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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4부 줄기 -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성전에서 추악한 전쟁으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성전에서 추악한 전쟁으로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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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에서 추악한 전쟁으로

 

 

우르바누스는 정세 분석의 능력과 선동 솜씨도 탁월했지만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다. 그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십자군을 계기로 서유럽은 실제 역사보다 일찍 전 세계의 패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그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지 3년 만인 1099년에 죽었다). 그는 당시 서유럽에 넘쳐나는 유능한 기사들로 십자군을 편성해 속전속결로 성지 탈환을 완료할 생각이었다.

 

그 무렵 서유럽은 수백 년 동안 큰 전쟁이나 전염병 한 번 없는 안정기를 누리고 있었다. 따라서 속도는 느리지만 농업 생산력이 상당히 발달했고, 인구도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다. 유럽 세계는 거의 전역이 속속들이 개척되고 개간되었으나 토지의 증가에는 한계가 있었다(우르바누스는 십자군을 구상할 때 분명히 이런 토지 부족 현상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미 유럽은 힘센 청년으로 자라났으며, 과거 이슬람의 팽창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그때 그 시절의 꼬마가 아니었다. 승산은 충분했고, 그런 만큼 속전속결은 아주 적절한 구상이었다. 실제로 우르바누스의 노력으로 조직된 1차 십자군은 총 8(소규모까지 합하면 그 이상이지만 보통은 여덟 차례로 친다)의 원정 가운데 가장 순수했고 가장 큰 성과를 내게 된다엄밀히 말하면 이 1차 십자군은 십자군이 아니다. 십자군이라는 이름은 200년 뒤인 13세기 후반 십자군 전쟁 말기에 붙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조직된 십자군은 예루살렘 여행단또는 성지 참배단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1차 십자군은 적어도 명칭에서는 일종의 성지 관광단이었던 셈이다.

 

1096년 가을, 유럽 각국 왕의 형제와 귀족 들은 각기 군대를 끌고 역사적인 원정길에 올랐다. 프랑스 왕의 동생 위그 드베르망두아, 툴루즈 백작 레몽, 로렌 대공 고드프루아,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노르만 공 보에몽 등 당대 유럽의 쟁쟁한 영웅들이 모인 모습은 2000여 년 전 트로이를 향해 떠나는 그리스 원정대를 연상케 하는 위용이었다(공교롭게도 목표도 그때처럼 동방이다). 트로이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아가멤논이었다면 이제 그 역할은 보에몽이 맡았다. 총 병력은 기사 3000명과 보병 약 1만 명이었고, 그 밖에 많은 순례자가 지원군의 자격으로 뒤를 따랐다.

 

수개월을 행군한 끝에 베이스캠프인 콘스탄티노플에 닿은 이들은 여기서 한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동진을 시작했다. 과연 서유럽 최고의 칼잡이들이 모인 군대에 맞설 만한 적수는 없었다. 십자군은 터키 서부의 니케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2년 만에 성지 예루살렘의 관문이라 할 안티오크와 에데사를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다시 1년 뒤인 1099년 여름에는 드디어 고대하던 예루살렘에 입성했다(일반 순례자라면 몰라도 기사들은 성지에 처음 와본 자들이 많았으리라).

 

 

성전 대 성전 1차 십자군은 그런대로 충분한 성과를 올렸다. 그림은 이슬람 제국의 성을 함락시키는 십자군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성전은 이슬람교의 성전을 눌렀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원정을 계속한 탓에 십자군은 이내 변질되고 만다.

 

 

우르바누스의 연설과 달리 성지를 능욕한 것은 오히려 그들이었다. 5주간의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에 들어간 그들은 성지 정화라는 명목으로 현지 주민들을 대량 살육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1차 십자군은 성지를 탈환하고, 터키에서 팔레스타인까지 해안지대에 아르메니아, 안티오크, 트리폴리, 예루살렘이라는 4개의 십자군 왕국을 세워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문제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성공이라는 점이었다(우르바누스는 자신이 조직한 십자군이 대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죽었으니 선임 교황인 그레고리우스에 비해서는 훨씬 행복한 죽음이었다).

