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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군대 수양록, 병장 - 02.11.10~30 제설작업, 전지 편지, 포대 경계지원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군대 수양록, 병장 - 02.11.10~30 제설작업, 전지 편지, 포대 경계지원

건방진방랑자 2022. 7. 2.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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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이오참기의 문제점

 

021110() 매우 흐림

 

 

111, CO ATT를 뛰면서 참고 참았던 일이 드디어 터지고야 말았다. 바로 꼬바에게 개긴 일이다. 그건 예전 이등병 시기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감정이 그때 드디어 터진 것이다.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별로 좋은 감정이 아닌데, 어쨌든 그 일 때문에 느낀 게 있어 여기에 적어보고자 한다.

 

나는 어떤 일이든 내 탓으로 돌린다. 그건 비단 나 혼자만의 일에서 뿐 아니다. 단체의 일에서도 그러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내 탓이라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되게 괜찮은 방법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적절히만 할 수 있다면, 아주 괜찮은 일일 테지만 그걸 벗어났기에 심각한 문제라 하는 거다. 예를 들어 어떤 운동을 하더라도 그 운동 도중 나의 실수로 우리 편이 진다거나 하면 난 가만히 있질 못한다. 그냥 즐기면 좋으려만 스스로 자책하며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왜 다들 공동책임일 수도 있는데 왜 내 단독 책임이라고 자책을 해서 아예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일까? 이러한 내탓 의식의 심화는 나를 의기소침하게 하는 것이고 아예 도전하려는 맘조차 없앰으로써 삶은 답보 상태를 반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 탓에 나는 여전히 모든 것에 자신이 없는가 보다. 군대에 와서 정말 많이 느끼는 거지만, 적절히 남 탓을 할 수 있는 자세야말도 자신감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기초가 될 수 있음을 느낀다. 남 탓을 한다는 게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덮어 씌운다는 게 아니라 어쨌든 공동의 책임이 있기에 조금의 잘못이라도 있기에 그걸 지적해 준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을 하든 내 탓, 내 탓만은 아닌 게 되기 때문에 자신감 있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꼬바의 갈굼, 그걸 난 지금껏 당해오면서, 늘 내 탓으로만 여겨왔다.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늘 의기소침하며 자신감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행동하면 갈굼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그렇게 자기 탓이라고만 느끼며 자기를 다잡기보단 꼬바는 늘 갈굼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느끼며 그 사람탓을 하며 위안을 삼았을 뿐 자기의 잘못에 대해선 관용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녀석들은 늘 자신감에 차 있는 거겠지.

 

그래서 난 이제부터 어떤 일이 있든 내 탓으로만 돌리지 않기도 했다. 막무가내로 남탓을 하는 그러한 게 아니라 예전처럼 다 모든 것을 내 탓으로만 돌린 나머지 나를 가엾은 놈이나 부족한 놈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남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자부심이요 자신감이란다. 그런데 지금껏 그런 부분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니, 사내다운 풍모가 풍겨질 리 만무했던 거다. 이제 적절히 남의 탓으로 돌릴지 아는 그런 지혜를 몸소 실행하리라!

 

나는 어떤 일이든 맘에 안 드는 게 있으면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속에 차근차근 쌓아두는 버릇이 있었다. 순간순간 잘 이겨나가는 거 같고 그렇게 잊어버리는 거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내 맘속에 차근차근 쌓여 언젠가 돌아가지 못할 일에 터져버리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내 의식 속에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일곱번씩 일흔 번이라도 참아라하는 경전이나 성경의 글자를 내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하며 난 그러한 참음의 삶을 몸소 실천하려 노력하며 살아오기만 했다. 그땐 미처 몰랐다. 그 순간 그 화를 참으면 그게 없어지는 줄만 알았다. 참으면 끝나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참는다는 건 그때의 짜증을 가슴 깊숙이 묻는 행위였으며, 그건 고스란히 그 장본인에 대한 미움으로 자리 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진리를 나는 고스란히 모른 채 살아왔다. 아니 굳이 알고 있으면서도 의식화하지 않은 탓이겠지. 그렇기에 참는다는 것, 무조건 참는다는 것에 대해선 제고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난 이제부터 참아야 할 때와 그렇지 않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것이다. 참아야 할 때, 어떤 일도 화가 나서 그 사람이 죽도록 짜증 나서 그때 화풀이를 한다면 돌이키지 못할 정도의 사건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오히려 맘이 어느 정도 추슬러졌을 때 비로소 화를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때는 비록 서로 얼굴을 붉히며 알록달록 할지 모르지만 장시간으로 보기에는 그게 오히려 서로에게 있어 좋을 관계를 형성하는 것일 테니까. 참으며 지내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미움만이 나날이 커질 뿐이기에 아예 서로 모든 채 돌아서는 계기가 될 뿐이니깐. 차라리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될 바에야 순간 순간 얼굴을 붉히는 게 더 좋지 않은가?

