Macrinus, 164~218)는 겨우 1년, 그다음 황제인 헬리오가발루스(Heliogabalus, 204~222)는 겨우 4년밖에 재위하지 못했다. 심지어 235년부터 284년까지 50년 동안 로마 황제는 무려 26명이었으니, 평균 재위 기간이 2년도 채 안 된 셈이다. 가히 ‘황제 인플레이션’의 시대였다(세베루스가 제위에 오른 193년부터 284년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군인 출신 황제들이 연이어 나왔기 때문에 군인황제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기간 동안 로마는 급속도로 힘을 잃어갔다. 부자들은 재산이 크게 줄어들었고, 서민들은 가난해졌다. 무역이 위축되었고, 농토가 버려졌다. 게다가 전염병이 나돌았고, 아시아 속주에서는 지진이 자주 발생했다. 이것만 해도 총체적인 위기였으나 더욱 큰 위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로마 세계를 둘러싼 바깥의 정세 변화였다.
동쪽에서는 수백 년 동안 로마에 대항하던 파르티아가 마침내 226년에 멸망했다. 그렇다고 로마가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강력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일어나 파르티아를 멸망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북쪽에는 더 직접적인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트족이었다. 지금의 루마니아가 고향인 그들은 257년 소아시아 북부를 점령해 로마 제국의 중요한 육로를 봉쇄했다. 바깥에서 일어난 불길은 금세 내부로 번졌다. 중앙정부를 믿고 의지할 수 없게 된 속주들이 저마다 독립을 부르짖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로마 황제는 기발한 방법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변방에 위치한 속주들의 군대를 아예 승인해버린 것이다. 이미 로마 시민권이 제국 전체로 확대된 상태이므로 구실도 좋았다. 모든 로마 시민은 로마 제국을 수호할 의무가 있으니까. 이 방법이 효과를 본 덕분에 268년부터 282년까지 3대에 걸쳐 제위에 오른 일리리쿰 출신 황제들은 속주군을 이용해 고트족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상황이 호전된 것은 잠시뿐이었고, 로마의 국력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게다가 속주를 승인한 결과 전통의 막강한 로마 군단은 유명무실해졌고, 오히려 속주군이 군벌을 이루어 로마의 용병과 같은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제국이 부패하고 쇠락하기 시작하면 각지에서 사병 조직을 거느린 군벌들이 생긴다. 중국의 경우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 2세기에 진 제국을 멸망시킨 항우와 유방도 그랬고, 8세기 당 제국 말기 변방의 번진(藩鎭)들은 그 대표적인 예다. 또 20세기 초 청의 멸망으로 중국의 제국사가 끝난 직후 북양군벌들은 사병 조직을 기반으로 중앙 정권을 위협했다】.
로마는 결국 용병으로 망하게 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3세기에 망했어야 할 늙은 제국의 수명이 200여 년 더 늘어나게 된 것은 제국 말기에 등장한 두 명의 걸출한 황제 덕분이었다. 그중 첫 번째는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245~316)다.
▲ 페르시아의 부활 로마를 그토록 괴롭히던 동쪽 변방의 파르티아는 동방의 또 다른 강국으로 성장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했다. 사진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은 접시인데, 페르시아의 왕이 활로 사자를 사냥하면서 발밑에 사자 한 마리를 짓밟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로마인들이 봤다면 차라리 파르티아가 있는 게 낫겠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수명 연장 조치
말기 암 환자를 앞에 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최후의 수단인 수술에 의지하기로 했다. 첫 번째 수술은 권력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의사로 있는 기간이 최소한 어느 정도는 확보되어야 수술이든 무엇이든 할 게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지에서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군벌들을 달래야 했다. 이를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모험에 가까운 시도를 했다. 그것은 제국을 분할하는 것이었다.
