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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군대 수양록, 병장 - 02.11.10(일) ‘내 탓이오’와 ‘참기’의 문제점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군대 수양록, 병장 - 02.11.10(일) ‘내 탓이오’와 ‘참기’의 문제점

건방진방랑자 2022. 7. 2.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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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이오참기의 문제점

 

021110() 매우 흐림

 

 

111, CO ATT를 뛰면서 참고 참았던 일이 드디어 터지고야 말았다. 바로 꼬바에게 개긴 일이다. 그건 예전 이등병 시기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감정이 그때 드디어 터진 것이다.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별로 좋은 감정이 아닌데, 어쨌든 그 일 때문에 느낀 게 있어 여기에 적어보고자 한다.

 

나는 어떤 일이든 내 탓으로 돌린다. 그건 비단 나 혼자만의 일에서 뿐 아니다. 단체의 일에서도 그러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내 탓이라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되게 괜찮은 방법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적절히만 할 수 있다면, 아주 괜찮은 일일 테지만 그걸 벗어났기에 심각한 문제라 하는 거다. 예를 들어 어떤 운동을 하더라도 그 운동 도중 나의 실수로 우리 편이 진다거나 하면 난 가만히 있질 못한다. 그냥 즐기면 좋으려만 스스로 자책하며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왜 다들 공동책임일 수도 있는데 왜 내 단독 책임이라고 자책을 해서 아예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일까? 이러한 내탓 의식의 심화는 나를 의기소침하게 하는 것이고 아예 도전하려는 맘조차 없앰으로써 삶은 답보 상태를 반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 탓에 나는 여전히 모든 것에 자신이 없는가 보다. 군대에 와서 정말 많이 느끼는 거지만, 적절히 남 탓을 할 수 있는 자세야말도 자신감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기초가 될 수 있음을 느낀다. 남 탓을 한다는 게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덮어 씌운다는 게 아니라 어쨌든 공동의 책임이 있기에 조금의 잘못이라도 있기에 그걸 지적해 준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을 하든 내 탓, 내 탓만은 아닌 게 되기 때문에 자신감 있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꼬바의 갈굼, 그걸 난 지금껏 당해오면서, 늘 내 탓으로만 여겨왔다.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늘 의기소침하며 자신감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행동하면 갈굼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그렇게 자기 탓이라고만 느끼며 자기를 다잡기보단 꼬바는 늘 갈굼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느끼며 그 사람탓을 하며 위안을 삼았을 뿐 자기의 잘못에 대해선 관용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녀석들은 늘 자신감에 차 있는 거겠지.

 

그래서 난 이제부터 어떤 일이 있든 내 탓으로만 돌리지 않기도 했다. 막무가내로 남탓을 하는 그러한 게 아니라 예전처럼 다 모든 것을 내 탓으로만 돌린 나머지 나를 가엾은 놈이나 부족한 놈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남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자부심이요 자신감이란다. 그런데 지금껏 그런 부분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니, 사내다운 풍모가 풍겨질 리 만무했던 거다. 이제 적절히 남의 탓으로 돌릴지 아는 그런 지혜를 몸소 실행하리라!

 

나는 어떤 일이든 맘에 안 드는 게 있으면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속에 차근차근 쌓아두는 버릇이 있었다. 순간순간 잘 이겨나가는 거 같고 그렇게 잊어버리는 거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내 맘속에 차근차근 쌓여 언젠가 돌아가지 못할 일에 터져버리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내 의식 속에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일곱번씩 일흔 번이라도 참아라하는 경전이나 성경의 글자를 내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하며 난 그러한 참음의 삶을 몸소 실천하려 노력하며 살아오기만 했다. 그땐 미처 몰랐다. 그 순간 그 화를 참으면 그게 없어지는 줄만 알았다. 참으면 끝나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참는다는 건 그때의 짜증을 가슴 깊숙이 묻는 행위였으며, 그건 고스란히 그 장본인에 대한 미움으로 자리 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진리를 나는 고스란히 모른 채 살아왔다. 아니 굳이 알고 있으면서도 의식화하지 않은 탓이겠지. 그렇기에 참는다는 것, 무조건 참는다는 것에 대해선 제고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난 이제부터 참아야 할 때와 그렇지 않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것이다. 참아야 할 때, 어떤 일도 화가 나서 그 사람이 죽도록 짜증 나서 그때 화풀이를 한다면 돌이키지 못할 정도의 사건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오히려 맘이 어느 정도 추슬러졌을 때 비로소 화를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때는 비록 서로 얼굴을 붉히며 알록달록 할지 모르지만 장시간으로 보기에는 그게 오히려 서로에게 있어 좋을 관계를 형성하는 것일 테니까. 참으며 지내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미움만이 나날이 커질 뿐이기에 아예 서로 모든 채 돌아서는 계기가 될 뿐이니깐. 차라리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될 바에야 순간 순간 얼굴을 붉히는 게 더 좋지 않은가?

 

나는 어떤 일이든 다른 이에게 시키는 걸 잘하지 못하다. ‘니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이나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와 같은 이런 고전 구절이 늘 날 지배해온 덕에, 그리고 솔직히 누군가가 나를 시키면 기분이 나쁘다는 걸 늘 느꼈기 때문에, 난 그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게 싫다고나 할까. 하지만 살다 보면 싫은 소리도 해야 될 때가 있고 무언가를 내가 조금이라도 변하기 위해서 시켜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조차도 말하지 못하니까 엄청 큰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 않다 보니 막상 해야 될 때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 아닌가! 그런 면에서 무언가를 시키면서 서로 얼굴 붉히지도 않고 서도 웃어가면서 시킬 줄 아는 아이들을 보면서 스스로 놀라기도 하다. 그건 아무래도 많이 그렇게 해보는 데서 나오는 삶의 통찰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나를 조금이라도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난 이제부터 진짜 내가 해야 할 소리가 있을 때는 그걸 서로 좋은 모습으로 말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틈틈이 싫은 소리도 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 그런 노력을 기울일 때 서로에게 더욱 좋은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껏 살펴본 것들 다 종합해보면 다 나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참는다는 거, 내 탓으로 돌린다는 거,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거, 이런 것들만을 선한 행위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다 나만의 방식으로 바꿔서 적용해 왔기에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던 거다. 그렇기에 이제 착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 원래의 선한 행위들과 나의 방식 내에서 행위들의 차이점을 알아내어 진짜 이젠 자신감 있고 활기찬 내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날을 기대하며 뚜벅뚜벅 가련다.

 

 

11월 10일 BN 연병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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