 

나는 어떤 일이든 다른 이에게 시키는 걸 잘하지 못하다. ‘니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이나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와 같은 이런 고전 구절이 늘 날 지배해온 덕에, 그리고 솔직히 누군가가 나를 시키면 기분이 나쁘다는 걸 늘 느꼈기 때문에, 난 그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게 싫다고나 할까. 하지만 살다 보면 싫은 소리도 해야 될 때가 있고 무언가를 내가 조금이라도 변하기 위해서 시켜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조차도 말하지 못하니까 엄청 큰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 않다 보니 막상 해야 될 때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 아닌가! 그런 면에서 무언가를 시키면서 서로 얼굴 붉히지도 않고 서도 웃어가면서 시킬 줄 아는 아이들을 보면서 스스로 놀라기도 하다. 그건 아무래도 많이 그렇게 해보는 데서 나오는 삶의 통찰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나를 조금이라도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난 이제부터 진짜 내가 해야 할 소리가 있을 때는 그걸 서로 좋은 모습으로 말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틈틈이 싫은 소리도 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 그런 노력을 기울일 때 서로에게 더욱 좋은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껏 살펴본 것들 다 종합해보면 다 나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참는다는 거, 내 탓으로 돌린다는 거,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거, 이런 것들만을 선한 행위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다 나만의 방식으로 바꿔서 적용해 왔기에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던 거다. 그렇기에 이제 착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 원래의 선한 행위들과 나의 방식 내에서 행위들의 차이점을 알아내어 진짜 이젠 자신감 있고 활기찬 내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날을 기대하며 뚜벅뚜벅 가련다.

 

 

11월 10일 BN 연병장에서

 

 

첫 눈에 그린 꿈

 

021114() 눈 내리고 추움

 

 

오늘 드디어 철원 땅에 첫눈이 왔다. 첫눈이 왔다는 게 밖이었다면 대단한 일인 양 기술되었을 것이고 서로 축하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테지만, 여긴 군대이기에 그렇게 원하지 않은 일이 터진 것에 대해 담담한 심정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며칠 전에 내리는 듯, 말듯 눈이 내렸었는데 이번엔 대지를 살짝 덮을 정도의 눈이 쌓였기에 이걸 첫 눈으로 보는 것이다.

 

새벽에 눈이 왔기에 근무자들이 주둔지 주변만 눈을 치워놨다. 그래서 우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알몸구보도 하지 않고 바로 도피안사로 싸리비를 들고 이동했다. 그렇게 도피안사부터 연대장 관사를 거쳐 수색 중대까지 눈을 치우면 되었다. 눈이 별도 오지 않았기에 대충 쓸어도 깨끗하게 보였다. 그렇게 눈을 받고 주둔지로 복귀해 밥을 먹었다.

 

알통구보를 할대, 눈 치울래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눈 치우겠다고 하고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앞으로 그렇게 눈과의 싸움을 또 하며 살 것을 생각하니까 죽을 지경이다. 이게 밖에서처럼 눈과 적당히 타협하며 재밌게 어울어지며 살아보고 싶다. 이제 막 찾아온 겨울이여! 제발 봄을 빨리 불러다오. please!

 

 

제설작업을 위해 모인 2소대원들. 

 

 

일요일의 제설작업

 

021117() 폭설

 

 

어제까진 되게 맑았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갑자기 집합하라는 것이었다. 눈이 엄청 많이 왔다. 그래서 휴일임에도 전투복을 입고 도피안사로 눈을 치우러 갔다.

 

눈은 여전히 많이 내리고 있었다. 쓸어낸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렇게 쓸다가 아침을 먹고 못할 것 같던 종교활동을 할 수는 있었다. 백설기를 추수감사예배 떡에 먹고 난 교회에서 기타를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에도 중대원들은 눈 쓸기에 분주했다.

