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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5부 꽃 - 2장 신에게서 인간으로, 사실성에 눈뜨다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5부 꽃 - 2장 신에게서 인간으로, 사실성에 눈뜨다

건방진방랑자 2022. 1. 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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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성에 눈뜨다

 

 

중세의 중반기까지 동방의 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이 모든 분야에서 서유럽을 앞섰다는 것은 앞에서도 본 바 있다. 여기에는 하드웨어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포함된다. 정치와 경제, 사회제도 등이 하드웨어라면, 문화와 예술은 소프트웨어다. 소프트웨어가 발달하는 속도는 대체로 하드웨어보다 느리다. 중세가 한창 변화의 와중에 있었던 12~13세기쯤이면 서유럽 세계는 다른 면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을 거의 따라잡았으나 문화와 예술은 아직 미치지 못했다. 특히 미술에서는 여전히 비잔티움풍이 가장 선진적이고 첨단의 유행이었다(그런 탓에 오늘날에도 비잔티움이라고 하면 흔히 제국보다 미술양식을 먼저 떠올린다).

 

이런 구도를 깨뜨린 사람이 피렌체의 조토(Giotto di Bondone, 1266년경~1337). 그는 이탈리아의 전통을 흡수해 새로운 화법으로 표출시킴으로써 후대 미술사가들에게서 유럽 근대 회화의 창시자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게 된다. 물론 아직 소재에서 새로운 것을 추구할 단계는 아니었다. 비잔티움 미술은 오랫동안 성화(聖畵, icon)의 전통이 지배했기 때문에 성화를 위한 기법과 양식이 크게 발달했다. 이탈리아의 화가들도 이것을 이어 받았으므로비잔티움의 성화가 서유럽으로 퍼진 것은 특히 9세기 이후부터였다. 왜 그랬을까? 바로 성상 숭배 금지령 때문이다. 1328쪽에서 보았듯이 8세기에 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는 수도원 세력을 누르고 황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이 문제를 놓고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는 여러 차례 분쟁이 벌어지게 되는 데, 이를 계기로 제국 내에서 위축된 비잔티움 양식의 성화가 서유럽으로 전해지게 되었다조토 역시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신앙심을 두텁게 하려는 의도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같은 성화라 해도 조토의 작품은 비잔티움 성화와 크게 달랐다. 비잔티움 성화는 종교적 목적만을 부각시킬 뿐 인물이 평면적이고 비사실적인 형태를 취하는 데 반해, 조토의 그림은 똑같이 성서의 내용을 소재로 하면서도 각 인물을 개성을 가진 존재로 살려내는 사실적인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그럼 조토 이전의 비잔티움 화가와 이탈리아 화가 들은 그 점을 몰랐던 걸까? 그들의 눈에는 누가 봐도 명백한 인물들의 개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듯 인물들을 평면적으로 그린 걸까?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비잔티움 성화에서는, 성모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같이 종교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크고 자세하게 묘사하고 나머지 조연들은 그 주변에 아주 조그맣게 그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화가가 실제로 그 인물들의 크기가 각기 다르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의 회화에서는 종교적 목적이 가장 중요했고, 다른 측면, 이를테면 사실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을 뿐이다. 중세 이전의 시대, 종교가 모든 것을 압도하지 않았던 시대, 즉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예술이 더 후대인 중세보다 훨씬 사실적인 작품들을 제작했다는 것이 그 점을 증명한다(그렇기 때문에 조토의 회화는 중세를 건너뛰어 고전 문화와 통하는 르네상스의 특징을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토가 자신의 작품에서 사실성을 부각시킨 것은 그의 예술적 천재성을 말해준다기보다는 시대가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현상이다. 달리 말하면 조토 이전의 시대와 조토의 시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는 좋은 작품의 기준이 다른 것이다. 만약 중세의 전성기에 조토의 작품이 미술전에 출품되었다면 틀림없이 격렬한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그때는 신앙심을 얼마나 잘 담아냈는가가 작품 선정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으니까(그런 점에서 르네상스 미술은 그전 시대보다 내용의 중요성이 적어진 대신 미술의 형식, 즉 양식미가 훨씬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조토가 개척한 사실성의 새로운 관점은 피렌체 태생인 건축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에게로 이어져 르네상스 미술의 최대 발명품이라 할 원근법을 낳게 된다. 알다시피 건축은 회화보다도 더 사실성이 필요한 예술 장르다. 그림으로 그린 건물은 설령 불안정해 보인다 해도 무너질 일은 없지만 건축에서는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대형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심을 최우선으로 하는 중세에도 건축에서만큼은 사실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신앙심의 상징인 고딕 성당의 높은 첨탑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했다).

