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유격 체험기
02년 9월 16일(월)
원래 15일(日) 점심에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바뀌어서 16일(月) 7시에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다. 예정대로 갔다면 분반 복귀 후 조금의 휴식도 없이 바로 가는 강행군을 했을 터이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렇게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출발 준비를 했다. 출발 전 심정은 좀 착잡하기 했지만 그래도 3박 4일이라는 짧은 시간만 유격을 뛴다는 것과 복귀 행군이 없기에 좀 가벼운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군 생활 가운데 유적을 한 번 정도는 뛰어봐야지.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차라리 즐기리라!’라고 맘을 먹고 정신없이 유격 채비를 갖춘 다음에 바로 출발하게 되었다.
바로 독서당리를 거쳐서 유격장으로 향하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뻘짓을 좋아하는 군대이기에 20km 행군이 계획되어 있었고, 그 20km를 채우고자 삥돌아 가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정말 헛짓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어찌하겠는가, 군에선 시키면 해야만 하는 곳인 것을. 2co 수도고개를 넘고 평지를 걸어 5검 옆길로 걸어 나와 연대길을 따라 대위리 낙석을 지나 19R 1BN을 거쳐 77대 유격장으로 향하는, 총 4시간 정도 되는 길이었다. 모처럼만에 걷는 것이다 보니 되게 힘들었고 자꾸 헛짓이란 관념 때문에 정말 하기 싫을 뿐이었다.
모처럼만에 하는 행군은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열심히 걸어서 19R 1BN 뒷산에 이를 때였다. 처음 하는 행군치고 꿋꿋이 잘 걸어가던 명규가 갑자기 쓰러지는 것이었다. 곁에 있던 2P원들은 너도나도 없이 달려들어 명규가 어디가 아픈지를 걱정스러워 했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모두 힘든 그 와중에도 그렇게 걱정해줄 수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전우애가 아니던가? 다행히도 명규는 그렇게 심한 상태가 아니었다. 단지 무거운 군장 무게 때문에 어깨에 힘을 의도적으로 주다 보니, 머리에 쥐가 나서 그런 거였다. 그때 박형국 분대장은 전우애를 발산하여 명규께 군장까지 총 두 개를 짊어지고 갔다. 참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놀라운 사랑이었고 초인다운 아름다움이었다. 난 그때 내 자신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시선을 회피하느라 분주했고 설마 나한테 군장을 주지나 않겠을까 하는 도피적인 생각만이 분주했으니깐. 그런 고난의 시기를 뚫고서 유격장에 도착했다.
‘3007부대 유격 훈련장’이란 팻말을 보며 들어선 유격장은 엊그제 분반 복귀하며 잠시 들를 때 봤던 그 광경 그대로였지만, 이젠 나흘간을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리고 『까치병장』에서 봤던 ‘훈련은 무자비하게’라는 글귀가 떠오른 탓에 무지 참혹하게 느껴졌다. 그런 참담한 기분을 표현할 새도 없이 텐트에 자리를 잡았고 군장 정리를 하게 되었다.
바로 신고식과 입소식이 있었다. C/S복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연병장에 모여 입소식 준비를 했다. 칙칙한 죄수복을 방불케하는 C/S복을 입은 전사들의 신고식과 함께 공포의 여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멀찍이서 “유~격 유~격!”하며 뛰어오는 조교들의 소리가 들려 왔고 곧이어 검정 옷을 입은 교관이 단상에 올라 유력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벌써 3시가 넘은 시간이었기에, 앞으로 한 시간 정도만 하면 된다. 야~후! 근데 P.T 체조는 왜 이렇게 힘들다냐ㅠㅠ 1번에서 14번까지 두서 없이 한 번에 가르쳐 준 다음에 숙달의 시간으로 바로 들어갔는데,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하려니까 너무 힘들었고 자세를 바로 잡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하지만 교관은 “자세 또는 인원을 뒤로 열외시켜!” “하지 않는 조교들은 내가 직접 통제 한다”라고 하면서 억압했고 조교들은 옆에 붙어 “자세 제대로 안 잡습니까?” “52번 올빼미(여기선 모든 사람을 번호로 부른다) 뒤로 열외!”라는 말로 실질적 파워로 억눌렀다. 뒤로 열화되면 P.T 중 가장 힘든 8번과 9번과 11번만 반복적으로 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열외’라고 하면 무조건 좋은 거라 생각했던 우리들의 고정관념에 못을 박는 거였다. 비록 맨 앞에 있어서 열외되진 않았지만 죽어버릴 정도로 힘들긴 했다. 특히 P.T 8번을 하고 있노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빡시게 하고 있으니까 “교육 중료”란 외침이 들려왔고 첫 날 교육은 그렇게 끝났다. 끝난 후 시간은 자유시간이었기에 계곡에서 샤워를 하고 텐트에서 하는 일 없이 쉴 수 있었다. 여기서 목요일까지 나야 한다니 답답하기만 하다.
