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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5부 꽃 - 2장 신에게서 인간으로, 알프스를 넘은 르네상스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5부 꽃 - 2장 신에게서 인간으로, 알프스를 넘은 르네상스

건방진방랑자 2022. 1. 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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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스를 넘은 르네상스

 

 

북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이 르네상스를 발전시킨 비옥한 토양이었다면, 북방(알프스 북쪽을 가리킨다)에도 그에 못지않은 환경이 또한 군데 있었다. 바로 플랑드르였다. 이곳은 교황권과 황제권이 대립을 빚은 북이탈리아의 독특한 정치 상황만 제외하면 북이탈리아와 여러모로 닮은 지역이었다. 북해 무역을 바탕으로 쌓은 한자동맹 도시들은 재력에서 북이탈리아에 뒤지지 않았으며, 강력한 지역적 통일 권력이 없다는 점도 비슷했다.

 

플랑드르에서 피렌체의 조토와 같은 선구자의 역할을 한 화가는 후베르트 반에이크(Hubert van Eyck, 1370년경~1426)와 얀 반에이크(Jan van Eyck, 1395년간~1441) 형제였다. 그들은 유화 기법르네상스 시대 이전, 수천 년 동안 화가들이 사용한 회화 기법은 물감을 물에 섞어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기법이었다. 교회의 벽화나 제단화 등이 대부분 프레스코화인데, 건물과 한 몸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색이 바래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프레스코를 대체해 템페라 기법이 발명되었다. 이 기법은 물 대신 다른 물질로 용액을 만들었는데, 주로 달걀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물감이 금세 말라버린다는 단점이 있어 화가들이 제 솜씨를 충분히 발휘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유화 기법이었다. 유화는 기름을 용액으로 쓰기 때문에 잘 굳지 않으며 한번 굳으면 쉽게 변색하지 않았다. 유화 기법을 창시한 반에이크 형제가 없었다면 오늘날에까지 전하는 르네상스 작품들의 수는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을 처음으로 도입해 후대의 미술사가들에게서 북방 르네상스의 창시자라는 영예로운 평가를 얻었다. 어쩌면 그들이 유화라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한 것은 무대가 플랑드르이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북이탈리아와 달리 플랑드르 화가들에게는 전통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전통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좋은 터전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새로운 것을 더욱 밀고 나갈 때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플랑드르 화가들은 북이탈리아 화가들처럼 그리스 고전 문화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양식을 실험할 수 있었다.

 

자화상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발전시킨 것과, 자연의 풍경과 인물을 함께 배치하는 새로운 시도는 바로 그 산물이다. 또한 오늘날의 SF 영화를 보는 듯한 기괴하고 음울한 작품으로 유명한 보스(Hieronymus Bosch, 1450년경~1516)라든가, 두 차례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온 뒤 이탈리아의 양식을 과감히 취사선택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도 플랑드르가 아니었다면 탄생할 수 없는 화가들이다.

 

전통과 고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플랑드르의 조건은 새로운 미술 양식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문주의도 가능케 했다. 북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 고전 문화를 부활시키고 모방하는 데 열중했지만, 플랑드르에서는 그런 열정으로부터 비교적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그리스 사상과 그리스도교를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피렌체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성과는 알프스를 넘으면서 더 근원적인 형태를 취했다. 더 근원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원리에 더 충실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교황이 있는 이탈리아를 제쳐두고 그게 가능할까? 하지만 오히려 교황이 없기에 더 가능했다.

 

 

참신한 소재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라 해도 플랑드르 화가들은 소재를 종교나 고전으로 제한하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했다. 그림은 얀 반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인데, 성공한 부르주아 은행가 부부의 초상이다. 창턱에 놓인 한 개의 조그만 오렌지는 당시 북유럽에서는 처음 수입되기 시작한 일종의 사치품이었다.

 

 

교황이 지배하는 이탈리아에서는 성서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리 개방적인 르네상스 학자라 해도 적어도 성서에 관한 한 교황청의 해석에 의문을 던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플랑드르의 촌 학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았고, 따라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기에 성서 자체에 훨씬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게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다. 그 대표자는 플랑드르의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였다.

 

에라스뮈스는 기존의 권위 있는 해석을 거부하고, 성서에 바탕을 둔 소박한 신앙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특히 이탈리아보다 더 타락한 북방의 교회와 성직자 들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살아 있는 사례였다. 철학자나 신학자, 성직자 등 지식인의 위선을 날카롭게 풍자한 우신 예찬(Moriae encomium)은 그런 토대에서 나온 작품이다. 이탈리아였더라면 혹시 교황이 보낸 자객에게 칼을 맞았을지도 모르지만, 에라스뮈스는 그런 대담한 사상을 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약 북방의 매력적인 지식인으로 떠오르며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교회와 성직자를 비판하고서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마지막이었다. 곧이어 다가오는 종교개혁의 폭풍 속에서 수없는 개혁 사상가가 탄압을 받게 되니까.

 

알프스를 넘어온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플랑드르만이 아니라 서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지만, 플랑드르만큼 르네상스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한 지역은 없었다. 전통의 강국인 프랑스와 영국은 서유럽의 선두 주자였던 만큼 체제가 이미 굳어져 있어 새롭고 창조적인 정신이 스며들 여지가 적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의 물결은 프랑스를 우회해 동쪽으로는 플랑드르로, 서쪽으로는 에스파냐로 흘러들었다. 마침 에스파냐는 대항해시대에 축적된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문화 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키워가고 있었다. 르네상스 미술의 종합판이라 할 초상화의 황제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Velazquez, 1599~1660)가 에스파냐의 궁정에서 활동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정신이 가장 큰 변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곳은 독일 지역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발생하고 플랑드르에서 전승한 르네상스의 정신은 당시 교회의 모순이 집적된 곳, 심지어 교황청의 젖소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으로 불리던 독일의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르네상스식 기념사진 사진이 없던 시대에 그림은 예술품이라기보다 실용품에 가까웠다. 군주나 주교 들은 결혼하거나 자식을 낳았을 때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휘하에 거느린 화가들에게 초상화를 부탁하곤 했다. 그림은 에스파냐의 궁정화가로 명성을 날린 벨라스케스가 다섯 살짜리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을 그린 <시녀들>이다. 왕명을 받고 그렸을 텐데, 벨라스케스는 왼쪽 귀퉁이에 붓을 든 자기 모습을 그려넣어 자신의 기념사진으로도 만들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부활인가, 개화인가

문학이 문을 열다

사실성에 눈뜨다

작은 로마가 만든 르네상스

알프스를 넘은 르네상스

인간 정신의 깨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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