 

건축가인 동시에 건축 이론가이기도 한 브루넬레스키는 그 사실성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계산하고자 했다. 그가 연구 대상으로 택한 것은 옛 로마의 유적이었다. 그 고대의 건축물들을 보면서 그는 보는 시점과 각도에 따라 거리감이 어떻게,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계산했으며, 그 결과 비례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감각을 얻을 수 있었다. 즉 보는 사람의 눈과 물체의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을 경우 어느 정도로 작게 보이는가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원근법의 근본 원리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브루넬레스키가 발명한 원근법은 정작 건축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건축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원근법의 원리가 적용되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으면 건축물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근법은 오히려 3차원의 입체를 2차원의 평면으로 묘사하는 것, 즉 회화에 반드시 필요했다. 회화가 새로운 사실성을 담아내려면 원근법을 수용해야 했다.

 

가까이 있는 물체는 커 보이고 멀리 있는 물체는 작아 보인다. 이것은 현실 세계가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 세계를 2차원의 화폭에 담으려면 가까운 것을 크게 그리고 먼 것을 작게 그려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원리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리겠다는 발상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 당연한 원리는 훨씬 더 늦게 회화에 적용되었을 것이다브루넬레스키가 개발한 원근법은 그의 동료 건축가이자 작가인 알베르티가 더욱 체계화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발명된 원근법은 선으로 원근을 표현하는 선원근법이었고, 나중에는 색채를 이용하는 색채원근법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원근법에는 흥미로운 역설이 숨어 있다. 자연을 사실적으로, 즉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게 원근법의 취지였지만 원근법 자체에는 사실의 왜곡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화가들은 원근법에 따라 멀리 있는 길은 좁게 그리고 가까이 있는 길은 넓게 그리지만(또한 그게 더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멀리 있다고 해서 실제로 길 자체가 좁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원근법은 사실을 왜곡해야만 사실성을 얻을 수 있다는 역설이 된다. 이는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으로 담아내는 데 따르는 피할 수 없는 모순이다. 이 점은 나중에 인간 이성의 동질성이 해체되는 19세기에 다시 주요한 주제가 된다.

 

조토와 브루넬레스키의 발상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발명이나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예술 작품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산물이다. 대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예술적 의도는 원래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시대는 물론 그보다 훨씬 이전인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알타미라 동굴이나 라스코 동굴의 벽화에서도 그 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내내 관철되어오던 사실성을 향한 지향은 중세 기간에 종교가 만들어낸 무형의 압력에 짓눌려 잠시 맥이 끊겼다. 그것을 부활시킨 것이 르네상스 미술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르네상스는 단지 고전 문화만을 부활시킨 게 아니라 억압되어 있던 인간의 본능을 해방시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달라진 기준 왼쪽은 12세기의 비잔티움 성화이고, 오른쪽은 르네상스 시대에 뒤러가 그린 성모와 아기 예수다. 같은 소재의 작품이지만 왼쪽 그림은 누가 봐도 두 인물의 비례가 어색하다. 그러나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에는 사실성을 기준으로 작품의 가치를 따진 게 아니라 종교적 심성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예술의 기준은 이렇게 상대적이다. 뒤러의 작품은 12세기라면 오히려 어색하다는 비난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부활인가, 개화인가

문학이 문을 열다

사실성에 눈뜨다

작은 로마가 만든 르네상스

알프스를 넘은 르네상스

인간 정신의 깨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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