286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료인 막시미아누스를 서방 황제로 삼고 자신은 동방 황제가 되었다【로마 제국이 동서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은 지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방 제국(지중해 동부와 소아시아, 이집트)과 서방 제국(이탈리아, 갈리아, 에스파냐, 북아프리카)의 차이는 로마 초기부터 뚜렷했다. 동방은 오리엔트, 그리스의 역사를 이어받은 전통적인 문명 세계였고, 서방은 그 씨앗을 받아 키운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제국의 동부에 관한 한 로마는 관리와 행정만이 가능했을 뿐 더 앞선 문명을 전달하지는 못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동방 정제를 맡은 것도 그 자신이 달마치야(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출신인 탓도 있겠지만, 동방이 문명의 중심지이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두 황제가 각자 한 명씩 제위 계승자를 미리 정하기로 했다. 정제(正帝) 두 명에 부제(副帝) 두 명을 두는 방식이었는데, 사실상 황제가 네 명인 셈이었으므로 이것을 테트라르키아(tetrarchia, 4두 정치)라고 부른다. 정제의 정식 명칭은 아우구스투스였고, 부제의 정식 명칭은 카이사르였다는 데서 그 변형된 제정의 지향점을 짐작할 수 있다.
황제가 네 명이니 자연히 수도도 네 곳으로 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지금의 터키 이즈미트)를 수도로 삼고 소아시아에서 이집트까지 제국의 동부를 다스렸다. 그의 부제인 갈레리우스는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에서 발칸을 지배했다. 또 막시미아누스는 메디올라눔(밀라노)을 수도로 정하고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맡았으며, 그의 부제인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의 트리어에서 에스파냐, 갈리아, 브리타니아를 맡았다.
이처럼 기묘한 제정을 낳은 테트라르키아는 권력의 안정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자칫하면 서열이 무너져 제국이 분열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 점을 우려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이 최고 권력자임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 동방 정제가 최고 서열이라는 사실은 이후 로마의 향방(아울러 중세 초기의 구도)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최고 권력자에 어울리게, 또한 동방의 정제답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양식 전제군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려 애썼다. 그는 자신이 신의 대리인이라고 선언하고, 의장과 예식도 페르시아풍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로마 제정은 전제군주정(dominatus)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었다. 바야흐로 로마 황제는 이집트의 파라오나 중국의 천자 같은 절대 권력의 화신이 된 것이다.
권력의 분산이 오히려 권력의 집중을 가져왔으니 역설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것으로 큰 권력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작은 권력, 즉 속주 총독들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속주 총독이 함부로 군대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들에게서 군사 지휘권을 빼앗았다. 게다가 속주의 크기도 아주 작게 세분하고, 전체를 12개의 큰 관구로 묶어 통제하기 쉽게 만들었다. 명백한 행정 편의주의였지만 황제에게는 국가 비상사태라는 근거가 있었다.
▲ 4두의 상징 병든 로마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환자의 몸을 네 조각으로 나누기로 했다. 이 조각상은 그것을 나타내는 <4황제상>이다. 네 명의 황제(두 명의 정제와 두 명의 부제)는 이렇게 서로 부둥켜안고 있으나 실은 저마다 욕심이 달랐다. 로마의 분열은 이제 필연적이다.
이렇게 권력을 수술한 다음에는 군대를 손 볼 차례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아우구스투스 이래 로마군은 변방을 지키는 것을 늘 주요 과제로 삼았으며, 그에 따라 로마 본토에는 군대의 주둔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이민족의 침략을 호되게 겪은 결과 중앙군의 필요성이 명백해졌다. 300년전 아우구스투스는 제위를 노리는 군대 사령관들을 경계하기 위해 군대를 억제했으나(게다가 그는 정복도 중단했다), 이제 제위가 아니라 제국 전체가 위험해진 상황이므로 비상조치가 필요했다.
하지만 새로 군대를 육성하는 데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더구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육성하려는 군대는 일반 보병이 아니라 중무장의 기병대였다. 보병을 기초로 한 로마 군단 전술은 이미 낡았다. 기병대를 기동타격대로 삼고 변방에서 문제가 생기면 즉각 지원에 나서는 것이 선진 전술이었다. 그러자면 병력이 많이 필요했다. 그런데 병력이야 게르만족 용병으로 충원하면 된다지만 가뜩이나 어려운 나라 살림에 막대한 군비는 어디서 구할까? 더구나 기병은 돈이 많이 들었다.
