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을 묶어 줄 우리 시대의 굳건한 돛대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그 부하들처럼 밀랍으로 귀를 막은 채 그저 노만 저을 것인가. 둘 다 아니다. 뛰어들지 않은 채 그저 즐기기만 하는, 행여 끌려 들어갈까 봐 시대의 기둥 하나에 제 몸을 단단히 묶어 두는, 그런 지식인 무리들이 밀랍으로 귀를 막은 자들보다 나을 게 무언가.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귀를 열고 위험에 스스로를 내던져야 한다. -pp 9~10
그는 에머슨(Emerson)의 글을 인용하기도 했다. “위대한 신이 우리 행성에 한 사상가를 오게 할 때, 그대들은 조심하라. 그때 모든 것은 위험에 처해진다.” 사물들의 질서가 뒤바뀌며 순식간에 인간적 노력의 모든 체계가 전복될 것이다. 니체는 말할 것이다. 난 위험 인물이다. 그러나 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정작 두려운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노래가 아니라 당신이 계속 듣고 있으면서도 듣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노래이다. 정작 두려운 것은 저 먼 데서 들려오는 유혹의 노래가 아니라, 너무 중독되어 그 중독성조차 모르는 우리 시대의 소음과 습속들이다. 나 같은 사상가가 두려운가. 당신은 위험하지 않은 사상가들을 찾는가. “우리 대학의 사상가들은 왜 위험하지 않은지 아는가. 그들의 사상은 평온하게 인습적인 것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마 디오게네스의 말이 어울릴 것이다.
‘오래 철학을 했으면서도 아직 누구도 슬프게 한 적이 없는데 도대체 어떤 위대한 일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은 시작과 끝만이 아니라 생애의 대부분에서 주인노릇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왜 만들어 놓은지도 모르는 가치와 규범에 복종하고, 미리 정해져 있던 길을 따라 의미없는 생을 이어간다면 그 생은 죽음보다도 비참한 게 아닐까. -pp 22
기독교도들은 사람들에게 ‘이 세계’가 죄로 가득 차 있고 천국은 오직 ‘저 세계’에만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삶이란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그 이유를 오직 우리가 지은 죄탓으로 돌린다. 우리가 그들의 함정에 말려들어 삶에 대해 불행한 느낌을 크게 가질수록 우리는 더 큰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점점 삶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다는 심판이나 지옥 같은 공상적 이야기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삶을 죽음을 준비하는데 쓰는, 이른바 ‘삶을 배신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pp 27
새로운 신체, 그리고 安住
분명히 차라투스트라가 그 옛날 에덴 동산의 뱀처럼 다가와, 신의 모든 말씀이 거짓이라고 말할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도저히 버릴 수 없을 것 같은 가치와 신념들을 조롱하고, 때로는 그것들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우리 자신을 비웃기도 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을 묶어 줄 우리 시대의 굳건한 돛대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그 부하들처럼 밀랍으로 귀를 막은 채 그저 노만 저을 것인가. 둘 다 아니다. 뛰어들지 않은 채 그저 즐기기만 하는, 행여 끌려 들어갈까봐 시대의 기둥하나에 제 몸을 단단히 묶어 두는, 그런 지식인 무리들이 밀랍으로 귀를 막은 자들보다 나을 게 무언가.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귀를 열고 위험에 스스로를 내던져야 한다.
니체는 그와 관계 맺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위험이다. 니체 주석가들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그것을 말해왔다. 그러나 니체는 웃으며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예외적인 사람들이며 위험인물들이다.” 그는 에머슨의 글을 인용하기도 했다. “위대한 신이 우리 행성에 한 사상가를 오게 할 때, 그대들은 조심하라. 그 때 모든 것은 위험에 처해진다.” 사물의 질서가 뒤바뀌며 순식간에 인간적 노력의 모든 체계가 전복될 것이다. 니체는 말할 것이다. 난 위험 인물이다. 그러나 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정작 두려운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노래가 아니라 당신이 계속 듣고 있으면서도 듣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노래이다. 정작 두려운 것은 저 먼 데서 들려오는 유혹의 노래가 아니라, 너무 중독되어 그 중독조차 모르는 우리 시대의 소음과 습속들이다. 나 같은 사상가가 두려운가. 당신은 위험하지 않은 사상가들을 찾는가. “우리 대학의 사상가들은 왜 위험하지 않은지 아는가. 그들의 사상은 평온하게 인습적인 것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마 디오게네스의 말이 어울릴 것이다. ‘오래 철학을 했으면서도 아직 누구도 슬프게 한 적이 없는데 도대체 어떤 위대한 일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 적혀 있던 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미지수가 들어서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미지수 X 위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문 부호를 들고 찾아온 한 사상가로 인해 우리의 삶이 대단한 위험에 빠진 듯 허둥댄다. 그러나 답이 사라질 때 오답도 함께 사라진다는 걸 알아야 한다. 정해진 답에 삶을 꿰맞추는 건 끝났다. 이제 우리 삶을 위해 답이 수정될 것이다. 당신의 삶도, 당신이 사는 세계도 말랑말랑한 진흙덩어리로 당신 앞에 놓여 있다. 니체는 그저 기대에 찬 눈으로 당신 작품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pp 12
확고한 토대
사람들은 확고한 토대도 없는 이상들을 왜 그렇게 쉽게 믿으려 하는 것일까? 확고하지도 않은 토대에 대한 믿음이 왜 그렇게 확고한 것일까? 니체는 사람들이 그런 이상들을 자신들의 생존조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무언가 확고한 도덕, 무언가 확실한 진리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잘 따져보지도 않고 쉽게 믿어 버린다. 대개 제 스스로 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할 것을 찾는 데 지나치게 서두르는 법이다. -pp 35
