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죽음을 함께 얻은 카이사르
기원전 52년에 갈리아의 영웅 베르생제토릭스의 반란을 어렵사리 진압한 것을 끝으로 카이사르는 군사적 임무를 완수했다. 로마의 영토는 라인 강과 영국 해협까지 확장되었다. 라인 강 너머의 이민족과 브리타니아인에 대해서는, 비록 정복하지는 못했어도 최소한 로마의 영향력 아래 제압했으므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대성공이었다.
예상한 대로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가 개선한다면 과거에 폰투스를 정복한 술라나 에스파냐 반란을 진압한 폼페이우스의 개선보다 훨씬 무게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공이 높은 만큼 원로원의 경계와 반발도 컸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개선해야 할까?
로마의 법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군대를 거느린 채 개선하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예전에 에스파냐에서 개선한 폼페이우스도 먼저 군대부터 해산시킨 것이었다. 기원전 49년 갈리아와 로마의 경계선인 루비콘 강까지 온 카이사르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강을 건널 것이냐, 아니면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에 입성할 것이냐?
물론 카이사르는 알지 못했지만, 1400년 뒤 한반도 북부 압록강에서는 이성계가 최영의 명령을 받고 랴오둥 정벌에 나섰다가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 당시 이성계는 철군을 결정했고, 그 군대로 고려의 수도 개경을 함락시켜 조선이라는 새 나라를 열었다. 카이사르는 이성계의 쿠데타 선배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실 원로원은 이미 그해 초에 카이사르를 소환하고 그의 군대를 그의 정적인 다른 장군에게 넘겨준다는 결의를 했으니,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카이사르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군대를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너는 그의 입에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부르짖음이 나왔다(루비콘 강은 강이라기보다 작은 시내였으나 카이사르의 중대 결정으로 역사에 유명해졌다).
주사위를 던진 이상 카이사르는 원로원, 나아가 로마 공화정의 명맥을 끊어야 했다. 로마는 제국으로 가야 했다. 8년 동안이나 갈리아의 오지에서 숱한 전투 경험을 쌓은 카이사르와 그의 군대는 거칠 것 없이 로마로 쳐들어갔다. 쿠데타라기보다는 정권의 ‘접수’였다. 원로원 의원들과 폼페이우스는 남쪽의 브룬디시움으로 가서 아드리아 해를 건너 그리스로 도망쳤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에스파냐와 북아프리카에 굳게 의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세력들만 다시 규합한다면 카이사르를 물리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카이사르의 행마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카이사르의 군대는 불과 6주일 만에 에스파냐로 진군해 폼페이우스의 손발을 모조리 끊었다. 이제 남은 것은 폼페이우스의 목숨을 거두는 것뿐이었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는 바다를 건너 그리스로 진군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야반도주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지배자들은 이제 어느 편에 붙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결국 그들의 손에 붙잡혀 살해되었다. 급한 불을 끈 카이사르는 여유를 가지고 이후 2년여 동안 나머지 반대파를 숙청했다.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카이사르는 이제 종신이든 단독이든 집정관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원전 46년에 그는 국가 비상사태에만 임시로 임명하던 독재관이라는 감투를 임기 10년으로 늘려 자기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아예 종신 독재관에 올랐다. 사실상의 왕이 된 것이다.
