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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2일차 - 서양의 이성과 불교의 이성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2일차 - 서양의 이성과 불교의 이성

건방진방랑자 2022. 3. 2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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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이성과 불교의 이성

 

 

나의 이야기를 바톤받아 달라이라마는 이성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하였다.

 

이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죄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성에 관한 모든 논의는 그 논의가 되고 있는 맥락이라는 어떤 삶의 장을 떠나서 이야기될 수가 없습니다. 이성은 절대적으로 논의되어서는 아니되며 반드시 그것은 어떤 필드(Field) 속에서의 이성에 관한 논의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성 자체가 천수관음처럼 무한히 다른 모습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이성을 너무 수학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으며, 그리고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을 지나치게 물리적 세계에 한정시켰습니다. 그러니까 계산이 가능하고 진ㆍ위의 분별이 정확한 그런 물리적 세계만을 이성의 영역으로 설정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수학적ㆍ연역적 사유에 의하여 개발한 물리적 세계의 변혁은 참으로 놀라울 만한 문명의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성 자체가 매우 폭력적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속에 내재하는 자연을 소외시켰으며 인간과 신의 긴장감을 대적적으로 유지시켰습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이성의 가장 큰 문제는 마음의 계산적 기능을 말하는 주관적 이성(Subjective Reason)이든지, 전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로서의 객관적 이성(Objective Reason)이든지 모두 실체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실체화된 이성의 역사는 계속 다른 실체와 대적하거나 대치되거나 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런 방식의 이성의 이해는 끊임없는 대립과 기만과 극복, 이런 투쟁의 자취만을 남깁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이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체화될 수 없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마음에 관한 논의입니다. 마음은 식()이며, 식은 인간의 의식작용의 총체적 측면들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성도 인간의 마음의 다른 기능과의 단절 속에서 논의될 수는 없습니다. 이성 자체가 감정이나 본능, 신체적 단련이나 질서의 감각, 그리고 윤리적 가치등의 복합적 측면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실체로서가 아니라 주관ㆍ객관을 통일하는 장의 끊임없는 관계로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한편으로 불교에 있어서의 이성적 탐색은 반드시 자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성적 깨달음의 궁극에는 모든 것은 결국 연기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존재며 실체성을 가질 수 없다고 하는 공의 체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의 체험은 이성적 자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이성적 자각의 절대적 가치가 따로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비의 실천입니다. 즉 이성이란 연역적인 사유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곧 감정의 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라는 존재에 있어서 이성과 감정을 양분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성적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무한한 이타(infinite altruism)의 자비행의 실천을 위한 것입니다. 자비야말로 불교의 최상의 과제인 것입니다. 서양의 이성주의나 과학주의는 바로 이러한 자비의 가치를 배제시켰던 것입니다. 과학적 법칙을 왜 발견합니까?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비를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종교인의 호소나 독단이 아닙니다.

 

과학 그 자체가 이미 가치를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가치의 본질은 보살의 정신이 구현하려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이 같이 공영하고 같이 구원을 얻는 사회를 실현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얄팍한 의무감이나 규범적 도덕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아의 지혜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허망한 자아의 주체성이 상실되고 진실한 실상으로 전환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반야의 실천인 것입니다. 불교의 이성은 반야에 포괄되는 것이며 반야는 실천이며 실천은 곧 행위입니다. 이성적 깨달음이 곧 자비의 행()이지요.”

 

나는 현대사회적 주제를 불교이론과 관련시켜 자신있게 말하는 그의 정연한 논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성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정말 성하께서 말씀하시는 이성에 대한 논의가 보다 본질적으로 서양의 사회과학을 논의하는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들의 레토릭의 편견을 떠나 성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의 단순한 논리뿐만 아니라 거기에 묻어있는 문화적ㆍ심미적ㆍ윤리적 분위기랄까, 냄새 같은 것까지도 좀 깊게 이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누가 보든지 가장 이성적인 깨달음을 많이 얻은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분명히 매우 강렬한 이성의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순간순간 매우 파괴적인 감정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이성적으로 이래서는 아니되겠다는 감정의 행위 속으로 저를 휘몰아 버리곤 합니다. 참 가련한 존재이구나 하고 나 자신을 관조하게 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나를 짓밟으려 하는 자들을 편안히 용서하지 못하고

 

이 때 달라이라마는 지긋이 나를 쳐다 보다가 내 손을 따스히 잡았다.

 

도올선생님! 인간이라는 게 본시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너무도 거대한 우주입니다. 너무도 복합적이지요. 저도 어느날에는 무한한 확신이 들어서 매우 야심적인 인간이 됩니다. 그러다가 다음날에는 다른 생각이 들면서 풀이 죽곤합니다. 그러면 매우 겸손해지고 매우 부드러워집니다. 이런 감정의 기복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힘내십시요! 한국사람들은 무엇이든 잘 해내는 패기(覇氣)로 유명한 민족이 아닙니까?”

 

그는 또 쾌활하게 웃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는 따라 웃지를 못했다. 그의 그러한 인간적 태도가 나를 너무도 감동시켰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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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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