황제가 개인 재산으로 국가 재정을 충당하던 것은 낡은 방식이기도 했지만, 빈농 출신에다 말단 병사에서 시작해 제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돈 대신 새로 강화한 권력이 있었다. 원래 황제란 재산이 아니라 권력으로 말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이런 점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중국 황제에 가장 가까운 지배자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돈으로 사야 할 것들을 권력으로 징발하기로 했다. 기술자들은 무상으로 국가에 부역해야 했고, 변방을 지키는 군인들은 대를 이어 병역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콜로나투스도 더욱 강화되어 농민들은 아무리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도 마음대로 농토를 버리고 떠날 수 없었다. 기술자나 상인이나 군인이나 농민이나 모두 거주 이전의 자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자유를 묶어놓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국가적 어려움 속에서도 아직 로마 시민들에게 양곡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전통은 유지되었지만, 번영의 시대와 자유의 맛을 기억하는 시민들은 빵만으로 살 수 없었다. 그렇게 보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수술은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라 봉합해놓은 데 불과했다. 더구나 그런 임시방편의 조치는 강력한 권력이 뒷받침할 때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 고난의 신앙 그리스도교는 많은 박해와 탄압을 받은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로마 시대 내내 그리스도교는 신앙과 포교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제국 분열의 조짐 속에서 강력한 황권을 확립하려 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그리스도교도들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은 지하 무덤 속에 숨어 신앙을 보존했는데, 이것이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카타콤이다.
두 번째 의사
과연 강력한 권력이 사라지자 즉각 그 체제는 무너졌다. 체질상 전제군주에 맞지 않았고 정치적 야심도 크지 않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5년 홀연히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고향인 달마치야의 해변에 집을 짓고 은거해버렸다(그 무렵 그는 비록 예순 살의 노인이기는 했으나 권력의 절정에 있었고 경쟁자도 없었던 터라 그의 돌연한 은퇴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기둥이 빠져나갔으니 체제가 온전하기는 어려웠다. 그전부터 기미를 보이던 인플레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화폐를 믿지 않고 현물 거래에 나섰다. 심지어 세금마저도 현물로 납부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통화 체계가 무너질 테고, 제국의 경제가 송두리째 붕괴할 게 뻔했다.
그러나 더 직접적인 위협은 권력 승계의 문제였다. 최고 권력자가 사라진 마당에 4두 정치를 유지할 의지는 나머지 3두에게 없었다. 그렇다면 유일한 정제인 서방 황제 막시미아누스가 최고 서열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그럴 깜냥이 되지 못했다. 형님처럼 받들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은퇴하자 마음도 허전하고 권력에도 불안을 느껴 곧장 그의 뒤를 따랐다(그는 2년 뒤 아들과 함께 다시 제위를 노리지만 콘스탄티누스에게 제압을 당한다).
부제 두 명, 즉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정제에 오르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부제의 후계자들, 즉 다음 부제를 임명하는 데는 격렬한 다툼이 있었다. 여기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80년경~337)였다.
니코메디아에 인질로 살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갈레리우스가 니코메디아의 주인이 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즉각 궁성을 탈출해 멀리 아버지가 있는 갈리아의 불로뉴로 갔다(지금의 터키에서 프랑스까지 간 셈이다). 그의 아버지는 마냥 반가웠다. 브리타니아 원정을 계획하고 있는 판에,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따라 이집트와 페르시아 원정에도 참가했던 베테랑 아들이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306년 콘스탄티우스는 아들과 함께한 브리타니아 원정에서 사망했다. 휘하 병사들과 갈리아 여러 속주의 총독들은 일제히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황제, 그것도 서방 정제로 추대했다.
▲ 밀비우스 전투 전투 자체는 중요하지 않지만 밀비우스 전투는 로마 제국의 수명 연장을 위해, 더 중요하게는 유럽 문명의 ‘줄기’를 위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콘스탄티누스가 승리하지 않았다면 로마 제국은 일찌감치 분해되었을 테고, 그리스도교의 공인도 훨씬 늦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가 난 갈레리우스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별도로 서방 정제와 부제를 임명했다. 이제 권력투쟁은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아직 열세라고 느낀 콘스탄티누스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 머물면서 힘을 길렀다. 311년 갈레리우스가 병사한 것은 그에게 신호탄이 되었다. 그 이듬해 로마 정복을 결심한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서 예상을 뒤엎고 승리함으로써 실력으로 서방 정제의 자리를 차지했다. 뒤이어 324년에 그는 동방 정제인 리키니우스마저 죽이고 제위에 올랐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두 정치 이후 무려 40년 만의 단독 황제였다.