박형국 분대장의 행군 중 헌신은 정말 대단하단 생각만 들게 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조교의 감정
02년 9월 17일(화)
새벽에 지긋지긋한 무기고 근무를 서고서 침낭 안에 파묻혀 행복하게 잠에 들었다. 그런 은밀한 행복감에 날카로운 “기상!”이란 비명소리를 들으며 기상하고 있으니 비극적인 현실을 새삼 되새기게 되더라. 일어나기 정말 싫었지만, 이러한 현실을 맞이하기 싫었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인 걸 어쩌랴?
아침 점오와 식사를 마치고서 또 다시 연병장에 모였다. 어제와 똑같이 교관의 지휘 아래 맹렬히 PT를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게 정말 힘들게 지탱하며 몸을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부터 코스를 이동하며 코스를 탄다. 하지만 코스만을 탈 리는 없다. 코스로 이동하면 5분간 휴식을 하도록 한 다음에 코스 설명을 듣고 몸풀기 PT에 들어간다. 그러다 자세 나오는 사람이나 조교의 맘에 드는 사람에 한하여선 코스를 태운 뒤 잠시 쉬게 하고 그렇지 않은 인원에 한하여선 계속 P.T를 시킨다. 이렇게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들이 얼마나 미치겠던지. 그렇게 하기 싫은 P.T를 시키거나 9번 동서남북 돌기를 시킨 후에 바로 11번 발바꾸기를 시켜서 다리 힘을 모조리 빼놓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선 제대로 안 한다고 열외시키는 그런 악랄한 조교들이었다. 조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았다. 목소리 꽥꽥 질렀더니 “목소리 맘에 듭니다. 쉬운 PT 하겠습니다. 10번 실시!” 그랬던 조교가 바로 “상당히 맘에 안 듭니다. 자기 혼자만 살려고 동료를 죽이는 그런 올빼미 때문에 다 괴롭습니다. PT 8번 실시합니다!”라고 한순간에 돌변해서 말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들에게 조금도 인간다운 여유로움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도 조교의 그런 냉혹함이 못내 미웠던 거겠지. 같은 인간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만큼 화나는 게 세상에 어디서나 있을 법한 일일까?
그렇게 코스를 타면서 오늘까지 유격장에서 이틀을 보냈다.
텐트 안에서 재현이와
진을 빼놓을 대로 빼놓던 유격을 마치다
02년 9월 19일(목)
목요일 오전에는 화생방이 있었다. 솔직히 끔찍했다. 저번 주 분반에서의 그 악몽이 어렴풋이 떠올랐기에 정말이지 너무 하기 싫었다. 하지만 교육 자체는 월이었다.
