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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1부 씨앗 - 4장 통일, 그리고 중심 이동, 빛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1부 씨앗 - 4장 통일, 그리고 중심 이동, 빛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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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로마인들은 빛은 동방에서 왔다.”라는 말로 고대 로마 문명이 오리엔트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혔다(오리엔트라는 말 자체가 원래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이 말을 바꾸면 빛은 서방으로 갔다.”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빛이 서쪽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문명의 빛은 왜 처음 태어난 곳에서 계속 자라고 발전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까?

 

첫 번째 요인은 지리에 있다. 현대 구조주의 역사가인 브로델(Fernad Braudel)은 역사의 가장 깊은 심층에 지리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역사, 이를테면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를 정복했다는 정치사, 어디와 어디가 교역을 했다는 경제사, 관료제와 토지제도가 어떠했다는 사회사 등은 모두 근원적으로는 지리적 요인의 제약을 받고 있다일제 식민지 시대 일본의 역사가들이 발전시킨 식민지 역사관 가운데 이른바 반도사관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를 테면 우리나라는 중국처럼 대륙 국가도 아니오 일본처럼 해양 국가도 아닌 반도이므로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없고, 대륙이나 해양의 어느 한쪽에 의해서 민족의 운명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것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이루어졌으나, 그 때문에 한동안 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성, 지리적 요인이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 자체를 무시하는 잘못된 풍조가 있었다. 다양하게 변화하는 역사적 사건들의 근저에는 도도히 흐르는 불변의 역사가 있다.

 

오리엔트의 지리적 특성은 바로 중심이 없다는 점이다.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강 하구라는 두 지역은 문명이 태동하기에는 적합했으나 더 커다란 문명(오리엔트 문명)의 중심으로 역할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두 문명이 충돌을 빚을 즈음 쟁탈의 요처가 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은 교통상으로만 중심이었을 뿐 양대 문명을 끌어안을 만한 넓이(이를테면 넓은 평야 지역), 깊이(이를테면 양대 문명을 아우를 만한 토착 문명)도 없었다.

 

비옥한 초승달이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길게 늘어진 지역에서는 통일이 이루어지더라도 오래가기가 어려웠다. 이집트의 파라오와 사르곤, 함무라비 등이 모두 지역의 패자에 그친 이유, 최초로 통일을 이룬 아시리아나 페르시아가 단명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문명의 고향 흔히 말하는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세 곳이 이 지도에 있다. 그 가운데 인더스 문명은 실전되었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두 문명은 지도에서 보듯이 비옥한 초승달을 이루며 통합되어 서양 문명의 모태로 발달했다.

 

 

두 번째 요인은 오리엔트 문명 자체에 내재해 있다. 오리엔트는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문자를 가진 문명 단계로 접어들었고, 이미 기원전 3000년경에 다른 지역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고도로 발달한 정치와 행정 제도를 갖추었으며, 오늘날 전해지는 유적만으로도 감탄할 만한 훌륭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모순이 없으면 발전이 없는 법이다. 오리엔트를 주름잡은 역대 민족과 국가 들은 예외 없이 강력한 전제 체제를 확립하는 데 몰두했다. 그래서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비집고 나오는 다양한 모순을 억압하기만 했을 뿐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삼지 못했다. 전제와 독재가 사회적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 한 예가 국가 종교다. 이집트에서는 태양신이 수천 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했으며, 바빌로니아는 마르두크, 아시리아는 아슈르, 페르시아는 아후라마즈다를 모두가 섬겨야 하는 신으로 강요했다. 심지어 약소민족인 헤브라이인도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섬기면서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믿었다. 종교와 정치는 원래 쌍둥이처럼 닮게 마련이다. 국가종교는 오리엔트 특유의 전제 체제와 어울려 진보를 가로막는 질곡으로 작용했다(이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유로운 다신교를 수용하면서 지적 발전을 이룬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가정이 가능하다면 오리엔트 세계가 이런 한계를 극복할 만한 장면을 가정해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기원전 13세기에 있었던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충돌이다. 각자 2000년의 문명사적 배경을 등에 지고 초승달의 양 끝을 이루는 대표 주자였던 두 나라는 당시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냈어야 한다. 그랬더라면 오리엔트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강력한 힘의 중심이 생겨났을 것이며, 이것을 배경으로 오리엔트는 자체적으로 서쪽 유럽 세계를 향해 진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오리엔트는 서구 문명의 씨앗이 아니라 뿌리와 줄기, 열매마저도 자체적으로 생성시켰을지도 모른다. 이 기회가 무산된 이후 오리엔트는 아시리아라는 군사 국가에 의해 통일되는 역사적 비운을 맞았고, 나중에 보겠지만 힘을 키운 그리스 문명과의 대결에서 패배했다. 이후 이 지역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두 번 다시 인류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이제 문명의 씨앗은 서쪽의 유럽으로 옮겨갔고 뿌리를 내리는 일만 남았다.

 

 

황금의 유목민 스키타이의 무덤에서 출토된 황금 빗이다. 대표적인 고대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는 떠돌이 생활을 한 만큼 별다른 유적은 남기지 못했지만 유물은 많이 남겼다. 표정까지 뚜렷한 뛰어난 조각 솜씨는 유목 문명이 과연 이 정도로 발달했는지를 의심하게 할 정도다. 세 병사들 모두 바지를 입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원래 바지는 유목민족이 말을 타기 위해 고안한 옷이었다. 서양에 바지를 전한 것도 로마 북부의 유목민족인 게르만인이다. 하지만 바지가 익숙하지 않은 로마의 남자들은 여전히 킬트(kilt)라는 짧은 가죽 치마를 입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고대의 군국주의

열매를 주운 페르시아

빛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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