세력의 근거지를 서방에 두고 있던 콘스탄티누스였으나 그의 마음은 늘 동방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행정의 중심은 수백 년 동안이나 서방(로마 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경제와 문물의 중심은 동방이었던 것이다(더구나 그의 고향은 발칸의 나이수스였다). 그가 보기에 그간 로마가 수많은 어려움과 위기를 겪었던 이유는 정치적 중심과 경제적 중심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330년에 그는 로마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천도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새 수도는 동방에 있어야 하고 기존의 대도시가 아니어야 한다는 게 천도의 원칙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새 수도는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인 옛 비잔티움의 터전에 건설되었으며,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즉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지배 체제는 기본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전제 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게르만 용병 부대로 이루어진 친위대를 증강해 처음부터 반란의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 행정제도에서는 추밀원을 새로 구성했다. 그전까지는 황제의 임명으로 구성되는 자문 기구가 있었으나 추밀원은 정부 각 부서의 장들이 참여하는 회의체였으므로 오늘날의 내각처럼 한층 발달한 관료 기구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인플레이션을 잡는 게 급선무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유명무실해진 은화를 버리고 솔리두스라는 금화를 새로 만들었다. 현물 경제는 여전히 지속되었지만 솔리두스는 금화인 덕분에 통화 가치를 잃지 않았으므로 그런대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 콘스탄티누스의 노력 역사적 의의로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게 최고의 업적이겠지만, 그 밖에도 콘스탄티누스는 솔리두스라는 금화를 만들어 물가를 안정시켰고,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해 제국의 수도를 동유럽으로 옮겼다. 그러나 결국 그의 조치는 제국의 수명을 잠시 연장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왼쪽은 그의 시대에 제조된 금 펜던트이고 오른쪽은 콘스탄티누스의 흉상이다.
정치적 무기가 된 종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라는 뛰어난 의사가 연이어 출현한 덕분에 로마 제국은 늙고 병든 몸으로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에 비해 콘스탄티누스의 개혁은 그다지 새로울 게 없었고, 제국의 골간을 이루는 농민들의 삶을 낫게 해준 것도 없었다(오히려 그는 세금 부담을 늘렸고, 콜로나투스를 더욱 강화했다). 그런데도 후대의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를 그냥 황제라고 부르지 않고 대제(大帝)라고 부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물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도 그런 호사스런 칭호를 얻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313년의 밀라노 칙령이 없었다면 콘스탄티누스는 그저 그런 황제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밀비우스 전투에서 승리해 서방 정제가 된 이듬해에 그는 밀라노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를 공인했다. 이것은 로마 제국이 서양 문명의 뿌리로서 마지막으로 기여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공헌이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밀비우스 전투를 앞둔 312년 10월 28일 저녁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에서 저무는 해의 바로 위에 십자가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십자가에는 ‘Hoc Vince(정복이 끝났노라)’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병사들과 함께 있었으니 본 사람이 아주 많은데다, 훗날 콘스탄티누스는 에우세비오스라는 신학자(그는 콘스탄티누스의 전기를 썼다)에게 자기가 본 것이 사실이라고 맹세까지 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도 당연하다.
