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pp 4
하나의 현실이 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다른 현실을 꿈꾸는 자의 사상은 광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pp 4
철학자는 먼저 “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잘 추다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자신이 대결하고 있는 자들을 ‘죽음의 설교자들’이라고 부른다. 죽음의 설교자들 속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진리에 목을 매는 철학자들이 포함된다. 니체가 철학자들을 죽음의 설교자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이 세계 속에서의 삶을 평가절하하고, 어떤 생성도 없는 영원불멸의 세계를 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역동성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단순한 ‘현상’이나 ‘가상’으로 치부한다. 그리고는 ‘실재계’, 다시 말해 참된 세계가 따로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 ‘물 자체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pp 29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을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그러한 구속을)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신이야말로 광기의 즐거움이 생겨나는 장소”, ‘탈주자’의 장소다. 아픈 광인은 병원에 갇힌 환자지만 건강한 광인은 자유정신을 지닌 전사로 등장한다. 보편적 가치를 위해 길들여진 두뇌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진 것이 신앙이라면 명령하는 자, 새로운 가치의 발명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유의 정신이다.
희생은 사랑을 구속으로 만든다. 바그너의 작품 ‘방랑하는 화란인’에서 여성은 방랑자를 숭배해서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은 무엇을 가져왔던가? “그는 방랑을 멈춘 것이다. 바그너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는 파멸했다.” -pp 58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악이다. -pp 90
화폐의 위조란 조작하는 행위다. 가치의 위계를 역전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에서의 화폐 위조 행위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본다면 화폐 자체가 가치의 위조물이자 마법이며 ‘철저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치의 보편적 기준을 찾아 나선 도덕학자들의 노력은 곧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지만, 경제학자들이 떠받드는 화폐는 하나의 가치 척도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사물이나 활동이 성공적으로 교환되도록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법이며 뛰어난 위조 행위인 것이다.
도덕학자들로서는 도덕을 자연스러운 것, 본능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싶겠지만 도덕이야말로 인위적인 조작 행위다. 니체의 말대로 “모든 도덕은 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자연에 대한 …… 어느 만큼의 억압이다.”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의 한 장의 제목을 “도덕의 자연사”라고 붙였는데, 이 글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도덕의 “부자연스러움”이다. 자연스러움ㅇ과 부자연스러움의 역전, 자연과 비자연의 역전.
우리가 도덕을 인위적인 것으로 본다면 자연은 분명히 도덕의 외부에 위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자연 언어도 가치를 심어놓았고 결국 우리는 자연 속에도 인간의 가치를 본다. 도덕주의자들은 “모든 열대 괴물이나 생물들 중에서 가장 건강한 것들에게서조차…… 악마적 속성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자연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뱀처럼 흉측하게 생긴 동물이나 기괴한 식물들을 악과 연관시키고, 우리 안에 있는 자연, 즉 본성에 대해서도 본래적인 선과 악을 논한다. 우리는 확실히 자연을 지나치게 도덕화했다. 루소처럼 자연을 지고의 신으로 간주하는 경우조차 자연은 도덕의 굴레를 쓰고 있다. 문명을 자연의 야만성에 대한 승리로 보았던 블테로와 문명을 인간을 타락시킨 악으로 보았던 루소. 자연으로 돌아가라. “자연에 가까워지는 것은 선인가, 악인가?” 볼테르든, 루소든 니체가 볼 때 문제는 도덕화 자체다. -pp 70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면 것, 현재의 체제에 항변할 수 없다는 것이 급진적 이론과 실천을 퇴조시킨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니체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 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pp 122
니체는 해석의 문제에 있어 차이에 대한 “동등화의 의지”를 발견한다. 진리라고 불리는 것은 본래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은 이렇다고 나는 믿는다.” 즉 진리란 하나의 신앙이며 가치 평가이다. 그들의 문제는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종족이든 국가이든, 교회이든 문화이든 간에 보존을 위한 하나의 투시법이라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바로 차이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특정 방향으로 모으려고만 하는 것이 그들의 병이다.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혼란으로써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pp 107
정치란 ‘행위’의 영역인데, 행위란 항상 어떤 것을 ‘시작하는 것’, ‘주도하는 것’이며, 타자의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회’는 공통성의 영역이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영역이다. 그리스에서 정치적 영역이 갖추어야 할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다원성이었다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것은 ‘표준화’다.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의 특성을 부각시키고자 했고, 독특한 행위와 업적을 통해 자신이 최고임을 보여주고자 했으나”, 근대 사회에서 이러한 독특한 행위나 사건들은 통계학이 예외들을 다룰 때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의 일탈이지, 동요”일 뿐이다. 요컨대 순응주의 사회에서 제일 먼저 죽어나가는 것이 정치다. -pp 124
