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인간, 합리성, 불교
나는 몇년 전에 읽은 애튼보로의 『식물의 사생활』이라는 책이 생각났다【David Attenborough, The Private Life of Plants, Princeton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 과학세대 옮김, 『식물의 사생활』, 서울 : 까치, 1995.】. 식물의 행태에 관한 수준높은 보고서였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윤회문제로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오늘 나와 달라이라마의 예정된 시간은 매우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달라이라마의 대답은 매우 명료했다. 그것은 이미 오랜 논전을 거쳐 성숙된 정연한 이론체계일 것이다. 이제 나는 감잡기 어려운 형이상학의 세계로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형이하학의 세계로의 착륙을 시도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좀 더 구체적인 현실문제에 관해 몇 말씀만 여쭙고 싶습니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근대사회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티벹도 아무리 불교문화 전통 속의 사회이지만 보편적인 근대사회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대사회의 핵심은 근대적 인간(Modern Man)이며, 근대적 인간의 핵심은 합리성(Rationality)이며, 합리성의 핵심은 이성(Reason)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적 사회의 건설 그 자체가 서구에 있어서조차도 하나의 위기상황에 봉착해 있습니다. 오늘날 이성이라는 것 자체가 과거처럼 인간이 그 실현에 참여해야할 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임의적으로 설정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적합성을 따지는 형식적ㆍ기술적 ‘도구’(Instrumental Reason)로 전락해버렸다는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의 비판이론(Critical Theory)으로부터 시작하여【Max Horkheimer and Theodor W. Adorno, Dialectic of Enlightenment, New York : Seabury, 1972. Max Horkheimer, Critical Theory, New York : Seabury, 1972. Max Horkheimer, Eclipse of Reason, New York : Seabury, 1974.】 이성 그 자체가 제기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mas, 1929~)같은 사상가는 이성 그 자체를 해체시키는 것 보다는 이성의 다변화로 인해 나타나는 생활세계 속에서 새롭게 소통의 장을 건설함으로써 근대가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보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근대사회 그 자체가 하나의 미완성의 프로젝트라는 것이지요【Jürgen Habermas, Theory and Practice, Boston : Beacon, 1973. Jürgen Habermas, Knowledge and Human Interests, Boston : Beacon, 1971. Habermas and the Unfinished Project of Modernity, ed. by Maurizio Passerin d'Entrèves and Seyla Benhabib, Cambridge : the MIT Press, 1997.】.”
“저는 말씀하시는 그런 문제에 관한 서양학계의 구체적 논의의 맥락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합리성(Rationality)의 문제는 비단 서양 근대사회의 특수담론이 아니라 인류사의 보편적 과제상황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합리적 인간의 과제는 영원히 다각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문제이며, 근대라고 하는 산업사회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에 관한 졸렬한 논의의 대부분이 이성을 초월적 신에 대하여 대자적으로(antithetically) 설정하는 데서 유래되는 것입니다. 붓다는 이미 이천오백년전에 신을 부정했습니다. 그 이상의 강력한 합리성의 예시가 어디 있겠습니까? 불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합리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서양은 이성이라는 것을 신에 대항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자연을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성은 도구화되어 버리고만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이성은 신을 비실체화시켰으며 자연을 나의 존재내부로 끌어들였으며 그 모든 것을 무분별의 자비로 감쌌던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나의 주관적 정신의 프로젝션(투사)으로서의 대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서양식의 관념론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나가르쥬나도 그러한 유식론의 관념성을 철저히 비판했습니다. 이성이 알아야 할 것은 사실이며 현실이며 여여(如如, tathatā)의 궁극적 실상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내 말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항상 자신의 이성과 논리를 따라 검증해보고 또 검증해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러한 자유로운 탐색과 논의와 컴뮤니케이션, 이런 개방적 마음이 바로 날란다대학(Nālandā University, 기원 후부터 서서히 형성되어 4세기~7세기경에 눈부시게 발전, 13세기 초에 무슬림침공으로 쇠락한 거대한 불교대학, 라즈기르의 북쪽 11km에 위치)의 전통이었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어떠한 도그마도 검증없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붓다가 신을 거부했다는 것, 그것부터가 강력한 합리성의 전통이라는 말씀은 정말 서구인들이 깊게 깨우쳐야 할 명언 같습니다. 서양의 가장 큰 문제는 이성이 제기한 문제들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도 너무 난해한 자기개념들의 울타리에 갇혀 담론을 일삼는다는 것입니다. 프랑크후르트학파의 논의를 일별해 보아도 아무 내용도 없는 몇마디 이야기를 가지고 그렇게 어렵게 논의하기 때문에 또 다시 그러한 담론이 사회의 생활세계로부터 격절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기하는 문제를 보편적으로 인식시키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실천없는 수의 이론적 마스타베이션을 위한 이론으로만 전락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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