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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5부 꽃 - 2장 신에게서 인간으로, 부활인가, 개화인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5부 꽃 - 2장 신에게서 인간으로, 부활인가, 개화인가

건방진방랑자 2022. 1. 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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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신에게서 인간으로

 

 

부활인가, 개화인가

 

 

르네상스(Renaissance)는 프랑스어로 부활이라는 뜻이다. 무엇이 부활했다는 것일까? 그리스의 고전 문화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다. 언제 어디서?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이 점차 북쪽으로 퍼져나가 16세기 무렵에는 서유럽 전체가 르네상스 문화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럼 르네상스의 역사적인 의의는 무엇일까? 르네상스는 서유럽이 1000년에 달하는 오랜 중세를 끝내고 근대사회로 접어드는 이행기라는 성격을 지닌다. 학자에 따라서는 르네상스를 중세의 끝자락에 놓기도 하고 근대의 출발점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이상이 르네상스에 관한 사전적인 지식이자 동시에 박제화된 지식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설명보다 더 많은 의문을 안겨준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르네상스가 왜 프랑스어로 불릴까?”하는 사소한 의문도 있지만, “왜 하필 2000년 전의 그리스 고전문화가 갑자기 14세기에 부활한 것일까?”라든가, “대체 무슨 이행기가 200년씩이나 될까?” 등의 중대한 의문도 있다.

 

우선 르네상스가 프랑스어인 이유는 간단하다. 후대에 프랑스 학자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17세기 말에 프랑스의 사전 편찬자들은 르네상스라는 항목을 설정하고 새로운 시대의 문화와 예술에 관해 서술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19세기의 프랑스 역사학자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는 처음으로 시대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르네상스라는 말을 썼다. 그 덕분에 르네상스는 문화와 예술을 넘어 14~16세기 서유럽의 지성 운동을 총괄하는 개념으로 승격되었다사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르네상스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당시 피렌체의 화가이자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는 자신의 저서인 예술가 열전에서 르네상스와 같은 뜻의 리나스키타(rinascita)’라는 말을 여러 차례 사용했다. 만약 이탈리아가 프랑스처럼 일찍 국민국가를 이루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르네상스 대신 리나스키타라는 말을 썼을 게 틀림없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라는 개화(開花)’를 이룬 주인공이었으면서도 그 열매는 따지 못한 셈이다.

 

둘째 의문은 르네상스의 본질과 관련된 것이지만 사실은 우문이다. 그리스 고전 문화는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다가 느닷없이 14세기 이탈리아에서 부활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서양의 역사를 씨앗(오리엔트), 뿌리(그리스와 로마), 줄기(중세)로 살펴보았다. 씨앗과 뿌리, 줄기는 같은 식물의 성장 단계들이므로 연속적이고 순차적이다. 이 연속선상에서 말한다면, 르네상스(아울러 대항해시대, 종교개혁)는 중세의 줄기가 자랄 대로 자라 드디어 꽃을 피운 게 된다.

 

역사에서 비약이란 없다. 그리스가 오리엔트의 문명을 이어받지 않았다면 서양 문명의 뿌리는 없었을 테고, 뿌리 없는 줄기와 꽃이 없듯이 중세와 르네상스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르네상스를 개화로 규정하지 않고 부활로 규정한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차라리 르네상스 대신 그냥 새로운 시대라고 부르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역사학자들의 몫으로 넘기고 르네상스라는 이름을 그냥 사용하도록 하자.

 

그러면 셋째 의문은 저절로 해결된다. 200년씩이나 오래가는 이행기란 없다. 그 정도의 기간이라면 그 자체로 별개의 시대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내용을 따져보아도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와 근대 사이에 낀 이행기가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천천히 뿌리와 줄기를 키워오던 서양 문명이라는 나무가 바야흐로 최초의 결실인 꽃을 피우는 시기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는 어떤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하나의 시대다.

 

 

물론 르네상스를 고전 문화의 부활로 보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바로 중세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중세를 부정하면 그리스 문화로 직접 연결될 수 있다(로마도 끼어 있지만 로마는 문화적 측면보다 국가 체제와 사회제도의 측면에서 서구 문명의 뿌리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와 대립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떤 대립일까? 중세를 지배한 하나의 커다란 특성, 즉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점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분권화된 중세 사회에 전반적인 통합성을 부여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였다. 그러나 중세의 해체기로 접어들면서 그리스도교의 통합력은 점차 약해진다. 여기에는 종교 외적인 면과 종교 내적인 면이 있다. 종교의 바깥에서는 어지간한 힘을 갖춘 세속의 집단(왕국)들이 생겨나고 자라났다. 강력한 왕권이 들어설 수 있는 지역에서는 국민국가의 원형들이 생겨났고(프랑스, 영국, 에스파냐, 북유럽), 그럴 수 없는 지역에서는 소규모의 영방국가들이 발달했으며(독일), 그럴 여건조차 갖추지 못한 지역에서는 자치도시들이 성장했다(플랑드르와 북이탈리아). 이렇게 세속의 사회들이 발달하는 눈부신 속도는 종교로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종교 안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거셌다. 사회의 복합화가 진행될 수록 사람들은 지식을 쌓아갔고, 이성의 힘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신에게 종속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이며 행복을 구하는 길이었으나 이제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살아가고 싶어 했다. 심지어 신앙마저도 이성적으로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 스콜라 철학자들), 비록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는 여전히 힘을 잃지 않았지만 기존의 신앙으로는 사람들의 커진 머리를 수용하기 어려웠다(나중에 보겠지만 여기에 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겹쳐 종교개혁이 일어난다).

 

소수의 선각자들이 처음으로 느낀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는 금세 모든 사람에게 퍼져나갔다. 이제 사람들은 다음 두 가지 판단 중 하나를 개인적으로 선택해야 했다. 첫째,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는 것은 이제 신이 아니다. 둘째, 신께서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과정은 알고 보니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앞의 것은 신의 부정이고, 뒤의 것은 앎과 이성을 통한 신앙으로 이어진다. 중세가 해체되고 있는 와중에 신을 정면으로 부정하기란 어려웠다. 따라서 많은 사람은 뒤의 입장을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이성으로 신을 규정하는 르네상스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 첫 단추는 문학에서 꿰었다.

 

 

누드의 부활 르네상스는 고전 문화의 부활이지만 중세에 대한 거부는 아니다. 오히려 르네상스는 서양 문명의 뿌리(그리스-로마)와 줄기(로마-게르만)를 충실히 이어받아 꽃을 피운 시기로 보아야 한다. 위의 세 그림은 왼쪽부터 차례로 고전,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 미의 세 여신을 그린 작품들이다. 누드화가 부활한 것은 고전 문화를 이어받은 것이지만, 여성들의 표정은 중세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부활인가, 개화인가

문학이 문을 열다

사실성에 눈뜨다

작은 로마가 만든 르네상스

알프스를 넘은 르네상스

인간 정신의 깨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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