이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아니면 환영인지 사기극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어쨌든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함으로써 이후 서구의 역사, 특히 중세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그가 밀라노 칙령을 내린 배경에는 그렇게 종교적인 요소만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리스도교 역사가들 덕분에 콘스탄티누스가 대제로 기록되었듯이, 그들 덕분에 폭군의 대명사로 기록된 네로가 로마 황제로 있던 시절(1세기)에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교를 모태로 탄생했다(물론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그리스도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태어났지만 그리스도교가 종교의 골격을 갖추고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사후부터다). 생겨날 당시만 해도 그리스도교는 성서에 나오는 12사도 등 일부 마니아들만 믿는 컬트적 종교였고, 유대교도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12사도보다 그리스도교의 포교에 더욱 큰 공헌을 한 인물은 바울(바오로)이었다. 그는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 지중해 동부 일대를 돌아다니며 이 신흥종교를 널리 알렸다(후대에 바울은 그 공로로 사도와 동급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바울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는 박해를 받지 못했을 테고 세계 종교로 자라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로마는 전통적으로 다른 종교에 관용적이었으나 그리스도교가 크게 세력을 키우자 아연 긴장하고 3세기부터는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교세가 확장될수록 탄압의 강도도 심해졌다. 무릇 종교란 탄압이 심할수록 더욱 확산되게 마련이다. 순교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만큼 그리스도교의 기반은 공고해졌다【당시 순교자들은 후대에 ‘그리스도교 세상’이 되었을 때 성인으로 존경받게 된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오늘날 서양인의 이름에도 전승되었다. 편의상 영어식 이름만 살펴보면, 비틀스 멤버들의 이름인 존, 폴, 조지를 비롯해 피터, 지미, 조셉, 톰, 스티븐, 그레그, 샘, 앤디, 데이비드, 크리스, 앤터니, 니컬러스, 저스틴, 패트릭, 메리, 제인, 앤, 루시, 실비아, 캐서린 등등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남녀의 이름들은 극히 많다. 서양 이름의 또 다른 계통은 중세의 왕들에게서 비롯되었다. 헨리(앙리, 하인리히, 엔리케), 찰스(샤를, 카를, 카를로스), 윌리엄(빌헬름, 기욤, 빌), 에드워드(에두아르, 에드바르트, 에디), 리처드(리하르트, 리치), 앨프레드(프레드, 프레디) 등의 이름들이 그것이다】. 교회와 사제, 주교, 부제 등의 교직도 생겨났다. 초기의 어려움은 순전히 신앙의 힘만으로 이겨내야 했으나 그다음부터는 조직으로 버틸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그리스도교는 이제 세계 종교로서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도들을 대량 학살했는데, 이것이 최대의 박해로 기록된 사건이다. 자신을 살아 있는 신이라고 주장하고 전통 종교의 최고신인 유피테르가 현신한 존재라고 선언한 디오클레티아누스로서는 그리스도교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로마 제국을 위해서는 더 공적이 컸던 그가 대제라는 호칭을 콘스탄티누스에게 빼앗긴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로부터 불과 10년 만에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권력투쟁의 후발 주자로서 위험한 승부를 벌이고 있었던 콘스탄티누스는 신흥 세력에 의지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늘에서 십자가를 목격한 사건은 그 목적을 위해 조작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밀라노 칙령은 고도의 정치적 게임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측근들 중에 그리스도교도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정작 그 자신은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교에 관심이 크고 우호적이었으면서도 다른 종교들에 관해서도 관용을 취했다. 어쨌든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만큼 그는 이 신흥 종교를 널리 전파하기 위한 여러 가지 후속 조치를 시행했다. 성직자가 행정상의 의무에서 면제된 것이라든가, 교회 건축이 활성화된 것이 그런 예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공헌은 따로 있었다. 밀라노 칙령에 뒤이어 그의 두 번째 종교적 공로는 단독 황제에 오른 이듬해인 325년에 개최한 니케아 공의회였다.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수백 년에 이르자 자연히 종파도 여럿이 생겨나게 되었다. 어려운 시절에는 종파의 대립이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오히려 공인을 받은 뒤부터 종파들 간에 첨예한 대립이 생겨났다. 특히 4세기 초의 사제인 아리우스(Arius, 250년경~336)는 신과 그리스도가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신처럼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특정한 시대에 신이 세계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창조한 존재라는 주장이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예언자 급의 ‘인물’일 뿐 신과 혈통적 관계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신격을 유지하지 못하게 될뿐더러 처음부터 선을 긋고 출발한 유대교와 다를 바가 없어지므로 아리우스의 주장은 커다란 문제였다. 반격이 필요할 때 총대를 멘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3년경~373)였다. 그는 아버지인 신(성부)과 그 아들인 그리스도(성자), 성령의 세 위격(位格)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삼위일체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종파들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조바심을 느꼈다.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공인한 그리스도교가 분열과 대립으로 약화된다면 그로서도 큰 위기였던 것이다. 교회가 단일 제국의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하려면 결코 분열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교리상의 문제가 아니라 단결과 통합이었다【324년 콘스탄티누스가 아리우스에게 보낸 친서에는 이 종교 논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드러나 있다. “양측의 차이점이 생겨난 근원과 토대를 성실하게 연구한 결과, 나는 그 원인이 그렇게 격렬한 다툼이 필요 없을 만큼 아주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그러니 이제 양측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여러분의 동료[콘스탄티누스]가 보내는 충고를 받아들여주십시오.”】. 그래서 그는 최초의 종교회의인 니케아 공의회를 열기로 했다(지역적 종교회의는 그전에도 있었으나 전 지역을 한데 모은 종교회의는 처음이었다).
