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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4부 줄기 -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땅에 내려온 교회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땅에 내려온 교회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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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땅에 내려온 교회

 

 

영주의 장원에는 교회가 하나씩 있었다. 교회는 종교 조직이면서도 현실에 존재하는 기구다. 그럼 이 교회는 누구의 관할을 받아야 할까? 종교 계통상으로는 로마 교황의 지휘를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실상은 영주의 지배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는 순수한종교 조직인 것만이 아니라 막대한 토지를 지닌 대지주이기도 했던 것이다(더구나 오늘날도 그렇듯이 당시 교회 재산은 면세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토지를 교회에 기증하고 각종 혜택마저 부여하는 영주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사실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교회는 봉건 군주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샤를마뉴의 시대에는 정복 사업이 진행 중이었으므로 피정복지의 주민들을 통합하는 데는 종교만 한 수단이 없었다. 또한 노르만의 민족이동 시기에도 서유럽 국가들은 이민족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포교를 적절히 이용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민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서유럽 세계 전체가 적어도 종교적으로는 한 몸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중세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교회의 필요성은 점차 약해졌다. 교회는 중세 사회의 핵심이었으므로 봉건 영주들은 교회를 지원하는 것을 여전히 의무로 여기고는 있었으나, 영주 자신이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과거의 선배 영주들만큼 교회에 대한 애착을 가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를 지배 수단의 하나로 여기고 자신의 친척들을 주교나 사제로 임명하는 경우도 많았다(이로 인해 주교는 종교인이라기보다 정치인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더 큰 문제는 교회 내부에 있었다. 세속의 재산과 특권을 가지게 된 성직자들은 배가 불러갈수록 종교적으로 타락해갔다. 게다가 성직자의 수가 늘면서 자질이 모자란 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교리상 금지되어 있는 결혼까지 마음대로 하는가 하면, 여러 여자와 동거하는 성직자도 있었다. 주교가 약탈하고 사제가 전쟁을 벌이는 경우는 흔한 일이 되었다. 이런 타락상에 실망한 뜻있는 교인과 성직자 들은 교회를 개혁하지 않으면 교회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여겼다사실 교회의 타락 현상은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4세기부터 있었다. 따라서 교회 개혁 운동도 그 당시부터 벌어졌는데, 그 결과로 생긴 게 수도원이었다. 수도원 운동은 동방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어 5세기부터는 서유럽에서도 본격화되었다. 529년 이탈리아의 베네딕투스는 로마 남쪽의 몬테카시노에 서방교회 최초의 수도원을 세우는 데, 이것이 베네딕트 수도회의 시작이다.

 

 

교회의 권위 땅은 분열되어 있지만 하늘은 하나다. 세속 군주들은 각자 자기 영토에서는 왕으로 군림해도 교회에서는 누구나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림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 부부가 성모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다. 교회는 군주를 능가하는 지고의 권위를 오래도록 누린 탓에 부패와 타락의 길로 들어섰다.

 

 

10세기 초에 설립된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은 처음부터 단호한 개혁 의지를 가지고 출범했다. 개혁의 취지는 교회 타락의 근원인 세속과의 연관을 끊고 교회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조문보다 중요한 것은 시행령이듯이, 그 취지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세칙이었다. 교회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세속과의 연관을 끊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교회가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을 승인한 사람이 아키텐 공 기욤이었으니 사실 그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정치 세력은 이제 별로 쓸모가 없어진 교회에서 그동안 내주었던 세속적 권한과 특혜를 박탈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기욤은 그것이 양날의 칼임을 알지 못했다. 세속과의 연관을 끊는다는 취지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교권의 정치적 독립이었던 것이다.

 

세속 군주들이 성직자들을 마음대로 임명하는 풍토에서는 사실상 교회가 존재하는 게 무의미했다. 더구나 교회로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현상이 로마 교황청에까지 퍼져 있다는 점이었다. 오토 1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임명한 것은 교황의 마지막 승부수였으나 오히려 그것은 이후 황제가 교황을 임명하고 해임하는 권리를 보유하게 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황제가 교황에 간섭하지 않을 때는 로마 귀족들이 교황을 찧고 까불었다. 그게 다 교황이 세속 군주의 힘을 빌리려 한 데서 비롯되었으니 교황으로서는 자업자득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은 바로 그런 현상을 바로잡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클뤼니 수도원의 설립 자체도 세속 군주의 승인을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으니 더욱 각오가 새로웠을 것이다). 개혁의 세칙에는 수도원장을 수도사들이 선출하며, 교회는 교황에게만 직속하고 다른 지역 주교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포함되었다. 기욤을 비롯한 세속 군주들은 어차피 유명무실해진 교회가 자립권을 가진다는 것에 별로 긴장하지 않았겠지만, 종교계의 반응은 뜨겁고도 놀라웠다. 순식간에 클뤼니 수도원을 따르는 교단이 수백 개로 늘어났으며, 프랑스 전역은 물론 영국에까지 개혁의 파도가 흘러갔던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 힘을 얻어 로마 교황도 새삼 개혁의 칼을 벼리게 되었다.

 

1059년 교황청에서는 종교회의를 열고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로마 교황을 로마 귀족이나 독일 황제가 아닌 바로 로마 추기경들이 선출한다는 것이었다(이 전통은 오늘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선출된 첫 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서유럽 전역의 교회들에 같은 지침을 내려 세속 군주들이 성직자의 임명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세속 군주들은 이미 현실적으로 성직자의 임명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하늘과 땅의 대결이 임박해 있었다.

 

 

개혁의 칼 흔히 교회의 타락은 중세의 해체기, 종교개혁의 시대에만 있었던 것으로 알지만, 사실은 중세의 전성기부터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 교회는 나름대로 자정 메커니즘도 갖고 있었다. 바로 수도원이었다. 그림은 교회 개혁에 앞장섰던 클뤼니 수도원이다. 클뤼니라는 이름은 오늘날 중세 미술품을 전문으로 하는 파리의 세계적 미술관 이름으로 쓰일 만큼 중세를 대표하는 말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땅에 내려온 교회

대결과 타협

그리스도교의 지하드

성전에서 추악한 전쟁으로

해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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