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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3부 뿌리② - 3장 제국의 탄생, 팽창하는 영토,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3장 제국의 탄생, 팽창하는 영토,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

건방진방랑자 2022. 1. 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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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

 

 

현대사회에서는 독재자의 최후가 대개 비참하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공포정치를 휘두르던 술라는, 비록 수는 충분히 누리지 못했으나 권력의 정상에서 편안하게 죽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군사독재의 경험은 사라지기는커녕 로마 정치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가 죽자 일단은 원로원이 권력을 되찾기는 했지만, 곧 술라의 뒤를 이어 군인 정치의 전통을 이어갈 인물이 나타났다.

 

술라가 그랬듯이, 폼페이우스(Magnus Gnaeus Pompeius, 기원전 106~기원전 48)는 술라의 부하였다가 상관의 죽음을 계기로 정치적 도약을 이루었다. 또한 술라가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을 통해 권력을 잡았듯이, 폼페이우스 역시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과시할 만한 사건을 맞이했다. 로마에서 군사적 공헌은 말하자면 권좌에 오르기 위한 입시와 같았다.

 

그 시험장은 에스파냐였다. 아시아 속주에 버금가는 로마의 금고 에스파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 우두머리는 마리우스를 추종하던 세르토리우스였는데, 그는 이미 술라의 시대에 에스파냐에서 독자적 정권을 수립해 로마에 대립하는 중이었다. 기원전 76년에 원로원의 요청을 받은 폼페이우스는 에스파냐로 출장 겸 출정을 떠나 4년 만에 반란을 진압하고 로마로 개선했다. 10여 년전 술라의 개선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젊은 폼페이우스는 술라만큼 카리스마가 강력하지 못했고, 또 로마 원로원은 술라의 공포정치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집정관에 오를 수 있는 법적 연령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이인 데다 필요한 공직 경력도 모자랐다.

 

그렇잖아도 1인 집권이 어려운 분위기였는데, 마침 폼페이우스에게는 강력한 경쟁자도 있었다. 바로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기원전 115년경~기원전 53)라는 재산가였다. 부유한 가문 출신인 크라수스는 술라의 시대에 숙청된 사람들의 재산을 사들여 로마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크라수스의 이재 감각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인구가 집중되면서 로마시에서는 화재가 자주 발생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소방서가 없었으므로 크라수스는 자비로 소방대를 조직했다.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면 크라수스의 소방대는 즉시 화재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불을 끄기 전에 먼저 불타고 있는 건물에 대한 흥정이 시작되었다. 협상이 이루어지면 그 건물은 크라수스의 소유가 되므로 즉각 진화 작업에 들어갔다. 협상이 결렬되면 소방대는 건물이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불구경만 했다.

 

사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경쟁자라기보다는 협력자였다. 둘 중 누구도 술라의 빈자리를 메울 만한 힘은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공동 작품은 고대사회 최대의 노예 반란인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한 것이었다.

 

라티푼디움이 발달하면서 로마로 유입되는 노예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노예의 용도와 종류도 다양해졌다.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은 바로 로마의 경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이는 검투사들이었다.

 

기원전 73년에 검투사들은 트라키아 출신의 스파르타쿠스를 지도자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프로 싸움꾼들이 일으킨 반란이니 무력이 만만치 않았다. 봉기의 횃불이 치솟자 다른 노예들도 속속 참가해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한동안 이탈리아 중부 일대를 유린하던 노예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북쪽으로 향했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킴브리족과 튜턴족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주동자인 스파르타쿠스도 자기 고향인 트라키아로 가려면 북쪽으로 가야 했다.

 

 

2의 로마 에스파냐는 로마 시대 전체를 통해 로마의 가장 부유한 속주였다. 아시아 속주가 지중해 무역의 측면에서 소중했다면, 에스파냐는 풍부한 광산과 노예 노동력으로 중요했으며, 사실상 로마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사진은 에스파냐의 세고비아에 남아 있는 로마의 수도(水道) 시설이다. 아치형의 구조물 위로 물이 흘러가도록 만들었다.

 

 

폼페이우스가 로마에 있었더라면 당연히 원로원은 그에게 진압을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는 에스파냐에서 세르토리우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초기 진압은 크라수스의 몫이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강력한 군대가 있어야 하지만, 크라수스에게는 군대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돈이 있었다. 돈으로 군대를 사면 된다. 크라수스는 대규모 용병대를 구성해 반란의 진압에 나섰다. 때마침 에스파냐에서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폼페이우스도 스파르타쿠스의 잔당을 토벌했다. 당시 사로잡힌 노예군 전사 6000명은 아피아 가도를 따라 십자가에 묶여 처형되었다.

 

이 전공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70년 함께 집정관에 올랐다. 그러나 문제는 두 사람 다 여전히 자격 미달이라는 점이다. 민중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나 폼페이우스는 아직도 자신의 기반이 취약하다고 여겼다. 크라수스는 돈이 많으니 어떻게든 자격을 얻어내겠지만 폼페이우스는 처지가 달랐다. 그래서 그는 크라수스가 그랬듯이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더 큰 전공을 세우는 것이다. 없는 전쟁이라도 만들어야 할 판에 폼페이우스의 눈에 아직 로마에 저항하고 있는 미트리다테스와 아직 로마가 정복하지 않은 시리아가 들어왔다. 게다가 로마가 잠시 관리를 소홀히 한 틈을 타서 지중해에는 해적들이 들끓었다.

 

다시 칼을 뽑아든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7년 해적 소탕에 나섰고, 이듬해에는 미트리다테스를 완전히 굴복시켰다(풍운아 미트리다테스는 로마의 포로가 되는 대신 부하의 손을 빌려 자살했다). 곧이어 기원전 64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해 셀레우코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시리아를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불과 3년 만에 로마의 골칫거리를 모조리 제거한 것이다.

 

이처럼 빛나는 업적에도 폼페이우스의 불운은 끝나지 않았다. 로마로 개선한 그는 자신의 충직한 군대마저 해산하고 원로원에 충성할 뜻을 보였으나 반대파는 좀처럼 그를 승인하려 들지 않았다. 하긴, 아무리 호랑이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해도 호랑이를 자기 집에 들일 사람은 없으리라.

 

폼페이우스의 좌절을 절대적인 호기로 삼은 사람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기원전 44)였다. 우직한 폼페이우스와 달리 판단력이 뛰어나고 영민한 카이사르는 사실상의 실력자이면서도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3두 정치 시대를 열었다(3두 정치라는 말은 원래 그들의 정적들이 그들을 머리가 셋 달린 괴물이라는 뜻으로 부른 데서 나온 경멸적인 명칭이다).

 

 

죽음의 결투 로마인들은 신체가 건장한 노예들을 뽑아 검투사로 양성했다. 물론 로마 군단의 병사로 쓰려는 것은 아니었다. 검투사들은 경기장에서 맹수들과 싸우거나 자기들끼리 목숨을 건 대결을 벌여 로마 시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역할이었다. 이들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일으켰을 때 로마인들은 마치 사자들이 우리를 뛰쳐나온 것처럼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팽창하는 영토, 누적되는 모순

고대의 군사독재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

대권 후보의 등장

권력과 죽음을 함께 얻은 카이사르

정답은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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