아리우스파는 아타나시우스파는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이 자리에서 결론을 봐야 한다는 거다. 이런 마음으로 콘스탄티누스는 회의의 개회사를 하고 중립적 진행을 맡았다. 한 달간의 격론 끝에 승리한 것은 아타나시우스파였고, 패배한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몰렸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파는 종교적 승리자일 뿐이었고, 진정한 승리자는 콘스탄티누스였다. 어쨌든 결론이 났으니까. 그가 가장 우려한 사태는 무승부였을 뿐이다(그는 죽기 직전에 아리우스파의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니케아 공의회는 꼬박 한 달 동안 열렸으며, 유럽 전역에서 약 300명가량의 주교들이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이단 문제 이외에도 부활절의 날짜를 확정하는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회의가 끝난 뒤 콘스탄티누스는 성대한 연회를 열어 주교들의 노고를 치하했으며, 돌아가는 주교들에게 선물 꾸러미를 한 아름씩 안겼다. 콘스탄티누스는 선물을 받은 주교들보다 더 기뻤을 것이다. 아타나시우스파의 주교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바로 그였으므로】.
이단으로 판정받고 로마 제국에서 추방된 아리우스파는 이후 게르만족에게 퍼졌다. 그러나 나중에 게르만족이 로마를 멸망시키고 역사의 방향키를 쥐게 되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타나시우스파보다 오히려 아리우스파가 그리스도교 세계의 형성에 더 큰 공헌을 한 셈이다.
▲ 최초의 종교회의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는 최초의 대규모 종교회의였다. 로마 제국 전체의 주교들이 모인 것은 아니었고 동방교회의 성직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이 회의는 콘스탄티누스의 목적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림은 6세기에 그려진 니케아 공의회의 장면이다.
제국의 최후
의사가 담당 환자보다 먼저 죽는다면 그 환자의 앞날은 뻔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죽자 로마 제국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그 뒤로도 제국은 150년 가까이 더 존속하지만, 산소 호흡기로 겨우 명맥을 유지했을 뿐 제대로 산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로마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병든 사자를 공격하는 하이에나들의 이빨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4세기 후반부터 이민족들은 로마를 거세게 물어뜯었다. 367년에 브리타니아의 여러 부족은 서로 힘을 합쳐 브리타니아 속주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브리타니아야 원래부터 반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아직 단일한 정체성이 없던 픽트족과 색슨족, 스코트족이 연계해 로마에 대항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곡일 뿐이었다. 주제곡은 375년부터 시작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었다【이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수백 년에 걸친 세계적 민족대이동의 결과다. 근원은 기원전 2세기 한 무제의 흉노 공격에서 시작된다(『종횡무진 동양사』, 111~113쪽 참조). 여기서 밀려난 흉노는 중앙아시아로 진출해 그 지역의 주인으로 자리 잡았다(흉노에 쫓겨난 대월지의 부족들은 인도로 남하해 쿠샨 왕조를 열었다). 계속해서 서쪽으로 동유럽까지 진출한 흉노의 일파는 훗날 유럽 역사가들에게 훈족(Hu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375년 이 훈족이 다키아 일대에 살던 서고트족을 공격해 서고트족이 남쪽의 모에시아로 이동한 게 게르만족 대이동의 시작이다. 이후 유럽의 여러 민족은 마치 도미노 게임처럼 연쇄 이동을 벌이게 되는데, 그 와중에 로마 제국이 멸망한다. 고대의 동양과 서양은 500여 년에 걸친 기나긴 시차를 두고 세계사적 사건을 ‘합작’한 셈이다】.
