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이 살린 목숨
“최영애 선생님께 중국어를 들었어요.”
어딜 가나 한국여행객들과 부딪치게 마련이다. 연대 인문학부 4학년의 여학생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렇게도 남루한 여행객 복장을 하고 있는 나를 어둠 속에서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참 신기하게 느껴진다.
“도올서원 10림입니다.”
남녀 커플로 온 젊은이들이 또 인사한다. 그 남학생이 도올서원에서 나에게 배웠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기억이 났다. 나는 그동안 도올서원에서 한 3천여 명의 제자들을 키워내었다. 요즈음 내 인생의 보람이란 이들에게 거는 기대밖에 없다. 학문을 하는 이들은 모름지기 젊은이들의 품성을 길러주고 지식을 전수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마하보디 스투파(stūpa)에서 돌아오는 길에 참혹한 풍경이 눈에 띄었다. 불교순례객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이곳에는 인도거지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사는 것이다. 그들이 길거리, 차거운 돌바닥 위에서 그냥 잔다. 거적을 뒤집어쓰고 앉은 채 누운 채 옹기종기 모여 웅크리고 기대있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영화 『벤허』에 나오는 문둥병자들의 모습 같았다. 실제로 나병환자들이 많았다.
수자타호텔을 들어서는데 또 일군의 한국 대학생들이 인사를 한다. 동국대 영문과 다닌다는 검은 얼굴에 키가 큰 여학생, 그리고 보디가드처럼 붙어 다니는 땅땅한 남자친구, 그리고 까무잡잡한 인도인처럼 생긴 남학생…… 그런데 그 인도인처럼 생긴 남학생은 한국말을 썩 잘하는데 알고 보니 진짜 인도사람이었다. 이름을 ‘반디’라 했는데 전북대학교 경영학과 1학년에 재학중이라고 했다. 바로 보드가야사람인데 보드베가스(‘라스베가스’에서 ‘라스’를 깨달음을 의미하는 ‘보드’로 바꾼 것이다)라는 한국음식점을 경영한다는 것이다. 군침이 돌았다. 그렇지 않아도 인도음식에 좀 질력이 나서 남군 보고 이 근처 한국절 좀 찾아보라고 했던 것이다. 남군이 한국절을 갔다와서는 하는 말이 스님도 안 계시고 관광객 몇 명만 유숙하고 있는데 한국음식이 다 떨어졌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보드베가스가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반디군에게 물어보니 경찰서 옆에 있는 싸인만 따라 들어오면 자기집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식당이라고 해봤자 자기집 옥상이라는 것이다. 한국음식이 있냐고 하니까 자기가 한국에서 살면서 식품재료를 여기 사는 동생들에게 부쳐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라면이 있냐고 물었더니, 야속하게도 어제 한국 대학생들이 몰려와서 다 먹어치웠다는 것이다. 하룻밤의 간발의 차이로 우리는 한국라면의 카랑카랑한 맛을 음미할 절호의 기회로부터 탈락하고 만 것이다.
나는 대학생 때 재미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철학과 친구가 지독하게 염세비관을 해서 자살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숙방에 앉아 약을 사다놓고 죽으려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염라대왕한테 가면 라면을 못 먹게 될 것 같아서 너무 억울하더라는 것이다. 순간 군침이 돌았다. 그래서 라면이나 실컷 먹고나 죽자 하곤 라면을 끓여먹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죽어 라면 못 먹는 것보다, 라면이나 먹으면서 사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꾸며낸 우화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다. 한국인의 라면중독현상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나는 평소 라면을 먹지 않는다. 라면은 결코 권장할 만한 음식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때 어느 순간엔가 못 견디게 라면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인도에서의 나의 느낌이 그러했다. 반디는 김치국과 미역국은 끓여줄 수 있다고 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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