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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3부 뿌리② - 3장 제국의 탄생, 팽창하는 영토, 누적되는 모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3장 제국의 탄생, 팽창하는 영토, 누적되는 모순

건방진방랑자 2022. 1. 4.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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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제국의 탄생

 

 

팽창하는 영토, 누적되는 모순

 

 

카르타고와 숙명의 대결을 벌이는 와중에도 로마의 정복 활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정복은 로마의 전 국민적인 활로였으므로 전쟁보다도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인구에 비해 토지가 부족한 상태에서 출범한 로마는 마치 달려야만 쓰러지지 않는 자전거처럼 정복을 계속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었다.

 

지중해의 주인을 결정하는 중대한 2차 포에니 전쟁이 벌어지는 도중에도 로마는 정복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실은 전쟁 수행을 위해서라도 늦출 수 없었다). 정복의 방향은 동부의 헬레니즘 세계, 그중에서도 일차적인 대상은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장악하고 있는 마케도니아였다. 처음에는 마케도니아를 영토화하겠다는 의도까지는 없었던 로마는 두 차례의 접전(1,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통해 마케도니아의 실력을 파악하게 되자 야망의 수위를 높였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거리낄 게 없어지자 로마는 전면전에 나섰다. 예정대로 마케도니아를 멸망시킨 뒤에는 내친 김에 시리아의 소아시아 영토마저 정복해 이곳에 아시아 속주를 건설했다. 이 기세에 겁을 먹은 이집트는 즉시 꼬리를 내리고 로마에 접근했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의 후예로 자처했던 강성한 헬레니즘 3왕국은 모두 로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로마는 역사상 처음으로 지중해 세계를 완전히 통일하는 영광을 차지했다. 정복은 끝났다. 그렇다면 로마 시민들, 특히 늘 토지에 굶주려 있던 평민들은 과연 만족했을까? 정복의 결실이 그들에게 돌아갔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버는 자와 쓰는 자가 다른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로마의 평민들이 피를 흘리며 가꾼 정복의 열매는 결국 소수 귀족들의 차지였다. 로마의 귀족들은 정복으로 얻은 토지를 독점하면서 점점 대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그 결과 노예 노동으로 경작하는 대농장이 생겨났는데, 이것을 라티푼디움이라고 부른다노예는 동양과 서양의 역사에 모두 었지만 그 성격에는 차이가 있다. 라티움의 경우에서 보듯이, 서양의 노예는 로 경제적 생산을 담당했다. 그러나 의 노예, 즉 노비는 주로 귀족들의 집안서 부리는 종복이었다. 동양의 노비와 의 노예는 신분적으로 엄격하게 구분세습되었지만, 동양의 경우는 주로 지배 피지배라는 정치적 의미가 강한 반면, 서양의 경우는 착취 - 피착취라는 경제적 가 강했다. 그 때문에 서양의 노예는 동양의 노비보다 어느 정도 신분상의 자유를 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 마을에 흉년들어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그 마을 주민들이 몽땅 이웃 마을의 노예로 자원했다. 또한 노예주도 노예를 먹여 하는 의무가 있었고, 그럴 능력이 노예를 해방해야 했다. 반면 동양의 노비주인과 생사를 같이해야 했다.

 

 

그래도 파이가 워낙 크다 보니 평민들 중에도 정복의 열매를 맛본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귀족들과 달리 토지 소유보다 정복의 부산물로 부를 늘렸다. 몸이 커지면 살만 늘어나는 게 아니다. 로마의 몸이 커짐에 따라 순환기 계통도 더욱 방대해졌다. 일부 부유한 평민들은 무역과 도로 건설, 각종 군납업과 토목공사 등을 독차지하면서 더욱 큰 재력가로 성장했다. 특히 귀족들이 신분상 손댈 수 없는 속주에서의 징세 청부업은 그들에게 가장 큰 수익원이었다상업을 천시하는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에서도 귀족 대신 평민이 무역업에 뛰어들어 부를 쌓음으로써 평민의 신분 상승과 민주정을 가져온 바 있었다. 그러나 토지가 작고 정복 활동이 없었던 그리스에 비해 로마에서는 지주 세력이 건재했으므로 그리스처럼 쉽사리 평민들에게 정치적 지배권이 넘어가지 못했다. 고대사회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땅이 최고의 재산이었다. 한창 때의 아테네가 제국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도 지주층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징세 청부업의 발달은 금융업을 탄생시켰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의 원시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장한 평민들을 가리켜 에퀴테스(equites)라고 불렀는데, 훗날 중세에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기사(騎士)는 바로 이들을 기원으로 한다(이들은 자비로 무장을 담당해 기병으로 정복 전쟁에 참여했으므로 기사라는 직함을 얻었다).