 

나는 4시 정도 되어 내려갔는데 그제야 연병장을 쓸러 간다기에 나도 가게 되었다. ‘제설 자신(除雪 自信)’이라 외치며 열심히 작업을 했다. 눈과의 격전, 이제 시작일 뿐이다.

 

 

11월 10일 탄약고를 등지고

 

 

시영이에게 전지 편지 쓰기와 상희에게 전화하기

 

021122() 매우 맑음

 

 

오늘 시영이 생일이다. 근데 오늘따라 평소에 그러지 않았는데 날씨가 무지 포근하다. 하늘은 새파랗고 온도는 무려 17도여서 그저 전투복만 입고 다니기에도 전혀 부담감이 없는 날씨이다. 시영이 생일이라도 축복하려는 듯이 그렇게 말이다. 시영이에게 전지에디가 편지 쓰기를 시작했는데, 벌써 빼곡히 채우던 전지 편지가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그걸 시영이가 받으면 반응이 어떨까? 그렇지만 시계를 좀 보내달라고 했는데 무반응인 점은 아쉽다. 이대로 쌩까려나? 그 아이와 나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오늘은 중대 단결의 날 행사 때문에 쉬고 있다. 아싸! 이렇게만 군 생활 하자. 며칠 전에 성희에게 전화하면서 놀라운 얘길 들었다. 화를 내기에, 왜 그러냐고 알아봤더니 그게 나 때문이란다. 난 지금껏 누구에게도 그렇게 미움 살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기에 그런 어이없는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인즉은, 휴가 때 내 행동에 엄청 실망했단다. 날 그렇게 좋아하는데, 그때 이후로 실망이 너무 커서 아직도 혼란스러우니까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다신 전화하지 말란다. 날 좋아했단 얘기까진 참 좋았는데 그런 어처구니 없는 반응이 나오니까 내가 더 황당했다. 과연 어찌될까? 자욱한 혼란이 깔려 있는 암흑의 시기이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독후감

 

 

끝간 데 없이 사랑하라

 

남자랑 자고 싶어하고 그런 관계를 통해 만족을 얻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본능이 있다. 그렇기에 그런 본능 자체를 억누르며 자기의 가능성 하나 하나를 뭉게버릴 필요는 없다. 그거 예외 없이 삶의 한 방식이고 생활의 한 단면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 배가 고파서 밥을 먹었다. 그렇지만 좀 있다가 배가 고파지면 다시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이것처럼 지금 성교를 했다 해도 좀 있다가 다시 하고 싶으면 해도 되는 것, 이게 바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자 성교의 본질이다. 하지만 당연히 여기엔 제약이 따른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서 남의 음식을 빼앗아 먹을 순 없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절도가 되기에 법의 처벌을 받지 않던가. 그렇기에 적당한 노동의 대가로 맛있는 밥을 먹던지. 아니면 양해를 구하고서야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성교 또한 마찬가지다. 그냥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했다가는 성폭행범이 되기에 처벌을 받게 된다. 그렇기에 그 사람의 마음을 끌기 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도 아니면 적당한 돈을 지불하고서 하룻밤을 즐겨야 된다. 이게 바로 성교이다. 다른 사람과 맘이 맞아야만, 아니 서로가 서로를 원해야만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성교에 대해 저급하게도, 해픈 남녀에 대해 지저분하다는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

 

