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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5부 꽃 - 2장 신에게서 인간으로, ‘작은 로마’가 만든 르네상스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5부 꽃 - 2장 신에게서 인간으로, ‘작은 로마’가 만든 르네상스

건방진방랑자 2022. 1. 9.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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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로마가 만든 르네상스

 

 

조토가 새롭게 불을 지핀 사실성의 불꽃은 15~16세기 마사초, 보티첼리 등의 피렌체 화가들에게 계승되었다. 이 과정에서 회화의 소재는 성서에 머물지 않고 더욱 폭을 넓혀 그리스 신화에까지 확대되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고전 문화의 부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 불꽃을 이어받아 커다란 횃불로 만든 예술가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라파엘로(Raffello Sanzio, 1483~1520)였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죄악시되던 인간의 신체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냈고, 성서와 신화의 내용을 빌려 인간의 모습을 표현했다르네상스 시대에 누드화가 부활한 것도 그 덕분이다. 그리스도교는 물론 이슬람교에서도, 나아가 현대의 거의 모든 종교에서도 신체의 노출은 금기시되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로 간주한다. 특히 중세의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의 원죄설에 따라 인간의 신체 자체에 죄악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나체를 그린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르네상스 화가들은 성서의 내용을 소재로 하면서도 과감하게 나체의 인물들을 작품 속에 도입했다. 이렇게 나체를 그리기 위해서는 골격이나 근육 등 인간 신체의 구조에 관해 상세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르네상스 화가들은 시신을 해부하면서 신체에 대해 연구했는데, 그 성과는 생물학과 의학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심지어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은 한밤중에 공동묘지에까지 가서 시신을 가져다가 해부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토에서 라파엘로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를 이끈 화가들, 나아가 단테와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 작가들까지도 거의 대부분 피렌체에서 태어났거나 거기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당시 피렌체의 인구는 기껏해야 9만 명 정도였는데, 여기에는 뛰어난 예술가를 키워내는 마법의 약이라도 있었던 걸까?

 

피렌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일부러 만들려 해도 만들 수 없고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르네상스 직전에 번영기를 맞이했고 르네상스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쇠퇴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북이탈리아에 자치도시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12세기에 피렌체는 자치도시가 되어 모직물 산업과 상업으로 크게 번영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여느 북이탈리아 도시들처럼 피렌체 역시 교황파와 황제파로 분열되어 늘 정정이 불안했다. 13세기에 교황파가 대상인들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의 권력을 잡은 것은 단테에게는 추방의 고통을 가져다 주었지만, 피렌체를 위해서는 다행이었다. 시의 권력을 장악하고 온갖 부패를 저지르고 있던 봉건 귀족들이 물러나게 된 것이다.

 

새로 정권을 잡은 상인들은 자신들의 상업 활동을 위해 가장 유리한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그것은 바로 공화정이었다. 옛 로마, 제국 시대 이전 원로원이 다스리던 초기 로마의 영광이 피렌체에서 축소판으로 부활했다. ‘작은 로마피렌체가 실제의 로마를 닮아간 것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상인들의 공화정보다 더 큰 변화를 바랐던 시내의 수공업자들과 시 주변의 농민들이 불만을 터뜨리자 공화정 정부는 다시 옛 로마의 해결책으로 대응했다. 농노를 해방하고 평민들을 정치에 참여시킨 것이다. 그러나 옛 로마에서도 공화정이 무르익은 뒤에는 결국 제정으로 향했듯이, 공화정으로 봉건제의 폐단을 제거한 피렌체에서도 점차 강력한 권력체가 필요해졌다. 시대의 추세는 강력한 왕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작은 규모의 도시조차 공화정으로는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추세에 따라 1458년 대금융가인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는 쿠데타로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오르는데, 이것이 메디치 가문의 시작이다.

 

 

적어도 형식상 피렌체는 공화국이었으므로 코시모는 왕이 아니었으나 국부(國父)’의 칭호를 받고 사실상의 왕으로 군림했다. 그냥 피렌체의 정치적 지배 세력으로만 있었다면 메디치 가문은 후대에까지 유명세를 떨치지 않았을 것이다. 메디치는 튼튼한 재력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적극 지원했다. 특히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Lorenzo de’ Medici, 1449~1492)는 그 자신이 시인으로 활동할 정도로 예술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피렌체 르네상스의 발달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피렌체가 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르자 북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은 잇달아 피렌체를 모방하기 시작했으며, 르네상스의 물결은 순식간에 이 지역 전체로 퍼져나갔다피렌체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 영향을 받아 베네치아에서도 르네상스 미술이 발달했는데, 이들을 베네치아 화파라고 부른다. 당시 베네치아는 지중해 무역의 선두주자로서 경제와 정치에서 자치도시의 수준을 넘어섰다. 그런 탓에 미술에서도 피렌체처럼 주지적 경향이 적고 그 대신 감각적이고 화려한 색채 미술이 발달했다(이는 베네치아가 비잔티움과 친화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풍경을 바탕으로 인물을 배치하는 혁신적인 구도를 선보인 조르조네(Giorgione, 1477년경~1510)와 신화의 인물을 관능적인 색채로 그려낸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년경~ 1576)가 유명하다.