 

그러나 에퀴테스는 어디까지나 출세한 일부 평민들일 뿐이었고(게다가 그들은 귀족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대다수 평민들은 정복으로 나라의 영토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더욱 가난해졌다. 버는 자가 없고 쓰는 자만 남는다면 나라가 존속할 수 없다. 이런 위기감은 점차 귀족들의 일부에게도 전해졌다. 그 각성한 귀족들 중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 기원전 163~기원전 133)가 있었다.

 

자유농민이 몰락한다는 사실은 단순히 농업 생산량이 줄어든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라티푼디움은 농업의 독점화를 뜻할 뿐이므로 총생산량에는 큰 변동이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군사력이었다. 아무리 유능한 장군과 기사 들이 있다 해도 평민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더구나 로마군의 기본 전술은 군단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므로 병사의 수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포에니 전쟁에 직접 참전해 싸운 경험도 있었던 티베리우스는 평민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로마의 미래는 없다고 단정 지었다.

 

기원전 133,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호민관으로 선출된 티베리우스는 개혁의 선례를 찾아보았다. 선례는 있었다. 멀리는 그리스의 경험이 있었고, 가까이는 250년 전 로마의 경험이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페리클레스의 민주적 개혁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리키니우스 법을 부활시켜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는 방법을 구상했다그리스의 페리클레스가 연설에 능했듯이(132~133쪽 참조), 티베리우스도 그에 못지않은 웅변가였다. 페리클레스가 연설에서 평민들의 정치적 평등을 강조했다면, 티베리우스는 다음의 연설에서 보듯이 경제적 평등을 부르짖었다. “들판의 짐승들도 저마다 자신의 굴을 가지고 있는데, 이탈리아를 위해서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은 공기와 햇빛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 그들(귀족과 장군 들)은 여러분(평민들)을 세계의 주인이라고 부르나 여러분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뼘의 땅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제 로마는 과거의 로마가 아닌 만큼 토지 상한선을 500유게라로 정한 리키니우스 법을 그대로 시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토지 상한선을 1000유게라로 늘리고, 농지 분배 위원회를 구성해 무산 시민들에게 추첨을 통해 30유게라씩 토지를 분배하도록 했다(세 명으로 된 농지 분배 위원에는 티베리우스 자신과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끼어 있었다).

 

물론 원로원은 잔뜩 입이 부었으나 일단은 참았다. 어차피 칼자루를 쥐고 있는 그들은 호민관의 임기가 1년이라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달랬다. 더욱이 호민관은 한 번 임기를 지내고 나서는 재입후보하지 않는 게 관례였다. 이 관례에 따랐더라면 티베리우스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시동을 건 개혁은 한두 해로 끝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라티푼디움의 노예들 신분제는 세계 역사 어디서나 현대 이전까지 늘 존재했으나 서양의 신분과 동양의 신분은 의미가 약간 다르다. 서양의 신분은 사회적 역할과 일치했고, 동양의 신분은 사회적 역할과 무관하게 정치적 지배의 의미가 강했다. 이 로마 부조에 묘사된 라티푼디움의 노예들은 경제적 생산만을 담당했지만, 동양의 노예(노비)들은 주인의 명에 따라 경제만이 아니라 군사 분야에도 투입될 수 있었다.

 

 

이듬해 티베리우스는 과감하게 다시 호민관에 입후보했다. 그러자 원로원 귀족들도 더 이상 놔두고 볼 수 없었다. 평민들을 위한 개혁도 거슬렸지만 이제는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에 따르면 참주는 용납될 수 없었다. 그리스의 페이시스트라토스와 에트루리아의 타르퀴니우스가 어떻게 쫓겨났는지를 보라! 티베리우스는 참주가 되려 하고 있다! 마침내 귀족들은 쥐고만 있던 칼자루를 흔들기로 했다. 칼날을 쥐고 모험하던 티베리우스는 결국 원로원이 사주한 폭도들의 손에 암살되고 말았다.

 

하지만 티베리우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남긴 선례로 인해 호민관도 재선출될 수 있다는 인식이 싹텄다. 그렇다면 장기적인 개혁도 시도할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어 개혁의 총대를 멘 사람은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 기원전 153~121)였다. 형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한 그는 개혁의 지지 세력이 튼튼하지 않으면 개혁을 성공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123년에 호민관이 된 그는 에퀴테스를 귀족들과 분리시키기로 했다.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개혁 보조 세력을 강화하는 조치니 일석이조였다.