국가는 바로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공통의 힘”으로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실체다.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로 안전을 위해 인위적인 제약에 동의한다. 그리고 계약은 다시 국가에 의해 보증된다. 이것이 자연상태에서 사회 상태로의 이동이며, 정의와 법의 탄생이다. …… 니체가 말하는 국가는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전쟁의 지속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군사적 수호신의 끊임 없는 재생산을 목표로 하는 국가와 전쟁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국가는 전혀 상반된 성격을 갖는다. 결국 근대의 정치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가는 ‘전쟁 공포의 확산’에서 생겨난 후자의 국가다. 칼을 든 무시무시한 국가를 외치는 홉스에게서 전쟁에 대한 공포를 읽어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 고대의 국가가 전쟁에서 기원한다면 근대의 국가는 전쟁에 대한 피로감에서 등장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어보자. “너희는 전쟁에서 지쳤고 이제 너희의 피곤함이 이 새로운 거짓 신에게 봉사한다. …… 너희가 국가, 그 새로운 거짓 신을 숭배할 때 국가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하리라. 그렇게해서 국가는 두 눈의 심안을 매수하는 것이다. ……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가 음독자가 되는 곳,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곳, 그 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pp 131
체제는 자신의 인정을 위해 “인간을 가능한 한 재빨리…… 시대의 목적을 향하여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니체는 이 ‘훈련’이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우선 “사회나 국가 같은 개체가 개개인을 굴복케 하여 고립에서 끌어내고 하나의 단체에 정렬시킬 때,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기초가 정비”되고, 이것이 익숙해지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하여 그것이 본능이 되도록 한다.” 하나의 도덕이 자연스러운 지배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전사적인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 이후에 본능적으로 ‘미덕’으로 숭상되어야 한다. 첫 번째의 직업이 ‘길들이기’에 해당된다면, 두 번째 직업은 ‘길러내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pp 142
다양한 국가 장치들, 법이나 관습, 문화는 우리로 하여금 ‘군주적 본능’을 포기할 것을 설득하고 강제한다. 그러나 니체의 경고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리를 초월적 기구에 양도하면 할수록, 가장 평균적인 자들의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대 다수자들의 지배에 만족하게 된다.” 우리는 권리를 양도하는만큼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니체가 법과 관습, 문화에 대한 적대를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쟁이란 내가 주권적 능력을 그대로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생성적 힘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니체가 자주 말하듯이 좋은 전쟁은 화약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쟁은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 정치적 운동이 바로 전쟁이다. -pp 152
들뢰즈의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정의를 구분했다. 첫 번째 정의는 욕망을 ‘획득’과 관련시켜 보는 것이다. 무언가를 획득하려는 노력이 욕망이라는 것.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우리는 그 결여되어 있는 것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노력이 욕망이다. 아마도 이 첫 번째 정의가 욕망에 대한 통념일 것이다. 이 때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넘침’이다. 욕망을 그 자신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관계시키는 것이다. 결핍된 자의 초조함과 넘치는 자의 즐거움은 너무도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항상 이렇게 물었다. “나는 개개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기 만들어져 있는 것은 기아가 원인인가, 과잉이 원인인가?” -pp 173
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 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전적으로 긍정의 의지 편에서 사서 부정의 의지와 대결한다. 그것은 피로를 조장하는 의지, 無를 의지하게 하는 의지와 대결한다. 따라서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와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부정의 권력의지로부터 그것을 구분해 주는 시금석 같은 것이다. -pp 193
막연한 파괴와 긍정 안에 들어 있는 파괴를 구분하면서 우리는 단 하나의 긍정이 정립되기 위해서라도 긍정은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선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다.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이 첫 번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된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망치가 파괴의 도구인지 창조의 도구인지는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결정된다. 하나의 긍정은 자신을 긍정해 줄 다음의 긍정을 기다린다.
