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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4부 줄기 -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해체의 시작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해체의 시작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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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체의 시작

 

 

앞서 본 것처럼, 십자군 전쟁에는 성지 탈환이라는 대의명분과 더불어 서유럽의 군주와 귀족, 기사, 농민 등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신분과 처지에 따라 이해관계는 다양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영토 확장을 통해 부족한 토지를 확보하고 농민 이주로 인구 증가를 소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에서 서유럽 세계는 그런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십자군 전쟁은 일단 실패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모든 게 그렇듯이 성공이나 실패라는 일의적인 규정은 무의미하다. 역사적 사건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계기로 무엇이 달라졌는가다. 십자군은 서유럽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만약 서유럽이 적어도 비잔티움 제국 정도의 느슨한 중앙집권 체제만 갖추었더라도 십자군은 성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거의 모든 서유럽인의 꿈인 로마 제국이 다시 부활하는 것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중앙집권을 이루었던 샤를마뉴의 시대에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힘이 부족했으나, 십자군 시대에는 거꾸로 힘은 있었어도 중앙집권 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에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오랜 분권 체제로 힘이 분산된 탓에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어도 서유럽 세계는 분명히 힘에서 이슬람권에 비해 우위에 있음을 입증했다. 따라서 십자군 전쟁은 문명사적으로 서양 문명이 동양 문명, 적어도 서남아시아 문명을 앞서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 직접적인 결과는 동부 지중해가 서유럽 세계의 손 안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베네치아 상인들의 후안무치한 협잡으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빛이 바랬지만, 어쨌든 그들은 원하던 지중해 무역권을 확보했다. 로마가 멸망한 이후 동부 지중해권은 비잔티움이 관할하고 있었으나, 제국은 해상무역에 별로 의존하지 않았으므로 실상 지중해 무역은 이슬람권의 아라비아 상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고대 이집트, 페르시아, 중세 이슬람 제국 등에서 보듯이, 원래 제국이란 주로 영토 제국이므로 해상무역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제국인 중국의 경우를 보면 더 확연히 알 수 있다. 제국은 자체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하므로 굳이 무역을 필요로 하지 않을뿐더러 지리적ㆍ영토적 중심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중심에서 먼 변방이나 바다를 중시할 이유가 없다. 비잔티움 제국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으므 로 관할 구역이라 할 동부 지중해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 로마 제국은 예외였다. 지리적 여건상 해상 제국의 위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지중해 자체가 로마 영토의 일부였다).

 

 

활과 방패의 싸움 십자군과 이슬람군의 싸움은 전형적인 유럽과 아시아의 전투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페르시아 전쟁이나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서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유럽의 병사들은 두꺼운 갑옷으로 몸을 보호했고, 아시아의 병사들은 가벼운 차림으로 기동력을 살리며 활을 쏘았다. 방어가 장기인 십자군이 공격으로 전환했으니 승패는 뻔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서유럽 세계도 지중해 무역로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4차 십자군 전쟁은 가장 타락한 원정이면서도 오히려 가장 중요한 원정이기도 했다. 베네치아 상인들이 지중해 무역권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십자군 기사들은 동방의 화려한 문물에 압도되어 서유럽만을 세계로 안 자신들이 우물 안 개구리임을 자각했다(물론 그들은 그 자각을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야만적인 약탈로 표출했다). 서유럽은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사실상 로마 제국의 80퍼센트는 복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깥의 가장 큰 변화가 지중해를 장악한 데 있었다면 안의 가장 큰 변화는 교황권이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십자군 전쟁 초기는 교황권이 가장 강한 시기였다(교황의 순회 연설만으로도 서유럽의 정예군이 모였으니까). 그러나 십자군이 실패하면서 교황권은 큰 손상을 입었다. 물론 십자군 전쟁의 실패가 곧바로 교황권의 약화를 불렀다기보다는 이미 시대의 변화 자체가 교황이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만약 십자군이 성공했더라면 교황권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교황권의 약화는 곧 서유럽 세계의 그리스도교적 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잖아도 분권 체제였던 서유럽은 이제 분권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로마가 무너진 이후 그나마 동질성을 부여해온 종교적 통합의 중심마저 약해지자 각 왕국은 각개약진의 길로 나섰다. 바야흐로 중세는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십자군 전쟁은 그 신호탄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중세 세계에서 하나씩 갈라져 나오기 시작하는 서유럽 국가들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앞에서 본 원시적형태보다는 진일보한 국가들이다)십자군 운동은 서유럽 각국의 내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중 하나가 기사단이다. 기사들은 십자군의 주력을 이루었으므로 자연히 십자군 운동을 통해 지위가 크게 상승했다. 십자군에 참여한 기사들은 일종의 십자군 참전 동지회같은 조직을 만들었는데, 종교적 이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니 자연히 종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교황의 인가를 얻어 기사수도회로 발전했다. 여러 기사단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프랑스의 템플 기사단과 독일의 독일기사단이다. 템플 기사단은 예루살렘의 방어를 위해 조직되었다가 나중에 루이 9세 치하에서 프랑스의 관료로 입각했으며, 독일기사단은 독일 황제에게서 토지까지 받아 지역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궤도를 이탈한 십자군 1204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 측의 농간으로 이교도가 아닌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림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는 십자군의 모습인데, 16세기 베네치아 화가 틴토레토의 작품이다. 오랫동안 이슬람의 공격을 잘 막아냈던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 같은 그리스도교권의 공격 앞에서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땅에 내려온 교회

대결과 타협

그리스도교의 지하드

성전에서 추악한 전쟁으로

해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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