중앙아시아의 강성한 민족인 훈족이 침략해오자 도나우 강 하류에 살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은 큰 두려움을 느꼈다(고트족은 원래 스칸디나비아가 고향이었는데, 기원 전후 무렵에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나뉘었다. 고트라는 명칭에서 중세 예술 양식인 ‘고딕’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동방 출신답게 훈족의 병사들은 말을 잘 다루었고, 개인 전술에 능했으며, 특히 활 솜씨가 뛰어났다. 게다가 그들의 옆으로 찢어진 눈, 큰 광대뼈, 강인하고 무시무시한 인상은 서고트족이 고향을 버리고 달아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훈족에게 쫓겨난 서고트족의 한 무리는 서쪽으로, 다른 한 무리는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남쪽에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지 얼마 안 되는 로마 제국의 심장부가 있었다. 로마는 이들이 영토 내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면서 각종 조건을 달았는데, 이게 서고트족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들은 훈족에게서 맞은 뺨을 로마에 대한 화풀이로 돌렸다. 378년에 로마는 서고트군에게 대패한 뒤 교통의 요지인 마케도니아의 아드리아노플을 잃고 황제인 발렌스(Flavius Iulius Valens, 328년경~378)마저 전사하는 참극을 겪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중심을 동방으로 옮긴 뒤 처음으로 당하는 굴욕이었다.
새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47~395)의 해결책은 하나뿐이었다. 서둘러 서고트족과 평화 관계를 맺고 그들을 용병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한때 막강했던 로마 군단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며, 이제 로마 본대보다 용병 부대가 더 많고 더 강력해졌다. 테오도시우스는 392년에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고, 제국의 전체 영토를 얼추 통합해 꺼져가는 제국의 촛불을 되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결국 그는 통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고 말았다. 그가 죽은 뒤 제국은 다시 동방 제국과 서방 제국으로 나뉘었고 두 번 다시 통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테오도시우스 이후의 황제들은 지극히 무능했기 때문에 그는 실제적인 마지막 황제라고도 할 수 있다.
강국을 유지하려면 정치와 경제가 살아야 하고, 국가의 꼴이라도 유지하려면 군대가 살아야 한다. 그러나 로마는 최후의 보루인 군대마저 무너졌다. 로마 안에서는 게르만족 용병들이 군대의 실권을 잡고 있었고, 로마 밖에서는 게르만족의 강성한 민족들이 로마 침공을 노리고 있었다(둘 다 게르만족이니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게르만족이란 로마인들이 중부 유럽의 여러 민족을 통칭한 것일 뿐 단일한 민족이 아니다).
이제 세상은 게르만족의 것이었다. 406년 로마 안의 게르만족과 로마 밖의 게르만족이 게르마니아에서 서로 맞붙었다. 승자는 바깥의 게르만족이었다. 서고트족은 순식간에 갈리아와 에스파냐까지 정복했고, 반달족은 바다를 건너 북아프리카로 진출했다. 그렇잖아도 로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중이던 브리타니아는 그런 변화를 계기로 로마에서 영영 멀어졌다. 그 와중에 410년에는 서고트의 왕 알라리크가 이탈리아 반도를 침략하고 로마 시를 점령했다【당시 서방 제국의 황제는 호노리우스(Flavius Honorius, 384~423)였는데, 무능한 황제의 전형을 보여주는 일화를 남겼다. 닭을 기르는 데 광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아끼던 닭의 이름을 ‘로마’라고 지었다. 서고트군이 로마 시를 함락시키자 부하가 황급히 그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폐하, 로마를 잃었습니다.” 호노리우스는 거의 사색이 되었으나 잃은 것이 병아리 로마가 아니라 수도 로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안정을 되찾았다. 이런 황제가 40년 동안이나 제위에 있었으니 그렇잖아도 어려운 로마의 부흥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호노리우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나약한 황제라는 평가를 받았다】. 수도 로마를 유린당한 것은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의 침략 이후 800년 만에 당하는 치욕이었다. 다행히도 알라리크는 로마를 통치하려 들지 않고 황제와 평화조약을 맺은 뒤 에스파냐 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온갖 수모를 겪은 로마에 또 한 가지 다행스런 일이 있었다. 배불리 먹었다 싶은 게르만족은 이후 수십 년 동안 로마를 괴롭히지 않았다. 에스파냐에 서고트 왕국, 북아프리카에 반달 왕국, 갈리아에 부르군트(부르고뉴) 왕국, 프랑크 왕국 등이 자리를 잡은 뒤에는 판세가 이렇게 굳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로마는 서방 속주들을 거의 다 잃었지만 더 이상의 참화는 없는 듯했다.