방독면 쓰기, KD-1 제독 방법, 보호의 작용, 가스실 이렇게 순서로 진행했는데 PT도 하지 않고 이 과정만을 하면 되니 지난 삼일 동안의 시간에 비하면 수월했다. 하지만 공포는 가스실에서 였다. 방독면을 쓰고 들어가 정화통만 바꾸고 나온다는 걸 익히 들었기에 좀 안심하고 있던 터에 조교에게 소리를 내지 않은 게 걸려서 맨 몸으로 가스실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동주하고 3P장을 따라 들어갔는데 가스실에 하얀 연기가 보이지 않아서 그나마 안심하고 있었는데 구석에 보니 C/S 캡슐이 터져 있었다. 그제야 눈이 따가워지고 목이 아프기 시작했지만 분반의 화생방에 비하면 솔직히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군가를 크게 부르며 나왔는데 찬 공기를 맞게 되니 더 쑤시고 아프더라. 그 다음엔 방독면을 쓰고 들어갔는데 정화통을 뺀 그 잠시의 고통이 약간의 아픔이었지만 바로 정화통을 연결해서 그나마 살 만했다.
갑자기 오후가 되니 복귀행군을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출발할 때만 해도 복귀행군은 없다고 했는데 정말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을 만들지 못해 다들 안달이구나.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는 소리인가. 그것도 오후까지 교육을 받고서야 간다니 이걸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비극 중 비극이었다. 세 개의 코스를 대충 마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퇴소식을 한 다음에 바로 군장을 꾸렸다. 하지만 그렇게 엄청 기쁘진 않았다. 복귀행군을 진짜로 할 뿐더러 지금까진 걸어 다녀본 적도 없는 최장의 코스인 40km를 간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깡과 악으로 유격과 그 말로도 할 수 없는 생활을 잘 이겨낸 나인데 여기서 무너질 쏘냐.
필승의 의지를 다지고서 우린 끝도 없을 것 같던 복귀행군의 여정에 올랐다. 유격장 → 77포대 → 19R 1BN → 27포대 → 88포대 → 7R 1BN → 7R 독립중대 → 2R HQ → 5검 → 1BN으로 총 8시간 정도를 걸어서 왔다. 저녁 6시에 출발해서 새벽 4시에 도착했으니 엄청난 노력이다 할 것이다. 하지만 한 명의 낙오도 없이 우린 해냈다. 나만 해도 정말 죽을 지경이었지만 19R 1BN에서 88포대 쪽으로 빠질 때하고 대위리로 가는 길에서 7R 1BN 쪽으로 빠질 때와 2R HQ에서 연대장님 관사가 아닌 5검 쪽으로 갈 때 조금의 융통성도 없이 그렇게 정석대로 가는 대대장님이 정말이지 싫었다. 하지만 그 순간순간의 고통과 짜증, 쉴 때의 그 기쁨과 무섭게 달려들던 추위, 다시 걸을 때의 그 일어나기 싫은 마음과 어떻게든 가야 한다는 현실감, 한 발자욱씩 내딛을 때의 그 짜릿짜릿한 통증. 그 모든 기분들을 한 순간에 느끼며 대대에 복귀했고 유격을 끝마쳤다. 몸은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죽어버리겠다. 군 생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유격이 그렇게 끝났다.
3박 4일간의 유격을 오늘 새벽(20일 金) 3시 30분에 복귀행군을 통해 부대에 복귀하므로 끝마치게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격을 끝마치고 난 한마디 소감이 뭐냐면 ‘짱난다. 화딱지 난다. 열불 난다’ 이 정도이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열외할 수 있었는데 괜히 뛰었다는 생각이 드니, 유격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을 리 만무하고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유격을 끝냈고 군생활의 백미(?)를 경험해본 것에 만족하며 지금 후련함을 느끼며 이렇게 소감을 쓰고 있다.
마지막 텐트를 정리하며 한 컷. 막상 끝났지만 끝난 게 아니라 기쁘진 않더라.
문을 부순 사연
02년 9월 24일(화)
요샌 아침저녁으로 스산함이 느껴진다. 낮에 엄청 높은 새파란 하늘과 따스하게 내리쬐는 태양이 있어 가만히 있어도 가을임이 느껴진다. 그래서 기분은 무지 좋아진다. 더더욱이 내일 모레면 상병휴가를 간다는 것 때문에 더욱 그런 거겠지. 만약 휴가 기분 없이 그런 더 없는 가을 정취를 대했다면 기분은 씁쓸했을 것이다. 밖에서 이런 날씨를 즐기며 흥겨운 정취에 취해볼 수 있지만, 여기선 취하긴커녕 그런 정취를 원망하며 다른 작업에 몰두해야하는 나 자신의 현실을 짜증스러워 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요즘은 정말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런 날씨 가운데 있다는 게 행복하기까지 하다.
