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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4부 줄기 -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그리스도교의 ‘지하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그리스도교의 ‘지하드’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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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교의 지하드

 

 

그레고리우스는 강경책으로 불행을 자초했지만, 그의 뒤를 이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전임 교황이 닦아놓은 기반을 한껏 이용해 교회의 힘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서유럽 군주들은 교회와의 관계가 좋지 않을뿐더러 자기들끼리도 반목했다.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뭐니 뭐니 해도 바깥에 대적이 있는 게 가장 좋다. 일찍이 그리스 폴리스들의 분열을 막은 것도 페르시아의 침략이었고, 프랑크가 통일 왕국으로 발전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슬람이라는 바깥의 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르바누스는 그리스도교권의 단결도 도모하고 새로 정비한 교회의 힘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109511월에 클레르몽 공의회를 열었다.

 

회의의 주제는 바깥에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서유럽의 바깥이라면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제국이다. 그러나 비잔티움은 교회가 다를 뿐 같은 그리스도교권이므로 목표는 이슬람이 된다. 더구나 당시 이슬람은 한때 막강했던 제국의 영광을 뒤로하고 중앙아시아의 셀주크튀르크족이 주도권을 차지하면서 전보다 크게 약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문제는 구실이었다. 그리스도교권에서 보면 이슬람은 당연히 제거해야 할 이교도들이지만, 8세기 초반 동쪽과 서쪽으로 서유럽을 위협한 이래 서유럽 정복의 꿈을 버린 지 오래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구실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 이를 위해 우르바누스는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을 개발해냈다. 7세기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가 이슬람에 정복된 이래 그리스도교의 발생지이자 최대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아직도 이교도의 수중에 있지 않은가?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교도의 수치다. 비록 500년이나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교도들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 우르바누스는 이렇게 명분의 골격을 만들고 나서 살을 덧붙인다. 이슬람 세력이 그리스도교도들의 성지 순례를 탄압하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이슬람은 정복 초기에만 이교도를 탄압했고 이후에는 관용 정책을 취했으므로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우르바누스의 다음과 같은 연설은 타고난 선동 솜씨를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의 신성한 땅이 이교도들의 손아귀에서 능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도 왕은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 하느님의 적에게 칼날을 돌립시다. 그리스도교 왕국의 치욕을 떨치고 일어나 이슬람교도의 세력을 영원히 멸망시킵시다. 이 전쟁은 성전이며, 여기서 생명을 잃는 자는 죄의 사함을 받고 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시나리오가 만들어졌으니 이제 무대에 올리는 일만 남았다. 우르바누스는 직접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선동했고(그는 프랑스 출신이었다), 휘하의 주교들에게는 서유럽 구석구석까지 들어가 일반 민중에게도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라고 지시했다. 결과는 그 자신도 깜짝 놀랄 만한 대성공이었다. 서유럽 전역에서 이름깨나 날리고 힘깨나 쓴다는 기사들이 몰려들었고, 일반 농민들도 적극 호응해 동참을 부르짖었다. 이렇게 해서 순식간에 최초의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순수한 신앙심의 발로였겠지만 기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앞에서 본 것처럼, 그들은 주로 봉건 귀족의 차남 이하, 그러니까 상속받을 토지와 재산이 없는 자들이었고, 임무와 봉급이 없는 건달과도 같은 처지였다. 십자군에 참여하면 이교도들을 상대로 마음껏 싸울 수도 있고 막대한 전리품을 얻을 수도 있다(우르바누스는 순회 연설에서 동방 세계는 부유하다고 부르짖기도 했다). 그뿐인가? 일이 잘 풀려 성지를 탈환한다면 토지와 영지도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우르바누스도 뛰어난 선동꾼이었지만, 당시는 그런 선동이 충분히 먹혀들 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지 탈환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당연히 비잔티움에서 먼저 십자군 전쟁을 계획했어야 하지 않을까? 제국은 서유럽에 비해 지리적으로도 성지에 더 가까운 데다 로마교회보다 역사와 정통성이 더 오래지 않은가? 그러나 당시 비잔티움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고질병인 중앙 권력의 불안정은 그 시기에 더욱 극대화된 상태였다. 황제들은 무능한 데다 암살되는 경우도 잦았고, 지방 호족들은 그 틈을 타서 세력을 확장했다. 그런 처지였으니 비잔티움 제국은 성지 수복을 도모하기는커녕 셀주크튀르크의 침략에 호되게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당시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오히려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10세기 무렵 전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는 중국 당 제국의 장안과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이 두 도시는 당시 아시아와 유럽에서 각각 유일하게 존재하는 제국의 수도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당과 비잔티움은 엇비슷한 시기에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이유도 만연한 부패와 권력 불안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그 무렵은 제국 체제가 세계적으로 몰락의 조짐을 보이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강력한 힘의 중심을 가진 제국 체제가 적절한 것이었고 국력을 키우는 데 유리했으나,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중앙집권 체제보다는 분권 체제가 더 효율적인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그렇다면 중국이라는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한 가지의 질서밖에 없는 동양보다는, 비잔티움 제국 이외에도 서유럽이라는 분권 체제가 공존하는 유럽이 역사의 패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 시기는 그 가능성이 실현되기 시작하는 때였다. 이리하여 십자군은 전 그리스도교권이 공동으로 발주한 사업으로 확대되었다.

 

 

연설 혹은 선동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가 이교도의 손아귀에서 성지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연설하는 장면이다. 이 연설이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어 십자군이 조직되지만, 신앙 이외에 다른 의도가 있었으니 교황의 연설은 사실상 선동이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땅에 내려온 교회

대결과 타협

그리스도교의 지하드

성전에서 추악한 전쟁으로

해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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