요새 들어 생각하게 되는 건데, 한 개인 개인마다 뭐든 정해진 양이 있다. 며칠 전에 현일이에게 사람이 하루동안 하는 말의 양은 정해져 있다. 그래서 그 양을 다 채우지 못하면 혼잣말이라도 잠꼬대라도 하면서 그 양을 채우게 된대라는 말을 들었다. 과연 그게 정말 사실일지, 아닐지는 모른다. 하지만 타당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빗대어 생각한다면 성교 또한 그러리라는 생각을 감히 조심스럽게 해본다. 나이가 들어서 바람 피는 사람들은 젊었을 때 그 양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에 늙어서 오붓하게 사는 노부부들은 젊었을 때, 그걸 어떻게든 채웠던 건 아닐까. 소망 교회 최병탁 목사님의 사모님에 대한 불평들 다 채우지 못한대서 연유했다고 하는 편도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있는 건 아닐까? 그 때문에 고등학교 때 자기에게 편지 몇 통을 보내준 그 여자를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의 변화로 예전엔 동주나 재현이를 정말 좀 안 좋게 보기도 했는데 이젠 그들이 이해가 된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 감정에 솔직했을 뿐이다. 결국 자기 인생 동안 정혜진 양이 있는데 그 양을 짊어서 채우지 못하게 되면 나이가 들어 그로 인해 욕구 불만이 쌓이게 되고 그건 고스란히 바람이란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그게 더 심할 경우 가정 파탄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 양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 양을 합리화하고자 비뚤어진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단지 그 양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삶을 윤택하게 살아가는 방법이지 않겠는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상남이는 기어코 화선씨에게 오백만원을 대출해줬단다. 여기선 그 대출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고자 함이 아니다. 단지 사랑이란 것에 대해 새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오백만원 솔직히 적은 돈이 아니다. 그건 상남이(군에 있는)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이었고, 자기의 모든 것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상남인 자기의 모든 것을 그 여자 아이에게 줬다. 솔직히 그런 극적인 사랑을 해본 적이 없기에 그 녀석의 그런 행동이 무모하리만치 헛짓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 녀석은 그렇지 않다. 자기는 지금 그 돈에 대해선, 자기의 모든 것을 준 것에 대해선 전혀 후회가 없었다. 그러면서 단지 그녀의 빚이 25백만원이라는 점과 그녀의 씀씀이가 변하지 않고 있다며 오히려 그녀를 걱정하는 것이다. “난 그녀를 정말 사랑해라고 그 녀석은 말한다. 그런 그 녀석의 행동과 그 녀석의 말을 들으면서 정말 사랑이란 단어가 적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랑’, 난 그걸 몸을 섞는 것, 같이 살아가는 것쯤으로 여기며 여태껏 살아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본성에 따른 삶의 일부분인 것이다. 그건 곧 짐승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서로의 감정과 감정이 통하고 서로의 희생이 따라야 하는 감성으로써의 사랑은 그런 게 아니다. 바로 그 예를 상님이가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에 따라 난 지금 나에게 질문을 하나 던져 본다. ‘과연 나는, 그렇게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한 그런 여자가 있었는가?’라고 말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역시나 아니올시다 이다. 난 지금껏 누구를 좋아한 적은 있어도, 그녀들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줄 만큼 열렬하게 사랑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 지금껏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그갈 사랑이라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게 바로 나의 착각이었던 셈이다.

 

내가 이렇게 누구에게든 온전한 사람을 못 주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어렸을 때 사랑의 궁핍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게 부담스럽고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그렇기에 감히 누구에게 사랑을 쉬이 주지 못한다. 그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그러는 것이다. 내가 준 사랑, 남에게 받은 사랑이 없기에 내 속에서 쥐어 짜낸 그 밑바닥까지 뽑아낸 사랑이 남에게 무시당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나의 존재 가치는 그 어디에도 없게 된다. 그럼 당연히 죽음의 문턱이 엄청이나 낮아보이게 되겠지. 그런 불안감이 늘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관심은 보일지언정 섣불리 사랑을 주진 못하는 것이다. 영 자신감이 없다. 그리고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게 너무나 서툴다. 그게 바로 나 자신의 한계인 첫 번째 이유인 것이다.

 

둘째는 크면서 어머니로부터 줄곧 들은 여자의 정조관념에 대한 내용이고 커서 마누라 때문에 가족을 등한시하면 알아서 해라는 얘기 때문이다. 어머니께로부터 들었던 정조관념은 여자의 성에 대해 담벼락을 쌓게 하였던 것으로 그건 오히려 여자에 대해 궁금증만이 쌓이게 되었다. 그런 나였기에 중1이었던 어린 시기에 손찌검이 했던 것이고 그 손찌검에 대해 늘 엄청난 죄책감에 눌려 있었던 것일 테지. 그런 정조관념의 보호자적 입장에 있을 수 있기 위해서 오히려 여자를 쉬이 대하지 못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건 곧 여자를 쉬이 대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여자 때문에 가정을 등한시하지 말라는 얘긴, 한 여자를 사귀면서도 고르는 데 있어 신중하도록 했다. 그래서 난 지금까지 어느 여자와 한 번도 사귀어 본 적이 없다. 여자를 쉬이 대할 수 없었고 내 자신이 여자에 대해 신중했기 때문에 좋아하기는 해도 사귀자고는 감히 말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어머니 영향이 두 번째 이유를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난 여자에게 쉬이 다가가지 못했고 나의 사랑을 온전히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었겠지. 그래서 상님이의 그런 확신에 찬 행동들이 너무도 맘에 든다. 그리고 그 녀석만이 이 아리따운 여자를 그렇게 어린 나이 때부터 얻을 자격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젠 나부터 그 진실한 사랑으로 여자에게 다가가야 하리라.