이번 주는 너무 빡시다. 공용화기 집체 교육 기간임에도 다음 주부터 진지공사(ㅋㅋ 난 진지공사엔 휴가로 인해 빠진다. 야후~ 숙영까지 한다던데~~)가 있기 때문에 교육 외 인원들은 하루종일 흙벽돌 만들기에 전념하고 교육 외의 쉬는 시간엔 여지 없이 흙벽돌 작업에 투입되는 빡센 일과를 지내고 있다. 다들 이런 일과 속에서 씻을 시간도 없이 생활하고 있는 게 대단하기까지 하다. 난 그나마 조금 있으면 상병휴가를 간다는 생각 때문에 버텨나가고 있지만 말이다. 다들 진지 공사 잘해라 난 무려 10개월 만에 상병휴가 갔다가 올게.
좋은 소식을 들었다. 분반 포상 건의증이 나하고 현수한테 나온 것이다. 800점이 넘었다는 말인가? 솔직히 좀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난 정말 열심히 하지 못했기에 넘었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민수밖에 의심해볼 사람이 없다. 민수가 포상 건의증은 보내줄 수 있다고 했으니까. 자식 끝까지 고맙네. 분반에선 영외 탄약고 근무를 한 번도 안 세우더니, 이젠 휴가증까지^^. 휴가를 가든, 못 가든 기분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이로 인해 두 번째 포상휴가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이 됐으니 말이다.
그에 반해 나쁜 상황도 생겼다. 그래서 오늘 화나서 죽는 줄 알았다. 어젠 K-2 교육을 가는 바람에 저녁까지 되게 빡셨는데, 오늘은 작업으로 빠져서 그나마 널널한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상남이가 내일은 K-2 교육에 나가라고 간섭을 하는 것이다. 이유인즉, 밑의 아이들이 없다 보니 부려먹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동기한테까지 간섭 당하는 것은 기분이 무지 더러웠다. 그래서 나는 먹던 포도를 땅바닥에 내팽게친 다음에 “개씹새끼 니 좋을 대로 다해라”라고 한 다음에 뛰쳐 나가면서 소대 출입문이 부서질 것을 염려한 나머지 최소한의 힘으로 걷어찬 다음에 뛰쳐 나왔다. 너무 화딱지가 나서 도저히 나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사물에 대한 화풀이를 한 건데, 솔직히 잠시 내가 너무나 소극적이지 않았나하고 후화를 하긴 했다. 그럼에도 그 정도로 끝내 큰일로 만들지 않은 건 어찌 되었든 잘한 일이다. 그렇게 화가 난 나는 3p 옆에 짱박혀 화를 누그러뜨리며 먹을 것을 먹었다. 나는 나를 간섭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싫다. 특히, 자기들의 이득을 위해서 날 희생양으로 심으려는 개새끼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난 너희들의 밥이 아니니깐.
아무튼 그렇게 있다가 문이 짜개졌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들어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좀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까. 하지만 난 상남이에게 빵과 우유를 주면서 화해를 신청했고 들어와서도 모두 별 질책이 없었다. 다행이다 못해 기쁨이었다. 이젠 나한테 뭐라고 할 그런 사람들이 없다는 얘기일 테니깐 그렇게 짬이 인정되는 게 행복했다. 바로 문을 고치는데 경첩만 부셔진 거라서 금방 고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광화와 상남이가 도와주어 금방 수리했다. 오늘은 내 소심한 성격이 터진 날이며 나도 화나면 무섭다는 걸 내 스스로 느낀 날이었다. 아직 더 깨지고 박살나야 하리. 3Co 군종이여!
철책의 방벽만큼이나 군생활엔 굴곡이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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