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이 보여준 정복욕의 인과응보
『대작전』을 보면서 계속 곱씹어보게 된 건, 인간의 나약함, 그걸 숨기기 위한 허위, 가식, 그리고 거만이었으며 자기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폭력이었다. 자연파괴가 바로 그 극단적인 행동이다.
▲ 원령공주에선 에보시가 사슴신을 죽이고 나우시카에선 거신병을 통해 오무를 죽인다.
나약함을 정복욕으로 극복한 사람이란 존재
『원령공주もののけ姫』에서 이성과 인간우월의 상징인 에보시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슴신을 굳이 죽이고자 하는 것,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風の谷のナウシカ』에서 도르메키아 공화국이 부해를 태워버림으로 자신들의 승리를 쟁취하려 하는 것 따위가 인간의 거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들이다(그런 행동의 기저엔 자연에 대한 두려움, 즉 죽음의 공포가 숨어있다).
자연을 정복하고 굴복시켜가면서 인간은 자아도취감에 빠질 것이다. 세계의 신이 인간을 위해 천지만물을 만들었고 그것들을 인간이 이용하며 사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착각. 그런데 과연 지구가 인간만의 것인가? 하나의 신을 닮은 인간만이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자기 맘대로 살아갈 수 있고, 그 외 나머지 것들, 심지어 동물마저도 생각과 의지 없이 짜인 각본처럼 인간만을 위해 살아간다는 말인가? 이와 같은 인간 중심의 사고는 신마저도 자기의 편의나 구미에 맞게 편협적인 인간을 위한 객체로 만들어 버렸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너구리들의 다음 말처럼 그는 세상의 유일신처럼 막강한 존재였다. “야아! 사람이란 대단하군요. 여지껏 우리와 같은 동물의 일종인 줄 알았는데 이번 일로 하느님이나 부처님 같은 힘이 있다는 걸 잘 알았어요.” 하지만 인간은 동시에 유일신처럼 고독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와 대화를 나누어줄 자연은 사라지고 없다.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문학과 경계, 이진경, 2002년
공존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하던 인간은 이성이 만고의 진리이며 최고의 가치임을 자랑하며 자연과 동물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신 앞에 엎드린 존재, 하지만 자연 앞에선 우뚝 선 존재라는 아이러니를 지닌 채, 신에게 위임 받았다는 전권을 맘껏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전근대인들은 사냥을 하고나서 그 짐승들의 명복을 빌고, 그걸 먹고 살다가 자신이 죽고 나면 결국 땅 속에 묻혀 그 액을 꽃들이 마시고 자라는 ‘자연의 순환’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자연을 정복한 근대인들은 더 이상 명복을 빌지 않는다. 오히려 잡아먹을 목적으로 대량사육하며 짐승들에 대한 배려는 일절 없이 빨리 자라게 하려 성장촉진체 등의 약물을 먹인다. 도살장이란 곳에서 그렇게 자란 짐승은 어떤 생명의 존귀함 따위는 없이 한 덩어리의 고기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제 인간에게 대적할만한 적수는 없다. 자연을 정복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을 정복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인간은 성취감, 승리감에 빠져들기보다 ‘고독’과 ‘외로움’을 느낀다. 자연과 감응하고 그 안에서 공존의 생명력을 누릴 수 있었던 인간이, 자연을 철저히 타자화하고 그걸 딛고 일어선 순간 광야의 모래바람에 홀로 노출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연과의 감응 능력을 잃었으니 자연과의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쯤 되어 생각해보면 신이 했다던 ‘노아방주 사건’이랄지, ‘열 가지 재앙 사건’은 홀로 외로이 선지자의 심심풀이 장난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신이 직접 만들고 자신이 직접 허물어 버리는 것은 아이들의 모래성 쌓기 놀이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 자연을 파괴하며 그곳에 살던 뭇생명들을 쫓아냈다.
홀로 선 자가 겪어야 할 불행
하지만 그런 절대적인 힘으로 자연을 굴복시키고 우뚝 선 인간은, 정말 자연을 굴복시킨 것일까? 표면적으론 이 말에 의심할 여지는 없다. 지금도 우리 학교 주변에선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니까. 그 드넓던 공간들이 사라지고 신도시 계획에 맞게 구획되고 다듬어진다(매끄러운 공간이 홈 파인 공간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곳에 살던 수많은 것들은 자기의 주거에 대한 권리 주장을 할 겨를도 없이 자기의 주거 공간을 일순간에 빼앗겼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했다. 바로 인간의 이성과 편협함이 만든 광기의 현장이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철저히 대비하고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계획을 세워 신과 같은 전권을 휘두른다 해도 자연에 포함된 동물에 불과함을 잊지 말라. 태풍, 허리케인, 쓰나미 등의 자연의 반란 앞에 힘없이 무너져 내리니 말이다.
자연의 눈, 너구리의 눈으로 보면 근대 인간은 자연을 갉아 먹는 벌레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처음에 벌레처럼 산을 갉아먹는 포크레인들을 보여주는 것도 근대 인간을 바라보는 자연의 시선을 드러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연은 인간보다 훨씬 더 큰 지성에 의해 움직인다는 말이 있다. 만약 자연에게 지성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성을 하나의 광기로 파악할 것이다. 미친 듯이 자연을 파먹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정신 나간 벌레가 자연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은 아닐까? 그 때문인지 늙은 너구리인 오로우 할멈은 인간의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민둥산 언덕을 가리켜 '광기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문학과 경계, 이진경, 2002년
▲ 나뭇잎 한 장으로 자연을 갉아먹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 명장면.
이성을 내세우며 절대자를 자임했던 인간이 자연 앞에 나약하게 무너지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과연 인간이 자연을 정복한 것인가? 자연이 그 넓은 가슴으로 인간의 철없는 행동을 오냐 오냐 받아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분명한 것은 자연이 봤을 때 우리들의 모습이나 행동 또한 좀 별난 짐승의 그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선 ‘풀잎을 갉아먹는 포크레인’들의 모습을 통해 그런 자연의 시각을 드러낸다. 우리에게 있어서 손 위에 놓인 개미는 날고 기어봤자 손 위에 놓인 하찮은 생명체이듯이, 자연에게 있어서 인간은 아무리 파괴하고 정복했다고 자아도취감에 빠져있어 봤자 한 번의 기상 이변에 맥을 못 추스르는 하찮은 생명체에 불과하다.
▲ 광기의 언덕이라며 자연을 정복한 인간에 대해 분개하고 있다.
인용
2. 정복욕의 인과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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