 

이렇듯 전제군주가 예술을 애호한 데서 서양 예술의 한 가지 특성이 생겨났다(예술상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예술을 둘러싼 여건의 특성이라 해야겠지만), 군주가 예술가들을 식객처럼 거느리고 지원하자 자연히 예술가들은 군주의 가문과 궁실을 중요한 소재의 하나로 삼게 되었다(이들을 궁정 예술가라고 불렀다). 1839년 프랑스에서 사진이 발명되기 전까지 인물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방법은 그림뿐이었다. 따라서 화가들은 자신이 모시는 군주의 생일이라든가, 군주가 아들을 낳았을 때 군주의 명령을 받아 기념사진을 찍듯이 인물화를 그렸다. 이리하여 초상화의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다.

 

 

왕국 같은 공화국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와 베네치아 등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은 형식적으로 공화국을 취했지만, 실상은 지배 가문이 왕처럼 군림하는 군주국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면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은 피렌체의 전경인데, 한가운데에는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전해지는 르네상스 시대의 명화들 중 상당수는 원래 순수 예술 작품이 아니라 실용적이고 상업적인 작품이었던 셈이다. 당시에는 미술 시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있다 해도 미술가들을 먹여 살릴 만큼 크지 않았다. 오늘날처럼 미술가가 작품의 판매로 생활할 수 있으려면 9만 명의 피렌체 인구가 각 가정마다 작품을 하나씩은 구매해주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의 예술가들은 내적 동기에 의해서 작품 활동을 하기보다 주로 다른 사람의 주문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그런 점에서 동양 미술이 발달한 과정은 사뭇 대조적이다. 동양에서도 관청에 속한 화원들은 왕이나 귀족의 명령을 받아 영정을 그렸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문인들이 여가 활동으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고, 또 그런 작품들이 후대에 명화로 남았다는 점에서 서양과는 다르다.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작품 판매의 의미가 아니라, 권력자가 예술가의 기능을 사주는 형식이었다. 당시의 권력자라면 단연 도시의 지배자인 군주였으나 교회도 그에 못지않은 최고의 주문자였다. 교회를 새로 지으면 건축가를 비롯해 제단화와 벽화를 그릴 화가, 조각상을 만들어줄 조각가 등이 필요했다. 교회는 말하자면 오늘날 영화 산업처럼 종합예술의 공간이었다. 교회의 의뢰를 받은 예술가는 그것을 생업 활동이자 자기 솜씨를 발휘해 명성을 드높일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중에서 보수도 최고이고 최고의 영예도 누릴 수 있는 기회는 교황청이 의뢰하는 경우였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라파엘로의 <아테네의 학당은 바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명화다그런 면에서 보면 르네상스 미술이 발전한 것은 서양 역사 특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해준다. 인구 대다수가 먹고살기 급급한 시대에 예술을 후원할 수 있는 계층은 귀족과 부자였다.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귀족과 부자가 있지만 그들이 언제나 예술과 문화의 창달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동양의 지배층은 늘 정치권력에 굶주려 있어 사회의 소프트웨어를 발달시키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시대는 더 나중이지만 서양의 근대 음악이 발달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바흐(Johanm Sebastian Bach, 1685~1750),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등 근대 음악의 창시자와 거장들은 모두 궁정 음악가로 일하면서 모시는 군주나 교회의 의뢰를 받아 음악들을 작곡했다. 이를테면 군주가 자식을 낳았을 때 작곡한 축가, 군주가 죽었을 때 작곡한 진혼가 들이 오늘날 걸작으로 남게 된 것이다(미술이나 음악에서 이른바 순수한 예술적 동기가 중요해지는 것은, 작품을 판매하는 것으로도 예술가가 먹고살 수 있게 되는 19세기부터의 일이다). 다만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한창일 무렵 미술에 비해 음악은 아직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음악의 르네상스17세기 독일 지역에서 태동하게 된다.

 

 

예술 산업 흔히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을 구분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지금은 고전으로 전해지는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작품들도 당대에는 모두 상업 예술이었다. 르네상스 후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상업화의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부유층을 위해 그림에서와 같은 전문 화랑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부활인가, 개화인가

문학이 문을 열다

사실성에 눈뜨다

작은 로마가 만든 르네상스

알프스를 넘은 르네상스

인간 정신의 깨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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