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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5부 꽃 - 1장 다른 세계를 향해, 신앙과 양념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5부 꽃 - 1장 다른 세계를 향해, 신앙과 양념

건방진방랑자 2022. 1. 9.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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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다른 세계를 향해

 

 

신앙과 양념

 

 

15세기 중반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당시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1462쪽에서 보았듯이 곧 통합을 이루니까 이제부터는 에스파냐를 나라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다)는 수백 년동안 진행된 레콘키스타가 거의 완료되었음에도 별로 기쁘지 않았다. 뒤늦게 중앙집권적 왕국의 기틀을 갖춘 두 나라는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새삼 자신들의 처지를 자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서유럽 세계에서 어느새 그들은 후진국이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로마 교황과 독일 황제가 권력 다툼을 벌이는 지역이었으므로 정치적 여건상 그렇다 치지만, 이베리아는 오랜 이슬람 지배로 서유럽 문화권에서 배제되어 있었던 탓에 남들이 토끼처럼 달려갈 때 거북이처럼 기어온 것이다.

 

로마 시대에 히스파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로마의 주요한 속주라는 점에서 보면, 이베리아는 게르만 전통의 프랑스나 영국보다도 훨씬 먼저 로마 문명의 혜택을 입었던 지역이다. 그런데 지금은 영락한 처지가 되었으니, 이베리아인들은 당연히 이슬람이라면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온 세상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켜야만 비로소 이 치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꿈을 이루려면 먼저 한 가지 전제가 필요했다. 이교도들의 세상이 어디까지인지를 알아야 했던 것이다. 시험 범위를 알아야 공부를 할 것 아닌가?

 

우선 이베리아의 동쪽은 유럽과 지중해, 그 너머에는 아시아가 펼쳐져 있었고 그곳에는 전통 사회들이 득시글거렸으므로 그들의 시험 범위가 아니었다. 또 사하라 이북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북아프리카는 중앙아시아와 더불어 이슬람의 본산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이슬람의 손아귀에서 갓 해방된 이베리아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이 구세계의 모든 지역은 중세에 새로이 서양 문명의 핵심으로 성장한 서유럽 강국들의 관할 구역이었으므로 이베리아의 신참들로서는 언감생심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전력을 투여할 곳은 서쪽의 망망한 대서양과 남쪽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뿐이었다. 그리스도교 문명을 새로 일굴 터전도 역시 이 방면뿐이었다. 저 바다 너머에는 뭔가가 있겠지. 대항해시대를 연 종교적 동기는 이렇게 무르익어갔다.

 

 

세계지도를 그리는 유럽 역동적인 역사를 전개한 유럽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서도 가장 앞섰다. 그림은 15세기에 그려진 세계지도다. 유럽과 아프리카 서해안 일부 이외에는 엉성하게 그려져 있지만, 그래도 전 세계를 하나의 지도에 담으려 한 유럽인들의 기상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대서양으로 진출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는 경제적인 데 있었다. 옛 오리엔트와 그리스, 로마를 거쳐 중세 내내 지중해는 문명의 모태 그 자체였다. 유럽 문명의 씨앗을 실어온 것도 지중해였고, 뿌리를 키우고 줄기를 뻗게 한 것도 지중해였다. 그뿐이랴? 화약, 나침반, 인쇄술의 중세 3대 발명품을 비롯해 중국에서 생겨난 온갖 문물이 유럽에 전해지는 통로가 된 것도 지중해였다. 아라비아의 상인들은 비단길을 통해 또 다른 세계 문명의 발원지인 중국의 선진 문물을 도입한 뒤 지중해를 통해 부지런히 유럽으로 실어 날랐으며, 게다가 인도의 과학이나 아라비아 자체에서 발생한 그리스 고전 연구의 성과까지 유럽 세계에 전해주었다(나중에 보겠지만 이것은 르네상스의 발생에 큰 역할을 한다). 이처럼 지중해가 없었다면 서양 문명의 발생과 전파, 발전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베리아는 지중해 연안에 있으면서도 그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동안 이베리아의 역사는 지중해 때문에 피해를 본 경우였다.