 

어쨌든 십자군 전쟁이 성공하자 서유럽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꿈에도 바라던 그리스도교의 성지를 되찾았을 뿐 아니라, 수백 년 동안 그리스도교 문명권을 사실상 포위하고 있던 무시무시한 이슬람 세력을 처음으로 보기 좋게 쳐부수었던 것이다. 특히 성지 부근에 그리스도교의 왕국들이 생겨났다는 사실은 서유럽의 농민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곳으로 가서 땅을 얻어 살자! 물론 군주와 귀족 등 봉건 지배 세력은 대환영이었다. 어차피 서유럽은 인구도 넘치고 토지도 부족하다. 게다가 성지에 새로 생긴 왕국들은 성 하나만 달랑 쌓아놓고 군인들이 지키고 있을 뿐 나라의 꼴을 갖추는 데 꼭 필요한 백성들이 없지 않은가? 원주민은 있지만 이교도가 백성의 전부라면 문제다. 그래서 그들은 대대적으로 농민들의 이주를 장려했다. 1101년 성지 탈환 2년 만에 무려 20만 명의 이주자들이 모집된 것은 그런 열망의 소산이었다.

 

 

십자군 왕국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해안 지대를 점령한 십자군은 이곳에 십자군 왕국들을 세웠다. 사진은 당시에 세워진 십자군의 성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십자군 왕국은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라 간신히 확보한 성지 순례 길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백성들은 없고 군대만 사는 희한한 나라였으니 오래갈 리 없었다.

 

 

그러나 기사대의 호위를 받으며 기세 좋게 출발했던 이주 행렬은 목적지에 닿기 전 소아시아에서 셀주크튀르크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전멸하는 비극을 당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유럽의 군주들은 아연실색했다. 아직 이슬람 세력은 무너진 게 아니었다. 1차 원정에서 이슬람 세력이 쉽게 무너진 이유는 사실 십자군이 강해서라기보다는 자체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데다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1차전에서 무기력하게 영토를 그리스도교권에 내주었던 이슬람은 그 두 가지 결함을 해소하고 2차 전에서 진검 승부를 보자고 나섰다.

 

1127년에 시리아의 태수 장기는 흩어진 세력을 규합해 시리아 북부를 탈환하고, 1144년에는 에데사를 손에 넣었다. 에데사가 무너지면 안티오크의 함락은 불을 보듯 뻔한 것, ‘성지발 급보를 전해들은 서유럽은 즉각 2차 십자군을 조직했다. 한 번 승리의 경험도 있었던 탓에 2차 십자군은 유럽의 왕들이 직접 참가했는데,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가 주축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왕들이 직접 나섰다 해도 이번의 상대는 전과 같은 분열된 오합지졸이 아니라 누레딘이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버티고 있는 통일된 이슬람군이었으므로 승부는 예측 불허였다. 2차 십자군은 성지에서 십자군 왕국들을 지키던 1차 십자군 전사들과 의견 충돌을 빚은 끝에 무모하게 다마스쿠스를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금세 해체되었다.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누레딘은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내친 김에 이집트까지 장악했다. 이제 예루살렘은 거꾸로 시리아-이집트에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그리고 누레딘의 후계자로 위대한 이슬람 장군 살라딘(재위 1174~1193)이 등장했다.

 

살라딘은 종전과 달리 공세적인 태도로 맞섰다. 마지막 남은 목안에 가시 예루살렘을 탈환하려 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600년 전 그의 조상들이 부르짖었고 이제는 십자군이 모토로 내건 성전, 즉 지하드를 선언했다. 1187년 유럽 그리스도교의 성전과 아시아 이슬람교의 성전은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의 딱 중간 지점인 하틴에서 맞섰다.

 

