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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5부 꽃 - 1장 다른 세계를 향해, 땅따먹기 게임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5부 꽃 - 1장 다른 세계를 향해, 땅따먹기 게임

건방진방랑자 2022. 1. 9.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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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따먹기 게임

 

 

엔리케의 원대한 꿈이 실현된 것은 그의 사후였다.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는 작은할아버지인 엔리케의 유지를 받들어 대서양 탐험대를 계속 지원했다. 마침내 1488, 탐험을 시작한 이래 가장 큰 성과가 이루어졌다. 그전 해에 리스본을 출발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 1450년경~1500)가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까지 갔다가 포르투갈로 귀국한 것이다. 아프리카의 끝을 발견했으니 이제 그곳만 돌아 동쪽으로 가면 인도를 찾을 수 있을 터였다. 폭풍으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디아스는 그곳을 폭풍의 곶이라고 이름 지었으나 주앙 2세의 생각은 달랐다. 폭풍을 겪은 것은 선원이고 국왕에게는 어쨌거나 향료를 발견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 될 뿐이다. 그래서 주앙 2세는 희망봉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바꾸었다그러나 디아스의 탐험이 엔리케의 의도를 진정으로 계승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엔리케는 1456년 베르데 곶을 발견하고서 서쪽으로의 항해, 즉 대서양 횡단을 꾀했던 듯하다. 그런데 주앙 2세는 남쪽으로의 항해를 지시했다. 게다가 왕은 1487년 디아스의 탐험대와 더불어 육로 탐험대도 보내 향료 원산지를 찾게 했다. 주앙은 엔리케가 사적으로 항로를 개척한 성과에 고무되어 탐험의 규모를 확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엔리케의 유지를 충실히 계승했더라면 포르투갈은 에스파냐를 제치고 더 일찍 신세계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포르투갈이 대어를 낚자 에스파냐도 큰 자극을 받았다(그동안 에스파냐는 레콘키스타가 끝나지 않아 해외 진출을 미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르투갈의 뒤를 따라간다면 계속 뒤처질 수밖에 없을뿐더러 애써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의 땅따먹기 게임에는 후발 주자의 이득 같은 것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에스파나는 엔리케의 원래 구상을 좇아 대서양 항로를 개척하기로 마음먹었다. 포르투갈이 동쪽으로 간다면 우리는 서쪽으로 간다. 당시에는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사실로 믿어지고 있었다(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항구로 돌아오는 배가 돛대부터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서양 너머 서쪽으로 계속 간다면 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그 일을 성공시킨 사람이 바로 콜럼버스였다. 포르투갈에 비해 수십 년이 뒤처진 에스파냐가 단번에 포르투갈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그의 공로였다. 희망봉이 발견되기 전인 1482년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탐험의 지원을 부탁했으나 당시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항로에만 관심이 있었던 주앙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에스파냐의 이사벨 1세에게 부탁했다. 여왕 역시 처음에는 승인을 미루다가 1492년 그라나다의 정복으로 레콘키스타가 완료되자 계획을 허가했다. 그해 10월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는 카리브 해의 바하마 제도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여기가 바로 인도라고 여겼고 그 믿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후대의 사람들은 그 일대를 서인도 제도라고 이름 지어 그의 맹신을 위로했으나 과연 이후에도 신대륙에 두 차례나 더 갔던 그가 끝까지 그곳을 인도라고 믿었을지는 의문이다).

 

 

십자가와 칼 바하마에 상륙한 콜럼버스는 그림에서처럼 원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그는 칼을 들고 있고, 뒤의 부하들은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이 두 가지는 장차 에스파냐가 신대륙의 원주민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예고한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두 주자가 같은 경기장에서 달리게 되었으니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면 트랙을 달리 정해야 했다. 특히 어리석은 판단으로 콜럼버스를 놓친 포르투갈은 뒤늦게 출발해 추월해버린 에스파냐에 대해 불만이 컸다. 하지만 사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서로 다툴 입장이 아니었다. 한 뿌리에서 나왔고 서유럽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비슷한 데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얻게 될 영토는 무궁무진했던 것이다.