▲ 로마의 어린이들 어린이가 어른을 닮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 로마의 어린이들은 로마의 어른들처럼 병정놀이를 즐겼다. 이 모자이크 벽화에 등장한 로마의 어린이는 특이하게도 새들을 말로 삼아 전차를 끌게 하고 있다. 이 어린이가 자라서 뛰어난 군인이 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참주를 그렇게 싫어하던 로마 시민들에게 한 가지 다행스런 사실은 카이사르가 왕이 될 자질과 역량이 충분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무관 출신인 술라처럼 무식한 공포정치를 하는 대신 공화정에 못지않은, 아니 공화정 시절보다 더 훌륭한 정치를 펼쳤다. 그는 먼저 자신의 병사들을 비롯해 군대에 충분한 보상을 내려 권력의 물리적 기반을 안정시킨 뒤, 로마 시민권을 대폭 확대해 전 로마 영토의 통합을 도모했다(그가 피바람을 뿌렸던 갈리아에도 이때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그의 업적 가운데 당시 로마 시민들에게보다 오늘날 우리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달력이다. 카이사르는 지역마다 달랐던 달력을 통합해 새 달력을 만들었다. 이 달력은 그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력이라고 부른다【고대국가에서 달력은 대단히 중요했다. 무릇 국가에는 행사가 따르는 법인데, 달력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달력이 없다면 국가 행사 중 가장 중요한 제사는 물론 왕의 생일이나 각료들의 회의, 군대 소집일도 정할 수 없을 것이다. 동양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경우 새로 왕조가 들어서면 즉시 달력을 만들고 연호(年號)를 정해서 주변의 조공국들에 배포했다. 달력은 천문학의 지식이 있어야 하므로 만들기도 어려웠지만, 동양의 경우에는 달력을 만들 수 있는 권리를 아무나 가지지 못했다. 하늘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은 천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로마의 전통적인 달력에서는 1년을 12개월로 하고 4년에 한 번씩 13개월로 했는데, 율리우스력에서는 오늘날처럼 1년을 12개월, 365일로 하고 윤년마다 2월을 29일로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하지만 그때까지 누적된 날들의 오차를 상쇄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율리우스력을 만든 기원전 46년에 90일을 추가해야 했다. 그래서 그해의 날수는 모두 445일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더 이상 오차가 없을 줄 믿고 이해를 ‘혼돈의 마지막 해’라고 불렀는데, 4년마다 하루를 추가해도 오차는 조금씩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달력은 16세기에 율리우스력을 개정한 그레고리력인데, 이것도 먼 훗날에는 오차가 누적되어 개정되어야 한다】.
오랜만에 고대하던 정치의 안정을 되찾은 로마는 급속도로 번영했다. 당시 로마 시의 인구는 무려 10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후대에도 인구 100만 명 급의 도시는 19세기 세계 최대의 도시인 영국 런던에서나 볼 수 있게 된다.
원로원은 형식적인 기관으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명맥은 유지되었다. 원로원 의원 수는 900명으로 늘어났으나 거의 대다수를 카이사르가 임명했으므로 정치적으로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그랬어도 상징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원로원이 존재한다는 것은 과거 공화정의 전통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제정을 거의 이루고 권력을 독점한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없애야 했다. 그는 원로원의 기능만 마비시키면 될 줄 알고 마음을 놓았지만, 원로원이 가진 상징성은 결국 그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
기원전 44년 3월, 카이사르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파르티아뿐이었다. 크라수스가 죽은 뒤 로마에서 크라수스의 복수를 하자는 운동이 크게 일어나기도 했지만, 재정상의 이유에서도 카이사르는 시리아를 도저히 놓칠 수 없었다. 그러나 종신 독재관에 오른 지 두 달밖에 안 된 시점에서 국가 중대사를 처리하기는 무리였다. 그 두 달 동안 참주정치에 대한 두려움과 공화정의 옛 꿈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카이사르에 대한 분노와 우려를 극대화했다.
브루투스(Maretus Junius Brutis, 기원전 85~기원전 42)를 비롯한 원로원 귀족들은 3월 15일에 연설을 하기 위해 원로원에 온 카이사르를 암살했다(회랑 앞에서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무차별적인 단도 공격을
받은 카이사르는 모두 23군데의 상처를 입고 죽었다). 카이사르는 며칠 뒤 파르티아 전선으로 출정을 떠날 예정이었다. 결국 카이사르에게 권력을 안겨준 루비콘 강의 주사위는 그에게 죽음마저도 안겨 주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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