 

중세 후기에 이슬람과 비잔티움이 무너진 것은 문명의 중심이 서유럽으로 확고히 옮겨간 계기가 되었고, 이베리아가 이슬람의 사슬에서 풀려나게 되는 데도 적잖이 기여했지만, 이베리아인들이 얻은 소득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지리적 여건상 당연히 그들도 한몫을 차지해야 할 지중해 무역권은 베네치아와 제노바를 비롯한 북이탈리아 도시들이 독점하게 되었다. 동방의 문물은 일단 이탈리아의 항구들에 집적되었다가 육로와 해로를 통해 알프스 이북의 서유럽에까지 전달되었는데, 육로는 이베리아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해로는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상인들이 장악했다. 이베리아인들은 상선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빙 돌아가며 큰돈을 버는 모습을 뻔히 바라보아야만 했다.

 

동방의 문물 가운데 가장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은 향료였다향료는 이미 기원전 3000년경부터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아라비아 상인들이 향료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사실도 기원전 2000년경에 나온다. 그들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된 향료를 유럽에 수출하는 것으로 이득을 남겼으니, 향료 무역은 수천년 동안 변함이 없었던 셈이다. 이 구도가 깨어진 게 대항해시대부터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도 향료 무역을 독점하려는 의도가 동기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칭기즈칸의 서역 원정에도 향료 무역에 대한 관심이 개입되었을지 모른다(적어도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뒤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향료무역으로 많은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향료라고 하면 양념이 연상되지만 당시의 향료는 단순히 음식의 맛을 돋워주는 용도 이상의 필수품이었다. 향료는 고기를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해주었고, 와인을 비롯한 각종 술을 빚는 데도 반드시 필요했다. 몰약, 계피, 바닐라, 코코아, 사프란 등이 모두 향료였으나 그 가운데 으뜸은 후추였다.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가장 큰 무역 이익을 가져다준 것도 바로 후추였다.

 

향료 무역의 수익률은 대단히 높았다. 향료를 실은 선박 여섯 척 가운데 다섯 척이 도중에 침몰한다 해도 한 척만 무사히 돌아오면 이윤을 남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상인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바로 향료의 원산지였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아라비아 대상들이 알렉산드리아나 시리아의 항구까지 실어온 향료를 받아다 서유럽에 납품하는 역할만 했을 뿐이므로 향료 원산지를 알 수 없었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향료의 원산지가 어디인지를 결코 알려주지 않았다. 후대에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섬들이 원산지라는 사실이 알려지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인도 어디쯤이라는 정도만 알았고, 더욱이 인도가 어딘지 자체도 몰랐다.

 

그런데 신앙과 양념의 문제는 사실 하나였다. 그리스도교 세계를 확대하는 일과 향료 원산지를 찾는 일은 결과적으로 서로 중복되는 사업이었다. 어차피 기존의 그리스도교 세계 내에는 향료 원산지가 없으니까. 타고난 모험심으로 항해가(Navegador)’라는 별명을 얻은 포르투갈의 왕자 엔리케(Henrique, 1394~1460)는 바로 그 점에 주목했다.

 

엔리케가 먼저 관심을 가진 지역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였다. 젊은 시절 그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도시 세우타(지금의 모로코)를 정복했을 때 남방에 관한 흥미로운 소문을 듣게 되었다. 아프리카 내륙 어느 곳에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라는 사람이 세운 왕국이 있는데, 그는 독실한 그리스도교도로서 일찍이 십자군 전쟁보다 앞서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서 탈환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의 왕국과 손잡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교의 세상은 훨씬 앞당길 수 있으리라. 게다가 엔리케의 귀에는 아프리카의 황금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왔다. 아프리카 남쪽 어딘가에는 온통 황금으로 된 나라가 있다는 것이다프레스터 존과 황금 이야기는 둘 다 전설이지만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프레스터 존의 왕국은 에티오피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에티오피아는 기원전 1000년경에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아들인 메넬리크가 세웠다고 한다(에티오피아인들은 1975년에 사망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까지 그 왕통이 이어졌다고 믿고 있다). 그 후 7세기 무렵 아라비아의 셈족이 에티오피아로 이주해왔다. 솔로몬의 자손에다 셈족의 혈통인 탓에 에티오피아는 오늘날에도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문 그리스도교 국가다. 또한 아프리카의 황금 이야기는 지금의 황금 해안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엔리케가 들은 소문은 헛소문이 아닌 셈이다.