이로써 긍정에 들어 있는 영원회귀의 원리가 나타난다. 긍정은 적극적으로 다음의 긍정을 의지한다. 긍정이 멈추는 순간에 부정은 승리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긍정의 권력의지, 능동적 힘만이 회귀한다고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부정의 권력 의지에는 어떤 회구에 대한 의지도 없다. -pp 205
나귀제는 모든 인간적인 것의 본질을 폭로해 버렸다. 낮은 인간이든 보다 높은 인간이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다. 그들은 신의 죽음이 만들어준 생성의 공간에서 반동적으로 뒷걸음질 친다. 신앙을 가진 자는 다른 신이라도 찾기를 바라고, 여행에 지친 자는 그만하기를 바라며, 확실성을 찾는 자는 그것을 신으로 생각함에 주저함이 없다. 그들은 모두 신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초인과 인간이 갈라진다.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는 것은 보존하는 것인가, 극복하는 것인가? 자기 보존과 자기 극복. 보다 높은 인간들은 모두 가치 파괴가 일어나는 점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미래로 가는 여행을 멈추고 싶어 한다. 그들은 과거를 되살리고 싶어한다. 차라투스트라의 탄식을 들어보자.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죽음을 나는 너희에게 권장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에게 오는 죽음을”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 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pp 231
저자가 쓴 여러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저자를 더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저자를 잘 알아야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걸까? 우리는 습관처럼 작품들 밑에 있는 동일한 저자를 떠올리거나 저자의 생애에서 작품들의 근거를 찾아보곤 한다. 그러나 활동의 순간마다 표현되는 자아를 항상 동일한 이름 안에 거두어 둠으로써 그 변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단일 주체에 대한 환상’처럼, 다양한 여러 작품들을 단일한저자의 이름 아래 위치시키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사실 이름은 신체의 변신을 이해함에 있어 큰 방해물이다. 이름은 사람들을 개별화시키고 고착화시킨다. ‘이름 부르기’를 통해 계급이 재생산된다는 알튀세의 지적처럼 이름은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서 그 사회의 주체로 거듭나게 만드는 핵심적인 기제이다. 사실 이름이야말로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가장 오해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pp 236
왜 보다 높은 인간들은 변신에 실패했을까? 그들에게는 초인과 영원회귀가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에게 의존하려 했다. 그들은 초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즉 놀이와 웃음과 춤을 몰랐다.
그들은 아이들의 놀이를 모른다. 차라투스트라가 왜 “아이들의 나라”만을 사랑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주사위 던지기가 놀이이지만, 그들 ‘보다 높은 인간들’에게는 위험성과 확실성을 따져야 하는 과학이 된다. ‘정의의 양심가’인 학자의 말대로 과학이 불안과 공포를 본질로 한다면, 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계속해서 부른다.
다음으로 그들은 웃는 법을 모른다. 웃음은 초인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중력의 영과 신을 확실히 죽이는 무기이며, 금욕주의 이상의 단 하나의 적이고, 뱀의 목을 물어뜯은 목동이 초인으로 변신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구토가 인간에게 속하는 질병이라면 웃음은 초인의 건강을 의미한다. 보다 높은 인간들에게 차라투스트라가 권유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 웃는 법을 배워라! …… 그대들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배워라’ 웃는 것을” 기독교는 웃음을 비판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웃는 자여(눅 6:25)” 니체는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그들은 지상에서 웃어야 할 근거를 못 찾는다. 어린아이도 발견하는 것을.”
그들은 춤추는 법도 모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춤추는 자이고 가벼운 자이다.” 보다 높은 인간들은 춤출 줄 모른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은 중력의 정신에 대한 승리의 표시이다. 그것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높이 뛰기와 넓이 뛰기, 그리고 옆으로 뛰기이다. -pp 233
자연의 속옷을 벗겨가며 진리를 보고 싶어하는 철학자들의 조바심에 찬 눈은 가면으로 가득 찬 니체의 책을 읽는데 적합하지 않다.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니체가 원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서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들어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화불량증도 가져서도 안 되므로 강한 위장도 있어야 한다. 즐거운 소화 작용이 필요하다. 복수심이나 원한은 금물이다. 이러한 독자라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의 괴물일 것이다. 추론하기보다는 제 방식대로 소화시키는 괴물. -pp 239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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