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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3부 뿌리② - 3장 제국의 탄생, 팽창하는 영토, 대권 후보의 등장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3장 제국의 탄생, 팽창하는 영토, 대권 후보의 등장

건방진방랑자 2022. 1. 4.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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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권 후보의 등장

 

 

사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친척이고 명문 귀족 출신이라는 점 이외에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다른 두 사람에 비해 나이도 가장 어렸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에게는 군대, 크라수스에게는 돈이 있다면, 카이사르에게는 신분과 자질, 그리고 탁월한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

 

‘3의 한 사람이라는 후광을 이용해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이된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무시하고 민회를 통해 정책을 처리했으며, 때로는 민회마저 무시하기도 했다. 일찍부터 그는 독재의 본능을 드러낸 셈이다(집정관은 두 명이었으나 다른 한 명은 전혀 권력이 없었다. 심지어 카이사르와 율리우스가 집정관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그 바로 전에 집정관을 지냈고 후대에 철학자로도 잘 알려진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기원전 43)는 당시 카이사르의 전횡을 사실상의 왕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카이사르에게는 아직 이 되기에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 활발한 정치 활동으로 로마 시민들의 폭넓은 인기를 얻기는 했으나 아직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는 게 문제였다. 당시의 업적이라면 무엇보다 군사적 부문의 업적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의 군 복무 경험 이외에는 지휘관으로서 활동한 경력조차 없었다.

 

카이사르가 집정관에서 물러난 기원전 58년에 로마 원로원은 가급적 그를 로마에서 멀리 떠나보내기 위해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카이사르로서도 바라 마지않는 명령이었다. 전공을 올릴 좋은 기회였으니까. 오늘날에도 야전군 지휘관의 경력이 없으면 군직에서 성공할 수 없는데,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원로원은 그가 변방에서 전사하기를 바랐겠지만, 카이사르는 오히려 야망에 부풀었다.

 

 

고뇌의 표정 카이사르가 암살되기 6년 전, 그러니까 그가 쉰 살 때 만들어진 흉상이다. 당시 그는 대머리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기서는 영화배우 같은 인상적인 미남으로 묘사되어 있다. 자신이 장차 암살될 운명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테니, 이 표정은 혹시 어떻게 제위에 오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아니었을까?

 

 

카이사르의 타고난 재능은 경험이 거의 전무한 군사 부문에서도 꽃을 피웠다. 그는 순식간에 휘하 장교들을 장악하고 탁월한 전술 운용과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러나 갈리아인들은 예로부터 로마의 껄끄러운 상대인 데다 드넓은 지역에 수많은 부족이 산재해 있어 결코 정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던 한창 때의 로마군도 갈리아를 정복할 생각은 언감생심이고 변방을 방어하는 데만 급급할 정도였다. 사실 갈리아의 부족들이 로마처럼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더라면 로마가 지중해의 주인이 되는 것조차 애초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갈리아에 온 카이사르는 초장부터 공세를 펼쳤다. 신속하게 전공을 세워 로마의 권력을 손 안에 넣겠다는 그의 야심으로 미루어보면 당연했다. 2년 만에 로마군은 갈리아의 부족들을 라인 강 너머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곧이어 벨기에의 벨가이족과 프랑스 서해안의 베네티족을 정복했다. 갈리아인이 북쪽으로 도망치자 로마군은 추격에 나섰다. 기원전 55년에 카이사르는 영국 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까지 공략했다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침공은 비슷한 시기 우리 역사와 닮은 데가 있다. 동양에서 로마의 역할을 한 나라는 중국의 한 제국이다. 당시 한은 한반도 북부와 랴오둥을 정복하고 4을 세웠다. 브리타니아인들이 로마군에 거세게 저항했듯이, 한반도인들 역시 한군의 지배에 저항했고, 마침내 한4군을 멸망시켰다. 오늘날 영국사의 첫 부분이 로마의 브리타니아 침공으로 시작하듯이, 우리 역사의 첫 부분(고구려의 건국)도 그 무렵에 시작한다. 그러나 한 가지 크게 다른 점은, 오늘날 영국인들은 로마와의 접촉으로 영국 역사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지만, 우리는 대한민국도 중화인민공화국도 없었던 고대에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점이다. 드디어 로마의 영향력은 세계의 서쪽 끝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비록 브리타니아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카이사르는 최소한 대륙의 갈리아인들만큼은 확실히 제압하는 전과를 올렸다. 초보 지휘관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대성공이었다. 카이사르의 업적이 로마에 알려지자 그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원로원은 당연히 기분이 꺼림칙했지만, 더 좌불안석인 것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였다. 이대로 가면 3두라는 말이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리한 카이사르는 아직 그들의 용도가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내치기는커녕 갈리아로 불러 다시금 3두의 위상을 굳게 다졌다. 그들은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맡고, 폼페이우스가 에스파냐를, 크라수스가 시리아를 맡는 선에서 공동의 이해관계를 확인하고 헤어졌다(당시 크라수스는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 동부에 주력하고 있었다). 물론 로마의 원로원은 셋이 함께 공동으로 견제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노회한 원로원은 그냥 앉아서 당하려 하지 않았다. 사슬을 끊으려면 가장 약한 고리를 찾아라! 그 약한 고리는 바로 폼페이우스였다. 카이사르보다 고분고분한 폼페이우스를 권좌에 앉히면 원로원이 실권을 계속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원로원이 행동에 나서려는 순간 동쪽에서 희소식이 들려왔다.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크라수스가 군기마저 빼앗기는 치욕스런 참패를 당하면서 전사하고 만 것이다. 이제 3두 체제는 깨졌다. 다시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푸는 데 성공한 원로원은 예정대로 폼페이우스에 대한 공작을 개시했다. 기원전 52년 원로원은 그를 단독 집정관에 앉혀 카이사르를 배제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앞서 술라의 종신 집정관처럼 단독 집정관도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미 로마의 전통적인 공화정 정치 체제가 무너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갈리아 정복 동쪽에는 파르티아, 서쪽에는 갈리아. 이들은 로마의 숙적이었다. 로마의 군사력 최강이었던 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는 드디어 갈리아 정복에 성공하고 갈리아 전기(戰記)라는 책을 썼다. 사진은 로마 병사들이 갈리아인을 도륙하는 장면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팽창하는 영토, 누적되는 모순

고대의 군사독재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

대권 후보의 등장

권력과 죽음을 함께 얻은 카이사르

정답은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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