십자군의 주력은 유럽의 전통적인 중장기병과 석궁으로 무장한 보병이었고, 살라딘의 군대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궁기병이 주력이었다. 당연히 힘에서는 십자군이 앞섰지만 기동력에서는 이슬람 군대가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을 방어하는 데만 주력했다면 승패가 쉽게 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예루살렘의 왕 기 드 뤼지냥은 자신감에 넘쳐 갈릴리 언덕의 평원에서 살라딘의 2만 대군과 정면 승부를 하자고 나섰다. 뒤떨어지는 기동력에 수적으로 적은 병력, 승부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은 대승을 거두고 예루살렘을 손에 넣었다. 이로써 십자군 전쟁은 11패로 호각을 이루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사자심왕 대 살라딘 사자심왕이라 불린 영국 왕 리처드와 이집트 및 시리아의 술탄인 살라딘이 대결을 벌이고 있다. 이 대결은 십자군 전쟁을 소재로 그린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승부를 보려면 3차 원정이 필요했다. 1189년의 3차 십자군은 상대방이 강한 만큼 이번에는 서유럽 최정예군으로 편성했다.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재위 1189~1199),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 독일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등 당대 유럽의 간판스타들이 직접 참가한 것이다(나중에 보겠지만 이 세 명의 왕은 중세 영국, 프랑스, 독일을 성립시키는 데 각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먼저 출발한 독일군은 소아시아에서 이슬람군에 패배하고 황제마저 전사하는 비극을 겪었다(정확히 말하면 의사였다). 조짐이 좋지 않았지만 리처드와 필리프는 진군을 계속해 1191년에 예루살렘 인근의 아크레와 야파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출발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그들은 이내 불화를 빚었고, 필리프는 그만 돌아가버렸다(왜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에 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자). 단독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할 자신이 없었던 리처드는 살라딘과 협상해 그리스도교도의 자유로운 성지 순례를 허용한다는 것을 보장받고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애초에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부터 살라딘은 1차 십자군과 달리 이교도(그리스도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으니, 그것은 협상이라기보다 리처드의 체면을 지켜준 것일 뿐이었다.

 

오히려 리처드는 귀국 길에 독일의 새 황제가 된 하인리히 6세에게 포로로 잡혀 감금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또한 그 틈을 타서 프랑스 왕 필리프는 노르망디를 기습했으며, 영국 내에서는 리처드의 동생 존이 왕위를 찬탈했다가 귀족들의 반발을 사서 대헌장을 성립시킨다. 결국 3차 십자군은 서유럽 세계의 복잡한 내부 문제만 드러낸 셈이다.

 

간판스타들이 참전한 원정 치고는 보잘것 없는 결과였지만 3차 십자군은 사실상 마지막 십자군이었다. 120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요구로 소집된 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병력 수송과 식량 공급을 의뢰했다가 그 대가로 그들의 용병 노릇까지 하는 최악의 십자군으로 기록된다이탈리아의 신흥 강국으로 성장한 베네치아는 동부 지중해 교역권을 독점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무엇보다 큰 걸림돌이 바로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따라서 베네치아는 십자군이 약속한 경비를 지불하지 못하자 십자군에게 당시 내분에 휩싸여 있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라고 주문했다. 채무자 십자군은 채권자의 독촉에 못 이겨 엉뚱하게도 같은 그리스도 교권인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내친 김에 라틴 제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십자군의 총사령관이던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은 졸지에 군 지휘자에서 라틴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비록 엉겁결에 생겨나기는 했지만 라틴 제국은 잠시나마 동방교회를 로마교회에 통합했으며, 동유럽에 라틴 문화를 보급했다. 그러나 1261년 비잔티움 황제의 반격을 받아 라틴 제국은 60년도 채우지 못하는 단명 제국으로 끝나고 만다. 결국 이득을 본 것은 베네치아뿐이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라틴 제국의 지배 기간을 이용해 동부 지중해의 교역을 독점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경제적 토대가 된다. 분노한 인노켄티우스는 소년들의 순결한 영혼을 이용한다는 종교적 망상에 사로잡혀 소년 십자군까지 조직해 보냈으나 이들은 오히려 악덕 상인들의 손에 노예로 팔렸다. 13세기의 벽두를 이렇게 열었으니

이후의 원정들도 뻔했다. 13세기에 파견되는 5, 6, 7, 8차 십자군은 모두 유럽 국왕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동떨어진 결과를 빚었다. 결국 이집트 출신의 술탄 바이바르스가 1291년 아크레를 점령해 십자군의 근거지를 완전히 소탕함으로써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나버렸다(이후 십자군이라는 이름을 내건 동방 원정은 15세기까지 지속되지만 별 의미는 없다).

 

 

오랜만의 협력 점점 멀어져가면서 대립과 반목을 일삼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모처럼 힘을 합칠 기회가 왔다. 외부의 대적 이슬람을 맞아 동방 측에서 도움을 요청했고, 서방은 이를 선뜻 받아들여 십자군 전쟁을 기획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땅에 내려온 교회

대결과 타협

그리스도교의 지하드

성전에서 추악한 전쟁으로

해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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