 

회유에 목적이 있었던 만큼 그 방법은 채찍이 아니라 당근이었다. 가이우스는 에퀴테스의 주 수입원이던 속주에서의 징세 청부권을 더욱 확대해주었다. 게다가 그들에게 속주를 다스리는 법정의 배심원 자격까지 부여했다. 이제 에퀴테스는 적어도 속주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속주에서 무제한적인 착취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에퀴테스는 오늘날의 재벌이 부럽지 않을 만큼 막대한 부를 쌓았다. 결국 가이우스의 개혁은 식민지 착취를 바탕으로 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나라의 테두리를 벗어나 만민의 이익을 위하는 보편적인 개혁이 있을 수 있을까? 가이우스가 개혁하려는 것은 로마이지 속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에퀴테스가 개혁의 보조 세력이라면 무산 시민들은 개혁의 주체였다. 당근으로 에퀴테스를 중립화시키는 데 성공한 가이우스는 이제 무산 시민들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무산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생계를 해결하는 것, 그다음은 토지를 얻는 것이었다. 첫째 과제를 위해 가이우스는 국가가 곡물 유통에 개입해 곡물을 아주 싼 가격으로 무산 시민들에게 공급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시장가격의 반값이었으나 나중에는 아예 무상으로 식량이 제공되었다. 둘째 과제를 위해서는 해외 식민지 개척이라는 전통적인 정책을 크게 확대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북아프리카(특히 카르타고) 지역에 많은 식민시가 건설되거나 재건되었다(이후 이탈리아인의 대규모 해외 이주는 19세기 말 미국으로 떠나는 이탈리아 빈민들에게서나 다시 보게 된다).

 

 

계속되는 정복 로마는 마치 정복을 중단하면 쓰러지는 자전거와 같았다.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는데도 로마는 정복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카르타고와 겨룬 것은 해상권을 확보한 것일 뿐 로마에 절실한 토지의 갈증을 풀어준 것은 아니었다. 이 부조는 로마군이 북부의 이민족(게르만)을 정복한 뒤 항복을 받는 장면이다. 오른쪽에 허리를 굽히고 있는 이민족의 우두머리는 머리털과 수염을 길게 길러 로마인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시절보다 더욱 분노했다. 그들이 보기에 형만 한 아우가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그러나 칼자루는 여전히 그들에게 있었다. 적당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그들은 가이우스를 그의 형처럼 보내버릴 자신이 있었다. 대부분의 개혁이 그렇듯이, 그 계기는 개혁 세력 내부에서 나왔다.

 

개혁의 바람을 타고 이탈리아의 동맹시들이 로마와 동등한 정도의 시민권을 요구하고 나서자 가이우스는 옳다구나 하고 여겼다. 이제 개혁의 물결이 전 이탈리아로 퍼지는구나 싶었겠지만, 그것은 판단 착오였다. 개혁이란 원래 한 나라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가이우스의 지지 세력은 자신들이 가진 로마 시민권을 동맹시 시민들에게도 부여한다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혁 세력은 찬반양론으로 분열되었고, 그 와중에 가이우스는 기원전 121년의 호민관 재선거에서 낙선했다. 간신히 피워 올린 개혁의 촛불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은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풀었다.

 

격론은 폭동으로 이어졌다. 그제야 원로원은 계엄령을 내리고 가이우스를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나섰다. 궁지에 몰린 가이우스는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살해되었다는 설도 있다). 평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공화정의 이념을 부활시키려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시대를 앞서간 개혁은 실패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개혁의 실패는 제정의 씨앗을 낳았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는 이미 공화정의 보자기로 감쌀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섰으며, 강력한 중심을 가진 중앙집권적 제정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그 취지는 진보적이었으나 역사적으로는 오히려 시대착오적이었던 셈이다. 역사의 평가는 이렇게 양면적이다.

 

 

원로원 의원들 이름은 공화정이지만 사실 로마 공화정은 귀족정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평민들은 귀족이 장악한 원로원과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여기에 도전한 그라쿠스 형제는 결국 이들의 책략으로 개혁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그림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모습으로 이탈리아 국회에 걸려 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팽창하는 영토, 누적되는 모순

고대의 군사독재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

대권 후보의 등장

권력과 죽음을 함께 얻은 카이사르

정답은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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