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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4부 줄기 -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대결과 타협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대결과 타협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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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결과 타협

 

 

11세기 후반 알렉산데르 2세에 뒤이어 교황으로 선출된 그레고리우스 7세는 클뤼니 수도원 출신이었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교권 독립 문제를 매듭짓기로 마음먹었다. 교권 독립은 원래 당연한 것이니 예전과 같은 수세적인 자세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직자 임명권은 세속 군주를 포함한 어떠한 속인도 가질 수 없고 오로지 교회에만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전까지도 그 문제를 놓고 싸웠으니 새로울 건 없었지만, 이제 교황은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다.

 

당장의 현안은 밀라노의 주교를 선출하는 문제였다. 그레고리우스의 방침이 성공하려면 그는 여기서부터 자신의 원칙을 적용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이제부터는 독일이라고 불러도 좋겠다)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에게 밀라노 주교 선출에 간섭하지 말라는 서한을 보냈다. 당연히 임명권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하인리히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연달아 주먹을 날렸다. 밀라노뿐 아니라 다른 주교나 수도원장에게도 일일이 서한을 보내 세속 군주에게서 임명이나 서임을 받지 말라고 하는가 하면, 심지어 로마 교황이 황제를 임명하고 파면할 수 있다고까지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100년 전 오토 1세를 황제로 임명한 사람도 로마 교황이었으니, 그레고리우스의 방침은 말하자면 원칙을 재확인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명분은 그랬어도, 그레고리우스 자신을 포함해 서유럽의 모든 군주와 성직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황의 선언은 명백한 도전이요 반역이었다.

 

강력한 도전자를 맞은 하인리히가 취한 대응은 일단 무시, 그리고 반격이었다. 그는 교황의 서한을 무시하고 밀라노 주교의 선출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다음 그는 독일 내 여러 공국의 주교들을 불러 모아 종교회의를 열었다. 회의 결과는 예상한 대로 그레고리우스에 대한 격렬한 비난과 성토였다.

 

이제는 그레고리우스가 응수할 차례다. 그는 최강의 대응을 선택했다. 그것은 이미 예고된 황제의 파면이었다. 물론 현실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는 성직자의 입장이었으므로 황제를 지위에서 끌어내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황제의 종교적 파면, 즉 파문(excommunication)이었다.

 

 

교황의 강경한 태도에 황제보다 더 놀란 사람들은 독일의 군주와 주교 들이었다. 애초부터 문제가 이렇게 커질지 예상하지 못한 그들은 차츰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하인리히는 초조해졌다. 황제의 파문이라는 전례 없는 조치를 부른 데다, 더 큰 문제는 자기 세력이 점차 이탈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레고리우스가 독일 주교들과 종교회의를 열어 황제의 파문을 위한 절차를 밟기 위해 독일 땅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차피 서로 경험이 없는 일이었으니, 사실은 그레고리우스의 가슴이 더 떨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로마 교황보다는 독일 황제가 입게 될 피해가 훨씬 더 크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은 잃을 게 없었으니까. 하인리히는 교황과 개인적으로 만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1076년 겨울, 이탈리아로 가는 하인리히가 독일로 오는 그레고리우스를 만난 곳은 알프스 북쪽의 카노사 성이었다. 그는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사흘 동안의 석고대죄 끝에 그레고리우스는 하인리히를 용서하고 돌아갔다. 이것을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한다. 물론 교황 측으로서는 카노사의 영광이라 해야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인리히의 진심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세 초기와 달리 이제 종교적 조치로 현실의 권력을 제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굴욕을 감수하고 일단 파문의 위기를 면한 하인리히는 독일로 돌아가 배신자들에게 처절하게 복수했다. 3년간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진 다음 그는 로마로 가서 교황에게 보복을 가했다. 교황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으나 다른 방법이 있었다. 그레고리우스와 별도로 교황을 옹립한 것이다. 더 이상 내놓을 카드가 없는 그레고리우스는 결국 프랑스로 도망가 죽었다.

 

이제 하늘과 땅의 대결은 일대일 무승부를 이루었다. 그러자 자연히 타협안이 나왔다. 먼저 타협을 이룬 곳은 전장이 아닌 영국과 프랑스였다. 일단 주교는 교회에서 선출한다. 교회 측이 반겼다. 그러나 주교는 군주의 다른 가신들처럼 군주에게 충성을 서약한 다음에 정식으로 취임한다. 군주 측도 반겼다. 군주는 주교의 서약을 거부할 권리를 가졌으므로 약간은 군주 측에 점수를 더 준 결과였지만 대체로 양측이 만족할 만한 조치였다. 더 나중의 일이지만, 결국 독일에서도 1122년 보름스 협약으로 그 타협안이 채택되었다.

 

겉으로는 무승부였으나 사실상의 승리자는 교황이었다. 격렬하고 오랜 투쟁 끝에 마침내 교황은 서유럽 세계의 유일한 종교적 지도자임을 재확인시켰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회의 현실적 필요성이 약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룬 성과였기에 더욱 의미가 큰 것이었다. 이제는 교회의 이름을 걸고 세속적인 사업을 벌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첫 사업이 하필 대규모 국제 전쟁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무릎 꿇은 황제 교황에게서 파문을 당한 하인리히 4(가운데)가 클뤼니 수도원장(왼쪽)과 토스카나 여백작(오른쪽)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상의하는 그림이다. 그들의 조언에 따라 황제는 얼마 뒤 교황 앞에서 또 한 번 무릎을 꿇어야 했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교황권의 절정을 보여준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땅에 내려온 교회

대결과 타협

그리스도교의 지하드

성전에서 추악한 전쟁으로

해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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