 

지금 가까이 지내는 여자들이 있다. 양정숙, 김시영, 백은하, 김단비가 그들이다. 정숙이는 대학교 친구로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 같이 다닐 기회가 많아 친해졌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이번에 아주 좋아한다는 식으로 통화를 했었는데, 긍정적으로 받아줬다. 내 생애에 그런 적은 손꼽을 정도이기에 나도 놀랐고 덩달아 정숙이에 대해 깍듯한 기분이 들게 된 것이다. 시영이는 이번에 휴가 나갔을 때 먼저 말 걸었기에 알게 됐다.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냥 좀 끌리는 마음이 있기에, 그리고 크로스 선교합창단 동아리 후배로 들어온다기에 더욱 관심이 가게 된 것이다. 은하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진규 동생이자 알고 지낸 지 꽤 된 아이이다, 고등학교 땐 펜팔 친구였기에 친했다가 그 후론 아니었다. 그러다가 어머님께서 우리에 대해 좋게 말씀하셨고(그러고 보면 난 어머님 말 하나에 늘 과민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보고 있으면 정말 우리 집 안에 있어 꼭 필요한 아이 같은 생각이 들어서 조금이라도 그 아이의 맘을 요동케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원래 활달한 아이라 인기도 많고 절친한 친구의 동생이기에 좀 그렇다. 김단비는 두 말할 필요 있는가? 3 수련회 때 좋은 이미지로 만나 목사인 아버지가 남아프리카로 선교활동을 떠남에 따라 그 아이도 그곳에 갔고 난 군대에 오게 됨으로 서로의 낯선 환경 속에 서로를 의지하면서 엄청 친해졌다. 하지만 너무 멀리 있다는 거리감 때문에 그게 엄청 큰 악재로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과연 누가 나와 사귀게 될 런지, 아무도 모른다. 과연 누가? 내가 누구에게 진실한 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이젠 나도 진실한 사랑을 정말 주고 싶고 이젠 받고 싶다. 나도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걸ㅠㅠ.

 

이젠 나의 모든 게 바뀌어야 할 때이다. 전환점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나의 의식을 바꾸고 이젠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 모든 관념들을 좀 명확하도록 만들어야 할 시기이다. 이젠 협소한 관점에 눌려 날 자책하며 내 주위 사람들을 원망하며 살진 않겠다. 성교에 대해서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사랑을 주는 것에 대해서도 억누를 필요도 없으며 여자에게 프로포즈 하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도 인색해할 필요도 신중해할 필요도 없다. 하루키가 소설로 전해준 메시지는 내 안에서 이런 메시지로 들렸고 상남이가 전해준 얘긴 이처럼 감상을 자아냈다.

 

 

 

 

3일간의 포대 경계지원근무

 

021127() 눈 내리고 추움

 

25()에서 오늘까지 27FA HQ α포대에 경계 지원을 나갔다. 경계 지원 자체는 환영할 만하지만 1분대만 따로 떨어져 포반과 함께 가기에 덩달아 중대장과 같이 가야 한다는 게 짜증이 난달까. 난 재현이와 함께 B2조로 위병소에선 사수를 서야 했고 탄약고에선 가만히 있어도 되었기에 위병소 근무는 짜증 그 자체였다. 역시 경험이 적다 보니 빵구도 참 많이 내서 중대장에게 갈굼 좀 당했다. B2조는 새벽에 말대기였기에 빛이 났다. 6시간씩 그렇게 꼬박꼬박 자다 보니 나중에는 더 이상 잠을 자지 못하고 깨어나는 사태까지 날 정도였다. 나름대로 심신을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근데 23일의 RCT인 것이 아쉬웠다고나 할까. 한 일주일 정도했다면 더 좋았을 것을 말이다. 이럴 때 보면 훈련이란 우리가 하는 상황이라면 짜증이 나지만 남이 하는 상황이라면 축복이 되기도 한다. 역시 모든 일은 처한 입장에 따라 확확 달라진다. 재밌는 일이다. 27FA는 시설은 별로였지만 땀까지 흘릴 정도로 보일러를 빵빵하니 틀어줘서 더욱 안락하게 느껴졌다.

 

 

11월 27일 FA정문초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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