 

 

세계에 관한 전설 모르는 것은 두렵다. 낯선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게 어떤 세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계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한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세계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 이외의 다른 세계에 그림처럼 가슴에 얼굴이 있거나 눈이 하나밖에 없는 괴물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프랑스와 영국이 서유럽의 패권을 놓고 백년전쟁을 한참 벌이고 있을 때, 독일의 영방국가들과 스칸디나비아의 칼마르 동맹이 그 빈틈을 노리고 강국의 대열에 올라서려 애쓸 때,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도시들이 지중해 무역에만 눈이 발개져 있을 때, 엔리케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꿈을 이루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조선공과 항해 장비 기술자, 천문학자 등을 불러 모았다(당시 베네치아의 조선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원양 항해와 지중해 항해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우선 고대부터 지중해를 누비고 다닌 전통의 갤리선으로는 대양에 나갈 수 없었다. 노 젓는 사람들만 수십 명씩 태우고 다녀야 하는 데다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이 많이 필요했으므로 중간 기착지가 없이는 수개월씩 항해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서양을 항해하려면 당시 신형 모델인 범선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범선을 쓸 경우 갤리선에서는 없어도 상관없는 장비들이 필요했다. 바람의 힘만으로 대양을 항해해야 하므로 바람의 방향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지중해에서야 노련한 선원이라면 어느 계절에 어느 쪽에서 바람이 부는지 눈 감고도 알았으나 미지의 세계 대서양은 달랐다. 나침반과 사분의 같은 항해 장비들은 그냥 있으면 좋은 정도가 아니라 꼭 있어야 하는 항해 도구였다. 그래서 엔리케는 동방의 선진 문물이 흘러넘치는 이탈리아의 기술자들을 초빙해 그것들을 제작하게 했다.

 

선박이나 항해 장비보다 더 중요한 인력은 외국인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도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는 선원들은 많았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서 모험심과 충성심이 강한 자들만 잘 고르면 되었다. 이렇게 해서 15세기 초부터 엔리케의 특명으로 구성된 탐험대는 이베리아를 떠나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탐험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약간의 노예들과 사금을 가져오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엔리케는 애초부터 의도가 거기에 있지 않았으므로 실망하지 않고 자비를 들여 계속 탐험대를 보냈다. 탐험 결과가 누적되고 마침내 아프리카 대륙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베르데 곳이 발견되자 드디어 그가 의도한 성과가 드러났다. 대서양 동부의 해도가 작성된 것이다. 해도가 있으면 항로를 찾을 수 있고, 항로를 찾으면 향료를 구할 수 있다. 이제 엔리케의 꿈은 한층 현실에 가까워졌다. 그와 더불어 마데이라, 아조레스 등 대서양의 여러 섬이 포르투갈 소유가 되면서 중간 보급기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부산물이었다.

 

 

중세의 첨단 산업 대항해시대의 항해는 지금으로 치면 인터넷이나 IT 산업에 해당하는 첨단 분야였다. 사진은 영국의 항해 잡지인 <매리너스 미러(The Mariners Mirror)인데, mirrormirrov(u)r라는 고어로 표기한 게 보인다. 이 잡지는 1년에 네 차례 간행되는 계간이었으며, 1588년에 창간되어 20세기 초까지 발행되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신앙과 양념

땅따먹기 게임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정복의 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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