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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3부 뿌리② - 3장 제국의 탄생, 팽창하는 영토, 정답은 제정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3장 제국의 탄생, 팽창하는 영토, 정답은 제정

건방진방랑자 2022. 1. 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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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답은 제정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카이사르가 죽으면 공화정이 회복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카이사르에게 충성을 바치던 군대가 있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오히려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그의 부관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기원전 82년경~기원전 30)에게 뜻하지 않은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안토니우스는 먼저 암살자들을 처벌하고 싶었으나 아직은 절대 권력자가 죽은 충격으로 인해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를 틈 타 브루투스의 무리는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예전에 폼페이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로 달아났다. 안토니우스는 갓 잡은 권력부터 안정시키기 위해 카이사르의 기병대장이던 레피두스(Marcuss Aemilius Lepidus, 기원전 ?~기원전 13)와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공동 집권이 예상되는 순간 예기치 않은 인물이 끼어들었다.

 

파르티아 출정을 앞두고 카이사르는 유언장을 다시 작성해두었다(암살을 대비한 게 아니라 곧 전장에 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언장에서 그는 누이의 외손자인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기원전 63~기원후 14)를 양자로 지정해 유산을 물려주겠다는 내용을 남겼다. 일리리쿰(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서부)에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 즉각 로마로 왔다.

 

옥타비아누스는 겨우 열아홉 살의 청년이었으나 카이사르의 상속자라는 신분이었으므로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는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카이사르의 권력을 그에게 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런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세 사람은 카이사르의 시대처럼 3두 체제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번의 3두 체제는 카이사르 시대의 3두 체제와 성격이 크게 달랐다. 무엇보다 세 사람은 모두 카이사르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등에 업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이들의 위상은 균등하지 않았다. 로마 시민들이 신격화하는 카이사르의 혈육보다 더 정통성을 갖춘 인물이 어디 있겠는가? 옥타비아누스가 젊은 나이에 경력도 보잘것없음에도 혜성처럼 떠오른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사실 잿밥(카이사르의 유산)을 더 중시한 옥타비아누스에 비해 안토니우스는 죽은 카이사르에게 더 충직했다. 권력이 얼추 안정되자 그는 만사를 제쳐두고 카이사르의 복수에 나선 것이다. 기원전 42년에 안토니우스는 마케도니아까지 가서 브루투스 일당을 격파했다(브루투스는 공화정의 꿈을 안은 채 자살했다). 그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러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안토니우스 격하 운동을 젊은이답지 않은 느긋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해 그는 스물도 안 된 나이로 집정관에 올랐다.

 

 

최초의 황제 약삭빠른 젊은이 옥타비아누스는 양아버지 카이사르가 물려준 유산을 최대한 활용해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왼쪽은 악티움 해전을 기념한 메달이며, 오른쪽은 악티움 해전을 승리로 이끈 로마의 함선이다. 이집트의 함선은 큰 데 비해 로마의 함선은 작고 속도가 빨랐다.

 

 

기반이 취약했던 3두 정치는 예상외로 오래갔다. 그러나 그 기간은 옥타비아누스가 정치적으로 (또 신체적으로도) 성장한 기간이나 다름없었다.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는 동부,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 옥타비아누스는 서부를 맡아 3두 정치를 순탄하게 이끌었다. 그러나 20년 전의 3두 정치에서도 서부를 차지한 카이사르가 결국 승리하지 않았던가?

 

영화 <아저씨>에서는 내일 사는 자가 오늘만 사는 자에게 죽는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상황에 만족하는 자가 만족하지 않는 자에게 죽는다.’ 안토니우스는 3두 정치에 만족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그렇지 않았다. 기원전 36년 그는 레피두스의 군대를 설득해 자기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손발을 제거당한 레피두스는 자연히 3두에서 떨어져나갔고, 남은 두 사람의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하지만 승부의 추는 급속히 기울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동갑내기로 절친한 친구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 기원전 63년경~기원전 12)와 같은 뛰어난 참모들을 거느리고 한창 성장하는 중이었고,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 데다 파르티아 전쟁에서도 패했던 것이다.

 

가뜩이나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가서 9개월 동안이나 클레오파트라(cleopatra, 기원전 69기원전 30)의 치마폭에서 지냈다. 클레오파트라는 일찍이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추격하면서 이집트에 갔을 때 그의 아이까지 낳은 여인이었다. 안토니우스는 그것마저 옛 상관을 본받으려 했던 걸까?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머물러 있는 것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기회였다. 아직 미정복지로 남아 있던 이집트를 향해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고(당시 이집트는 사실상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형식적으로는 속주가 아니었다), 여기서 승리하면 안토니우스는 저절로 제거될 것이었다.

 

기원전 31년 가을에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함대와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는 그리스 부근의 악티움에서 해전으로 맞섰다. 교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클레오파트라는 뱃머리를 돌려 달아났고,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뒤쫓아가 그 배에 올랐다. 지휘관이 없는 전투의 승패는 뻔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별다른 접전 없이 안토니우스 군대의 투항을 받아들여 악티움 해전을 승리로 끝냈다.

 

이듬해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까지 추격해왔다는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자살로 영욕에 찬 삶을 마감했다. 클레오파트라도 며칠 뒤에 연인의 뒤를 따랐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으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대가 끊겼다. 역사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수천 년에 이르는 이집트 왕국의 역사도 끝났다는 사실이다. 메네스 왕이 첫 이집트 왕국을 세운 이래(32쪽 참조) 3000년이 조금 넘는 시점이었다.

 

 

영웅의 싹은 청년기에 만개하는 걸까?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을 원정한 것과 같은 서른셋의 나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세계 제국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사실상의 제국 로마를 명칭상으로도 제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기원전 27,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월계수관과 방패, 그리고 군대 지휘권을 포함해 로마와 속주들의 모든 지배권을 받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신분과 호칭이다. 그는 사실상의 황제였으나, 참주를 싫어하는 로마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원로원은 그에게 프린켑스(princeps, ‘최고 시민’)라는 공식 직함을 헌정하고, 아울러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분’)라는 존칭을 바쳤다그가 받은 정식 명칭은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Ch. Imperator임페리움(Imperium: 명령권 혹은 행정권)의 소유자라는 뜻으로, 원래 정복의 임무를 완수한 사령관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황제라는 직함이 된다(영어의 emperor는 여기서 나왔다). divi filius신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Caesar는 새로 바뀐 그의 이름이다. 원래 그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였는데, 카이사르의 유언으로 상속자가 된 뒤 그는 재빨리 자기 이름에다 그의 이름을 합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또한 그의 양아버지 카이사르의 이름은 7월의 이름이 되었고(July는 율리우스Julius의 영어식 표현이다), 아우구스투스는 8월의 이름이 되었다(8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August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이들 부자 덕분에 원래 7월에서 10월까지의 이름들은 오늘날 모두 두 달씩 뒤로 밀려 9월에서 12월까지의 이름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원래 로마의 달력은 3월부터 시작했으므로, 그들 때문에 7월이 9월이 된 것은 아니다).

 

드디어 로마는 제국이 되었다. 이 시기의 제정을 원수정(prinspitus)이라고 부르지만, 공화정의 전통을 존중하기 위해 명칭을 그렇게 붙였을 뿐 사실상은 제정이었다. 로마가 이탈리아의 틀 내에 머무른 시대에 어울리는 정치 체제가 공화정이었다면, 지중해 세계를 통일한 로마에 어울리는 정치 체제는 바로 제정이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팽창하는 영토, 누적되는 모순

고대의 군사독재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

대권 후보의 등장

권력과 죽음을 함께 얻은 카이사르

정답은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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