 

그래서 두 나라는 속셈이야 어떻든 중재자를 세우고 기준을 정해 서로 정정당당한 승부를 하기로 약속했다. 중재 역할을 맡은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1493년 베르데 곳에서 서쪽으로 약 480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남북 방향으로 가상의 경계선(경도에 해당한다)을 긋고, 서쪽은 에스파냐, 동쪽은 포르투갈의 소유라고 발표했다. 쉽게 말하면, 아프리카는 포르투갈이 먼저 진출했으니 포르투갈의 소유로 하고 신대륙유럽인들이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신대륙이라는 말을 쓴 탓으로 우리는 신대륙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실상 아메리카가 신대륙인 것은 사실이다. 아메리카는 인간이 가장 늦게 정착한 곳이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 아시아와 알래스카를 잇는 베링 해협이 육지였을 무렵 동북아시아에 살았던 몽골 계통의 인류가 북아메리카로 건너간 것이 아메리카에 인간이 살게 된 기원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은 에스파냐의 몫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포르투갈은 신대륙 경영에 참여할 수 없게 되니 누가 봐도 불공평했다(마 교황은 에스파나인 이었다). 게다가 그 경계선은 대서양 한복판을 세로로 종단하므로 포르투갈이 영토로 삼을 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결국 그 이듬해 두 나라는 경계선을 다시 서쪽으로 1500킬로미터쯤 더 이동시키기로 합의했는데, 이것을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라고 부른다. 베르데 곶에서 서쪽으로 2000킬로미터 지점이라면 오늘날 서경 50도 부근에 해당하므로 브라질의 동쪽 끝부분에 걸치게 된다. 당시에는 남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포르투갈로서는 미지의 세계를 걸고 도박을 감행한 셈이다. 그러나 그 도박이 성공한 덕분에 오늘날 브라질은 대부분 스페인어를 쓰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 국가가 되어 있다.

 

 

신대륙의 이야기 콜럼버스 덕분에 유럽인들은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이외에 또 다른 대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직후에 그려진 지도인데, 남북아메리카 대륙의 동해안만이 그려져 있다. 당시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대서양 연안의 신대륙뿐이었으니 당연하다.

 

 

가상의 경계선이 처음 위력을 발휘한 때는 1500년이었다. 그해 포르투갈 선원 카브랄은 희망봉으로 가던 항로에서 실수로 이탈했다가 브라질 해안에 닿았다. 실수로 횡재를 얻은 그는 국왕인 마누엘 1세에게 보고했고, 왕은 이탈리아의 항해 전문가인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eci, 1454~1512)에게 확인해보라고 했다. 1503년 베스푸치는 마누엘에게 드디어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성과물이 생겼음을 알렸다. 정작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오늘날 콜롬비아라는 나라 이름으로만 남았지만, 브라질을 확인한 베스푸치의 이름 아메리고는 대륙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아메리카)이 되었다.

 

부전공인 대서양 항로에서 큰 성과를 얻었으니 전공인 인도 항로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인도 항로를 독점하게 된 포르투갈은 항로의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물론 그 끝에는 인도가 있을 터였다. 1497년 마누엘로부터 대사라는 직함을 받은 바스쿠 다 가마(Vasco di Gama, 1469년경~1524)는 네 척의 배를 이끌고 리스본 항구를 출발했다. 이듬해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인도에 닿은 다 가마는 아라비아 상인들의 방해 공작을 무릅쓰고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향료 원산지에서 향료를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엔리케가 탐험을 계획한 지 80년만에,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해 절반의 목표를 이룬 지 꼭 10년만에 인도 항로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519년부터 3년간에 걸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 일주에 성공한 마젤란의 탐험은 대항해시대 100주년 기념 선물이었다(마젤란은 항해 도중 필리핀에서 죽었으므로, 엄밀히 말해 최초의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은 몰루카 출신으로 처음부터 항해에 참여한 그의 노예 엔리케다). 게다가 마젤란은 포르투갈인으로서 에스파냐의 지원 받았으니, 말하자면 두 나라의 합작품인 셈이다.

 

 

후발 주자의 이득 뒤늦게 유럽 문명권에 복귀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형세를 만회하기 위해 대서양 항로 개발에 뛰어들었다. 에스파냐는 조금 먼저 출발한 포르투갈에 아프리카를 도는 항로를 빼앗겼으나 그 덕분에 서쪽 항로를 개발해 신대륙을 발견했다. 닭을 놓친 대신 꿩을 잡은 격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신앙과 양념

땅따먹기 게임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정복의 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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