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역사가 스민 부안을 교사가 되어 다시 찾다
2학기가 시작되고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2학기부터 새롭게 합류한 학생은 두 명이다. 준영이와 태기가 바로 그들인데, 준영이는 단재학교에서 첫 번째 여행을 하는 셈이고 태기는 1학기 마무리 여행인 가평 여행을 함께 했기에 두 번째 여행을 하는 셈이다. 이번 여행엔 아쉽게도 이향이가 대입 수시 준비로 빠졌고, 상현이는 개인 사정으로 빠져 9명의 학생과 3명의 교사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 고속터미널에서 출발한다. 1975년에 건설되었으니 40년이 흘렀다. 그 땐 어마어마한 규모였겠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하철을 타고 갈까, 자전거를 타고 갈까
8시 50분까지 고속터미널역 7번 출구 쪽에서 모이기로 했다. 지훈이와 지민이는 아직 지하철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에 석촌역에서 8시 9분에 만나서 가기로 했다. 그러려면 나는 8시 3분에 강동구청역에서 모란으로 떠나는 지하철을 타면 되지만, 전날 저녁까지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부안으로 떠날 때는 강남터미널에서 떠나지만 돌아올 땐 동서울터미널로 오기 때문이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집까지 자전거로는 20분이면 가지만 버스를 탈 경우 30분이 걸린다. 그래서 자전거를 동서울터미널에 가져다 놓을 수 있으면 돈도, 시간도 절약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침에 40분 정도 일찍 집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 날의 고민은 쉽게 해결되었다. 여행을 떠나던 날 새벽 4시에 일어난 게 결정타였다. 명절 다음 날이라 보통은 명절 후유증에 시달릴 테지만,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 여행을 떠나는 것이기에 후유증 따윈 없었다. 산뜻한 기분으로 새벽의 어슴푸레함을 즐기며 여행을 준비하고 아침까지 든든히 챙겨 먹었는데도 시계는 겨우 7시를 넘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당연히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나올 수밖에.
▲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나는 왜 조그만 일에만' 고민하는 걸까? 하지만 그게 작은 일이지만, 어찌 보면 그 순간엔 절대적인 일일 수도 있다.
큰 문제는 결정이 쉽지만, 작은 문제는 오히려 결정이 어렵다
어찌 보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큰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결정을 내리는데 반해, 작은 문제에 대해서는 (누가 보면 하잘 것 없는 것인데도) 우유부단할 때가 많다. 즉, ‘삶이냐, 죽음이냐’의 문제보다 ‘짜장이냐, 짬뽕이냐’의 문제가 더 결정하기 어렵다는 소리다. 그게 삶을 바꾸지도 어떤 극적인 변화를 만들지도 못하지만, (그때) 당사자에겐 실존의 문제로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문제에 대해 어떤 결정을 하며 살아왔느냐?’는 것보다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의 자잘한 문제에 대해 어떤 결정을 하며 살아왔느냐?’하는 것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주는 증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래에 인용하는 중용의 구절은 이 말을 공명한다.
그 다음은 한쪽을 지극히 함이니, 한쪽을 지극히 하면 능히 성실할 수 있다. 성실하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더욱 드러나고, 더욱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감동시키고, 감동시키면 변하고, 변하면 화할 수 있으니,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능히 화할 수 있다.
其次 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 『中庸』 23장
어떤 변화의 단서는 아주 작은 차이에서부터 시작된다. 내 주변의 사람에게 하는 말 한 마디, 그리고 생활의 가장 작은 부분들, 그리고 일상사의 별 것 없는 선택에 이르기까지 작은 부분에 신경 쓸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외부의 변화로, 그리고 천지자연의 변화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용』에서는 ‘홀로 있을 때에 신중히 행동한다愼獨’을 강조한다. 이런 구구한 말들을 영화 『역린』에서는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 드디어 3일간의 일정을 소화하러 출발한다. 내일 오늘 내일 비 예보가 있어서 어떨지?
나의 아픔이 산산이 부서진 변산에 교사가 되어 가다
부안으로의 여행은 초이쌤의 제안으로 정해졌다. 1학기 여행은 전주-임실(이건 아이들이 회의로 결정됨)로, 2학기 여행은 부안으로 떠나는 것이니 두 곳 모두 나에겐 홈그라운드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부안은 마음이 울적할 때 무언가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을 때 찾아왔던 곳이다.
언젠가 임용고시 1차 결과가 나오던 날이었다. 10시에 각 교육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한글문서로 합격자를 발표했는데, 당연하지만 그 전날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어김없이 5시면 눈이 떠져 미래에 대한 착잡함과 기대감을 동시에 느껴야 했었다. 그때도 9시 30분부터 교육청 홈페이지에 접속한 채로 대기하고 있었고 10시에 올라온 문서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어봤다. 그 날은 눈송이가 흩날리며 내렸다. 10시에 문서를 열어보니 이번에도 나의 수험번호는 어디에도 없더라. 막막함은 현실이 되었고 내 마음을 어찌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삶이 모두 무너져 내린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 채 무작정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어디를 가겠다는 뚜렷한 목적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돌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고 그 순간 바다가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선지를 살펴보니 ‘격포 터미널’이 눈에 들어왔고 곧바로 격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김제에서 한 번, 부안에서 한 번 쉰 다음에 격포로 향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출발한 버스는 3시가 되어서야 격포터미널에 도착했고 마트에서 소주 하나와 과자를 샀고, 격포비치랜드 앞에 있던 만두집에서 만두를 샀다. 그리고 채석강 쪽으로 걸어 제방에 앉아 만두와 과자를 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바다에 떠 있던 바나나 껍질은 파도에 따라 부평초처럼 정처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씁쓸히 내 인생을 관조했다. 삶의 온갖 비운을 온 몸에 안은 양, 그 비극 한 가운데로 쳐들어가는 양 그 시간은 무겁고도 애처로웠다. 해가 저물고 나선 닭이봉 꼭대기에 있는 팔각정에 올라 어두워져 암흑과 완벽하게 하나가 된 바다를 한 번 더 응시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격포는 단순히 바다이기보다 나에게 숨 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곳이었다.
그땐 비극을 안고 갔다면, 이젠 희극을 안고 다시 찾아간다. 그것도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닌, 단재학교 아이들과 함께 나의 아픔이 바다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내린 그곳으로 간다.
▲ 생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순간에,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 그게 바로 생이고 삶이다. 그래서 그런 생을 사랑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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