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9. 신독사상과 반효율주의
신독자의 자세란 내 주위의 머리카락을 줍는 행위
동양인들에게는 단독자 개념이 없습니다. 동양인이 인간존재를 파악하는 방식은 도(道)라고 하는 개념입니다. 도는 나와 우주 만물이 이미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홀로 있을지라도 조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도는 잠시도 떠날 수 없다는 말과 홀로 있을 때 삼가 한다는 말이 왜 나오느냐 하면, 도에서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삶 그러한 삶은 남이 보든 안 보든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이 보는 데서 하는 행위보다는 보지 않는 데서 하는 행위야말로 이 문명을 개혁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문명의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도올서원 학생 중에서 주변에 굴러다니고 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손에 집고 일어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쓰레기를 보면 남이 보지도 않고 알아주지도 않지만 주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줍는 행위가 비록 남에게 보이지 아니 할지라도 이런 나의 행위가 전체의 도(道)에 항상 관련이 되어서 남에게 언젠가는 혜택을 주리라는 믿음, 이 도(道)에 대한 보편적인 믿음이 없이는 동양인들이 말하는 군자의 삶은 성립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은 시간 대비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늘날 노동 생산성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맑스의 최대 실수는 인간 노동의 가치를 시간으로 계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맑스는 상품가치의 실체를 순수하게 노동시간으로 환원하여 노동착취를 과다한 노동시간에서 오는 것이라고 크게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맑스에게는 근세의 수량적 가치관과 관련하여 모든 가치를 수량화해야만 하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에 『자본론』 제1권에서부터 수량적인 분석을 시도한 거예요. 그러나 노동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문화를 창출하는 道의 행위입니다. 그 노동은 절대 시간이라는 양으로 계산될 수 없어요. 이것이 동양인들의 생각입니다.
내가 집을 짓느라고 나이 많은 목수와 젊은 목수에게 일을 시켜보았는데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6,70살 되는 옛날 도목수들은 놀 때는 판판히 놀면서 일을 안 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만들고 깎을 때에는 누가 보든 안 보든 시간 제한 없이 밤을 새우더라도 완벽하게 완성을 해냅니다. 그런데 요새 젊은 목수는 아침에 와서 기계로 붕붕붕 일하다가 시간 되면 일하던 중간에 손을 털고 일어나버려요.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집이 지어지겠습니까. 일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시간으로 딱딱 잘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쭉 가다가 어떤 때는 쉬기도 하고 그래야 결과적으로는 더 효과적인 작업이 되고 또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시간을 가지고 인간을 착취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지만, 가치의 창출 그 자체로 말하면 시간으로 계산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정보’가 가치창출의 원천이 되고 있는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맑스의 수량적 가치관은 별 의미가 없어요.
반복되는 얘기지만 옛날 일꾼들에게 일을 시켜보면, 요새 일꾼들과 가장 크게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데서도 완벽하게 일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요새 애들은 보이는 데에서는 완벽한 체하고 보이지 않는 데에서는 개판이에요. 도대체 미국이 소니제품을 따라 갈 수 없는 중대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이 일본 제품을 따라갈 길이 없어요. 지금 미국의 자동차시장을 일본이 제패했습니다. 여러분 벤츠가 대단한 줄 알죠? 지금 그 무서운 벤츠의 아성이 깨졌습니다. 미국에서는 지금 벤츠보다 도요타에서 나오는 렉서스(LEXUS)라는 차를 더 알아주거든요. 20년 전만 해도 일본차는 미국에서 명함도 못 내미는 똥차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렇게 완벽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일본 노동자들의 질 높은 노동 때문입니다.
질 높은 노동을 가능케 하는 신독사상
내가 생각하기에 질 높은 노동을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신독사상입니다. 아주 간단한 거예요. 홀로 있을 때를 삼가 할 줄 아는 노동자, 그것이 없이는 그 문명의 질은 향상될 길이 없습니다. “숨겨져 있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세한 것보다 더 뚜렷한 것이 없다.” 그러니까 인간이 함부로 까불 수가 있겠습니까? 동양인에게는 내면적 윤리가 없다는 막스 베버의 말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동양인에게 내면적 윤리가 없다고 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근세 20세기 동양문화가 서구화의 충격 때문에 타락했을 때의 그 측면만을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양사회는 근세에 와서 매우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저께 새벽에 우리 어머님 댁에 갔다가, 우리 딸 미루가 가지고 오라고 해서 가보(家寶)가 될 만한 자수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자수는 우리 어머니가 13살 때 만든 작품인데도 그 정교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요즘 어떤 애들도 만 12살에 그러한 수를 놓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실도 어머니가 손수 솜 같은 것을 꼬아서 만든 것이고 비단도 정교하기가 이를 데가 없어요. 요즘 바늘로 수를 놓으면 비단에 바늘 귓구멍이 뻥뻥 날 것입니다. 조선조 바늘이 요새 바늘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일제 초기만 해도 우리의 일상적인 문화가 이런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타락을 해도 너무 타락해 버렸어요. 우리는 너무도 많이 이 신독사상을 상실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중용(中庸)』이 말하는 이 신독사상이야말로 우리의 고문명, 특히 조선시대의 유교문명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여기에서 조선조의 정예로운 장인문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보이는 것, 분명한 것, 들리는 것, 현명(顯明)한 것에 의해서만 세계를 보려 하고 있어요. 사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가장 큰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서양의학은 너무 인체의 보이는 측면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동의학이 추구하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몸의 세계’입니다.
▲ 유물명 : 연화봉황무늬자수방석(蓮花鳳凰文刺繡方席) 국적/시대 : 조선말기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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