▲ 원로원의 명맥 제국 시대에도 로마 원로원은 존속했다. 물론 공화정 시대와 같은 의사 결정 기구는 아니었고, 황제를 보좌하는 정도의 역할로 축소되었다. 제국의 중심을 동방으로 옮긴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새로 원로원을 구성하고 이것을 추밀원이라는 정식 관료 기구로 재편했다. 사진은 로마에 있는 원로원 건물이다.
그러나 451년 이번에는 민족대이동의 첫 도미노를 쓰러뜨렸던 민족이 로마를 침략해왔다. 훈족이 쳐들어온 것이다. 아틸라(Artila, 406년경~453)가 이끄는 훈족의 침략은 그때까지 로마가 겪은 어떤 시련보다도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 게르만족이 게임을 즐기는 수준이었다면, 훈족은 직업적인 약탈자였다. 오죽하면 로마인들이 아틸라를 ‘신의 채찍(혹은 신의 재앙)’이라고 불렀을까?
처음에는 서고트와 프랑크, 부르고뉴 등이 훈족의 침략을 어느 정도 저지했다. 그러나 ‘신의 채찍’을 막아낸 것은 ‘신의 사자’였다. 교황 레오 1세(Leo Ⅰ, ?~461)가 아틸라를 설득해서 철군하게 한 것이다【아틸라는 동양인 최초로 서양의 유명한 문학작품에 등장하기도 했다. 독일 중세의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Das Nibelungenlied)』가 그것이다. 여기서 에첼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아틸라는 여주인공 크림힐트를 아내로 삼는데, 그녀는 죽은 연인 지크프리트의 복수를 위해 친정인 부르군트 왕족을 몰살시킨다. 실제로 부르군트 왕국은 훈족에게 멸망당했는데, 중세 독일인들에게는 이민족의 침략을 크림힐트의 이야기로 각색하는 게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이후 19세기에 독일 민족주의를 고취하려 한 바그너에 의해 <니벨룽겐의 반지>라는 악극으로 만들어졌다】.
훈족의 침략에서 배웠을까? 455년 또 다른 이민족이 로마 시를 점령했다. 이번의 주인공은 유럽에서 북아프리카로 쫓겨난 반달족이었다. 당시 반달족은 몇 년 전의 훈족처럼 점잖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이 로마를 무참히 파괴한 사건을 계기로 후대에 반달리즘(vandalisn)이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바로 ‘야만적인 파괴 행위’라는 뜻이다.
이렇게 제국이 허수아비가 되어가는 가운데서도 로마의 황제는 여전히 두 명씩 존재했다. 그러나 동방 제국이나 서방 제국이나 모두 실권은 황제에게 있지 않고 이민족 출신의 장군들에게 있었다. 그래도 굳이 비교한다면, 속주들을 모두 잃은 서방 제국보다는 그런대로 영토를 유지하고 있던 동방 제국의 형편이 더 나았다. 속주들의 독립으로 서방 제국은 제국이 아니라 왕국의 수준으로 하락했다. 게다가 황제마저 장군이 마음대로 ‘임명’했으니 왕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그러던 중 서방 제국의 장군인 오도아케르(Odoacer, 433~493)는 선배인 오레스테스 장군이 자기 아들을 황제로 옹립하자 이런 허수아비 짓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오레스테스를 죽이고 어린 황제를 폐위시켰다. 이때 폐위된 서방 제국의 마지막 황제 이름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였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로물루스는 로마의 건국자요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건국자였으니 공교로운 이름이었다(아우구스툴루스는 ‘어린 아우구스투스’, 즉 ‘어린 황제’라는 뜻이다).
이리하여 476년에 서방 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동방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그 뒤에도 1000년 이상 더 존속했지만, 사실상 유럽 문명의 뿌리를 키운 로마는 서방 제국이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은 476년에 멸망했다고 말하는 게 일반적이다.
▲ 훈족의 병사 수백 년 동안 로마의 ‘밥’이었던 게르만족은 이제 늙고 병든 로마를 마구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마도, 게르만도 가장 두려워한 것은 바로 동방의 강맹한 민족인 훈족이었다. 게르만의 민족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은 5세기 중반 드디어 로마 본토에까지 침공한다. 그림은 이탈리아 전역을 공포로 떨게 한 훈족의 왕 아틸라가 부하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