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군사독재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예견했던 대로, 개혁의 실패는 곧장 군사력의 쇠퇴로 이어졌다. 로마는 지중해를 정복했으나 아직 확고한 지위를 획득하지는 못했다. 특히 북부의 강성한 갈리아인과 게르만족【게르만족은 특정한 민족의 명칭이 아니라 남유럽의 로마인들이 중부 유럽에 사는 여러 민족을 총칭하던 명칭이다(즉 게르만족이라는 민족은 없다). 동유럽의 고트족, 독일 북부의 반달족, 수에비족, 서유럽의 프랑크족 등이 다 게르만족에 속한다. 물론 그들이 게르만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게 아니라 로마인들이 그렇게 분류했을 뿐이다. 다만 갈리아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켈트족은 보통 게르만족에 포함시키지 않는다】은 결코 로마의 지배를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로마 역시 지중해 세계에 안주하는 데 머물 뿐 북쪽의 중부 유럽마저 정복하려 하지는 않았다. 당시 로마의 원로원은 평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민중파와 귀족 세력이 지원하는 벌족파로 나뉘어 당쟁을 일삼고 있던 터라 정복은커녕 내란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마치 군사력이 약화된 것을 추궁이라도 하듯이,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튜턴족이 자주 이탈리아를 침략했고, 지중해 너머 북아프리카에서는 누미디아가 반란을 일으켰다. 난세의 영웅은 군대에서 나오는 법이다. 위기를 틈타 무능한 원로원을 제치고 로마의 지배자로 우뚝 솟은 인물은 민중파의 장군인 마리우스(Gaius Marius, 기원전 157년경~기원전 86)였다.
누미디아 반란의 진압으로 국민적 명성을 얻은 마리우스는 군대를 대대적으로 개편해 정복 국가 로마의 명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자유농민이 몰락한 탓에 어차피 로마의 군대는 대수술이 필요했다. 마리우스는 무산 시민 출신의 지원병들로 직업 군대를 편성했다. 새로운 군대의 병사들은 무장과 더불어 봉급도 받았으므로, 마리우스의 군대 개혁은 로마의 군사력을 회복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실업난을 극복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병사들은 16년이나 복무해야 했지만, 퇴역하면 퇴직금으로 토지도 받을 수 있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혹독한 훈련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병사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장군에 대한 충성으로 바꾸었다. 심지어 병사들은 자신을 ‘마리우스의 노새’라고 부를 정도였다. 기원전 102년에 킴브리족과 튜턴족의 대규모 침략을 막아낸 것은 바로 그 병사들이었다.
노새들의 공로에 힘입어 노새 주인은 네 차례나 연속해 집정관에 선출되는 신기록을 세웠다. 비록 킴브리족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비상사태가 지속된 덕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리우스의 장기 집권은 군사독재의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마리우스가 황제가 될 만한 능력과 의지를 갖추었다면 로마의 제정은 훨씬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저 군인으로서 뛰어날 뿐 정치적 능력이 부족하고 정치적 의지도 미약하고 정치적 감각도 모자랐다. 기원전 91년에 로마의 동맹시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노새들이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탓에, 마리우스는 벌족파의 지원을 받은 부하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기원전 138년경~기원전 78)에게 밀려났다(이때 동맹시들은 결국 로마 시민권을 얻어냈으니,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꿈은 그와 대립한 벌족파에 의해 실현된 셈이다).
▲ 독재자들 의회가 약해지면 군부를 기반으로 한 독재자가 등장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철칙이다. 평민들의 도전으로 원로원이 약해지자 로마에도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왼쪽은 1대 독재자인 마리우스, 오른쪽은 그 뒤를 이은 술라다. 이들은 결국 제정으로 향하게 되는 로마 정치의 과도기를 지배했다.
마침 술라의 능력을 시험할 기회가 왔다. 밖으로는 이민족들의 침략, 안으로는 동맹시들의 반란에 시달리던 로마에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흑해 연안에 자리 잡은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가 로마 정복을 공공연히 선언하고 나섰다【미트리다테스는 페르시아 왕가의 후손이라고 자처했는데, 실은 파르티아의 실력 가문 출신이었다. 파르티아는 중국 한 무제가 파견한 서역 원정대와 접촉해 중국 역사에 안식국(安息國)이라는 좋은 이름을 얻었다(『종횡무진 동양사』, 111쪽 참조). 그러나 중국에서의 이미지는 좋았으나 로마에 파르티아는 지독한 골칫거리였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무너진 뒤 힘의 공백을 틈타 시리아 동부까지 손에 넣은 파르티아는 이후 로마 제국의 동쪽 변방을 심하게 괴롭혔으며, 로마의 수없는 원정에도 굴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된다】. 한니발 이래 최대의 강적인 미트리다테스는 소아시아를 근거지로 순식간에 그리스를 포함한 동부 지중해 일대를 손에 넣었다. 비록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통일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문명의 중심지는 동부 지중해인 데다 발칸과 소아시아는 로마의 알짜배기 속주였다. 속주에서 착취하는 세금이 없으면 로마의 재정은 파탄이 나고 말 터였다. 원로원은 새로 집정관에 오른 술라에게 미트리다테스를 정복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상관으로 모셨던 마리우스를 축출하고 집정관에 오른 술라로서는 나라의 운명을 논하기 전에 장기 집권의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회였다.
기원전 87년에 3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탈리아를 떠난 술라는 탁월한 군단 전술을 선보이며 그리스를 탈환하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소아시아까지 정복한다면 로마의 지배자가 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미트리다테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기원전 84년에 술라는 미트리다테스와 평화조약을 맺고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냈고 미트리다테스가 빼앗은 로마의 영토도 돌려받았으니, 일단 전과는 대성공이었다.
국민적 영웅으로 로마에 개선한 술라의 눈에는 원로원도 우습게 보였다. 그는 우선 반대파를 가차 없이 숙청하고, 부하들에게 충분한 논공행상을 마친 뒤 스스로 종신 독재관에 취임했다(독재관은 예전부터 있는 직위였으나 원래 임기가 1년이고 2차 포에니 전쟁 이래로 사실상 사라진 상태였다). 이로써 로마 공화정의 전통은 완전히 깨졌다. 1만 명의 친위대를 거느리고 막대한 부를 소유한 데다 원로원 의원들마저 마음대로 임명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술라의 공포정치에 맞설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 고대적 군사독재 체제는 얼마 뒤에 성립하게 될 제정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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