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정신의 깨어남
르네상스라고 하면 미술을 맨 먼저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네상스가 인류 역사, 특히 서양의 역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학문 분야였다. 미술처럼 화려한 조명을 받지는 못했어도 르네상스 시기 학문적 사고의 변화는 이후 수백 년 동안 서양 문명이 발달하고 마침내 전 세계의 패자가 되는 데 필수적인 거름이었다.
인간을 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게 한 인문주의는 실로 오랜만에 인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었다. 중세에는 인간의 위상과 세계 내에서의 역할이 신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규정되었으므로 인간을 설명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고전 시대 이래 처음으로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는 계기를 얻었다. 오랫동안 인간은 ‘세계의 일부’이기만 했으나 이제부터는 세계를 마주 대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가 되었으므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새로워 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이것은 당연히 철학의 주제였지만, 아직 철학은 신학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처음으로 부르짖은 것은, 중세에 신학 이외의 ‘잡학’, 즉 교양과목으로 묶여 있던 천문학이었다.
이탈리아의 화가들이 신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화폭에 담기 시작할 때,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micus, 1473~1543)는 엄청난 학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1530년 그는 학생 시절부터 오랫동안 연구해온 성과를 조심스럽게 자비로 출판했다. 그것은 로마 시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정립한 천동설을 정면으로 뒤집는 지동설이라는 혁명적인 이론이었다.
천동설은 1300년 동안이나 일식과 월식, 행성들의 위치 등을 정확히 예측하게 해주었고 그리스도교 이념에도 충실한 이론 체계였다. 그랬으니 코페르니쿠스의 고민은 클 수밖에 없었다(더구나 그 자신도 신앙심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신학자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반응이다. 그래서 그는 책을 맨 먼저 교회로 보냈다.
교회는 아직 사태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언뜻 생각하기에는 천동설이 지동설보다 오히려 인문주의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면 우주가 인간 중심의 질서를 취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인간 중심이 아니라 신 중심의 질서다. 그리스도교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만든 가장 높은 수준의 피조물이므로 천동설은 신 중심의 세계관을 강화해준다. 그에 비해 지동설은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을 세계의 다른 존재(예컨대 사물)와 같은 위상으로 격하시키는 듯하지만, 실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대변한다. 지동설은 인간이 이성의 힘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인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문주의는 인간 자체보다 인간 이성(reason)을 중심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인문주의(humanism)라기보다는 이성주의, 즉 합리주의(rationalism)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실제로 17세기부터는 합리주의적 전통이 자라나면서 이것이 18세기의 계몽주의로 이어지게 되므로 인문주의는 합리주 의의 단초라고 보아야 한다】? 사실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가 발명했다기보다는 ‘발견’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아리스타르코스가 지동설을 주창한 적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쟁쟁한 학자들이 천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금세 묻혀버렸다. 젊은 시절 북이탈리아에 유학을 왔던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타르코스의 학설을 설명하는 그리스 시대의 문헌에 주목했다. 마침 그리스와 연관된 것이면 모든 것을 부활시키려 했던 당시 북이탈리아의 시대적 추세도 그에게 큰 힘을 주었을 것이다.
예상외로 교회에서 공식 출간을 권유하자 코페르니쿠스는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계속 망설이다가 죽기 1년 전에 야 출간을 결심하고 죽음을 앞두고 자기 책을 받아보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게 다행이었다. 지동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뒤늦게 깨달은 교회는 공식적으로 지동설을 부인했고, 그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이단으로 몰기 시작한 것이다.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가 화형을 당하고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속삭인 것은 그 절정이었다(지동설은 17세기에 완전히 옳은 학설로 인정되지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금세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인쇄술이 발전한 데 있었다. 15세기 중반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와 인쇄기를 발명함으로써 서적의 대량 인쇄와 유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것은 그렇잖아도 급속도로 확산되어가는 르네상스 문화와 사상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 뒤바뀐 세계관 지구는 수십억 년 전부터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설명하는 담론은 고대에 지동설, 중세에 천동설, 다시 근대에 지동설로 바뀌었다. 사물은 변함없지만 그 사물을 규정하는 말은 자꾸 변한다. 이렇듯 앎이란 ‘사물’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말’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림은 지동설이 진리로 굳어진 17세기에 간행된 천문학서의 삽화다. 오른쪽에 앉아 있는 인물이 코페르니쿠스다.
중국에서 발명되어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서유럽에 전해진 4대 발명품 (중세 3대 발명품에 종이를 더함)은 모두 르네상스 시기 서유럽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화약이 서유럽에 전래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비잔티움 제국이 ‘그리스의 불’을 만들어 쓴 게(1권 316쪽 참조) 8세기이고 보면 그 이전일 것이다. 그다음 8세기에는 종이가 유럽에 전래되었고, 11세기 무렵에는 나침반이 그 뒤를 따랐다. 인쇄술의 경우에는 전래 여부가 확실치 않으나 원 제국 시대인 13세기에 유럽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이 발명품들이 본격적으로 활용된 때는 르네상스 시대였다. 한 가지 예로, 유럽인들은 오래 전에 종이가 전래되었는데도 중세 내내 양피지를 계속 사용하다가(필사본을 만들 때는 양피지가 더 좋았다)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에야 더 값싼 종이를 대량 생산하고 사용하게 되었다.
동양 사회는 인쇄술과 활자를 먼저 발명했으나 주로 지식을 보관하는 데 사용했다. 예를 들어 실용 서적이 아니면 대량 인쇄를 하지 않고 네 부만 인쇄해서 네 군데의 서고에 보관하는 식이었다(역사서가 대표적인 예다). 그 반면 서양에서 인쇄술은 발명되자마자 지식의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인쇄술이 동양에서 먼저 발명되었어도 많이 사용되지 못한 이유는 동양 사회가 늘 지배계급 중심의 역사를 전개했기 때문이다. 동양 사회에서 서적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굳이 서적을 대량으로 생산해 유포할 필요가 없었다. 농사나 약학 같은 실용적인 지식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식은 지배층이 가지고 이용하는 것이지 민간에 확산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쇄술은 주로 궁정에 보관하는 사서(史書)나 관청의 자료를 제작하는 데만 사용했다. 인쇄술을 정부가 독점한 것과 달리 서양에서는 인쇄술이 발명되자 곧바로 민간에 퍼졌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지 불과 50년 만에 서유럽에서는 200여 곳의 출판사-인쇄소가 생겨났다】. 르네상스 시대에 초기 시민계급이 탄생하면서 지식이 점차 민간에 확산되었고, 그에 따라 서적의 필요성이 커졌다. 인쇄술이라는 첨단의 매체가 발달한 덕분에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 정립된 세계관은 순식간에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 그러나 지식의 보급 이전에 인쇄술이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한 분야는 따로 있었다. 인쇄술과 활자가 개발되자 가장 먼저 인쇄하고 싶은 서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성서였다. 성서가 대량으로 인쇄되고 폭넓게 보급된 것은 당시 일렁이고 있던 종교개혁의 물결을 거센 파도로 바꾸었다.
▲ 동서양의 인쇄술 왼쪽은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15세기 중반에 간행된 성서의 한 쪽이고, 오른쪽은 그보다 700여 년 앞서 중국에서 목판인쇄로 간행된 서적의 한 쪽이다. 인쇄술은 동양에서 먼저 발명되었으나 꽃을 피운 것은 서양에서였다. 동양에서 서적은 지식을 보급하기보다 보관하는 매체였으나 서양에서는 반대였다. 특히 서양의 인쇄술이 빛을 보게 된 것은 종교개혁으로 일반 민중에게 성서를 보급하자는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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