망각은 무언가를 단순히 잊어버리는 부정적인 작업이 아니다. 니체에게 망각은 하나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수만 개를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자기 안에 카오스를 만드는 것과 같다. 카오스란 길의 사라짐이 아니라 길의 과잉이다. 그것은 한 개의 시각이 갖는 특권을 제거하는 대신 수만 개의 시각이 가능함을 보이는 것이다. 니체는 자신이 질병과 치유를 반복함으로써 무엇보다도 ‘하나의 시각[퍼스펙티브]만을 갖는 맹목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다’고 말한다. 또한 니체는 이 과정을 ‘수많은 대립적 사유 방법에 길을 내주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너는 너 자신을 멸망시킬 태풍을 네 안에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의 자아, 하나의 주체성에 그토록 익숙한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영혼의 단일성을 기정하는 기독교식의 사고 방식 때문일 수도 있고, 모든 술어에다 주어를 쓰는 언어적 습관(‘번개가 친다’는 말에서처럼, 섬광이나 소리를 숨어 있는 번개라는 주체의 행위인 듯 묘사하는 언어습관)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다양하게 나타나는 행동들을 단일한 자아, 단일한 주체로 환원시킴으로써 행동에 대한 책임을 환기시키려는 도덕적 의지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pp 48
한 정서의 특권적 지배는 그 신체의 변신 능력을 떨어뜨린다. 불행히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제도나 장치들이 힘들의 동일한 배치를 습속화하도록 만들고 있으며, 힘들을 점차 과소 상태로 만들고 있다. 니체가 관습이나 제도, 법 등에 그토록 적대적 태도를 보였던 것도 그것들이 우리에게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양식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또 니체가 서구의 민주주의를 “힘의 해방이 아닌 피로함의 해방”이라고 불렀던 것도, 정치적 힘들의 과소 상태를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다양한 정치적 힘들을 투표 용지에 흡수함으로써(정치 행위는 투표 행위로 축소되고, 다양성은 나열된 항을 선택하는 문제로 제한됨으로써), 민주주의는 “미래를 낳는 능력을 상실한다”. -pp 49
2. 너희는 너희 가치를 창조하라
시장으로부터 멀어져라
가치의 보편적인 척도인 양 제시되는 화폐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환상을 심어준다. 가령 그림과 책은 그 가치를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질적으로 상이한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폭에 100만원, 한 권에 1만원 하는 식의 화폐 양으로 표시되면, 그 그림 한 폭은 그 책 한 권의 100배 가치를 갖는 것처럼 인식된다. 물건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활동도 그런 식으로 가치가 매겨진다. 고귀한 활동이든 천박한 활동이든 일단 ‘노동력’이라는 상품으로 변질되면, 활동의 가치는 화폐 양으로 표시되며, 따라서 판매와 구매가 가능해진다. -pp 116
강함과 선함
니체는 「서광」에서 “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한다.”고 비꼬면서 “일반화 할 수 없는 것들까지 일반화하려 하기 때문에 도덕이 항상 기괴한 모습을 띠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도덕의 역사 자체는 그런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대와 역사, 종족과 문화에 따라 수많은 선악의 기준들이 존재해 왔다. 우리가 보편적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들은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시대, 우리 문화에 한정된 것이다.
가령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어떤 고대 국가들에서는 거짓말을 ‘적을 속이는 탁월한 기술’로 높이 평가한다. ‘시기심’을 나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도덕책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서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신의 말씀이 그대로 새겨졌다고 하는 ‘십계’만 하더라도, 여성을 집에 있는 가축과 같은 재산으로 다루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날 여성을 남성의 재산처럼 다루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실제 역사를 보면 선악에 관한 수천 개의 도덕적 기준이 존재해 왔고, 오늘날에도 선악에 대한 판단 기준은 엄청나게 많이 존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끔찍한 전쟁들의 대부분이 선악에 대한 보편적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강박에서 나온 것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전쟁은 상대방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그에 맞서는 자신을 ‘선의 수호자’로 생각하는 잘못된 가치 판단 양식에서 나오는 훨씬 많다.
선하고 의로운 자들을 조심하라
그 누구도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인간은 진실로 사물들에 가치를 심으며, 어떤 것은 ‘좋은’ 것인지, 어떤 것이 ‘나쁜’ 것인지를 판단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것을 ‘선함’과 ‘악함’으로 판단할 때 그것이 무척 위험하다. 전체를 포괄하는 ‘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기 준에 부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철저한 배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pp 123
3. 사랑을 가르친다. 벗을 가르친다
사랑이라 불리지만 사랑이 아닌 것
어떤 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우상화해서 스스로 복종하는 노예가 되고, 어떤 이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그 대상을 구속해서 노예로 삼는다. 이러한 구속은 희생이라는 아름다운 포장지를 뒤집어쓰고, ‘진정한 사랑’이라는 영예를 얻기도 한다. 우리의 사랑 감별 수준은 인간적으로 길들인 강아지를 안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우정은 사랑이 구속이 아닌 자유여야함을 잘 보여준다. -pp 129
무언가 서로에게 줄 것이 있어, 자신에게 넘쳐나는 것이 있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받고 싶은 것이 있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어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결혼이다. 풍성한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을 서로를 선물하는 친구로 만들어 주지만,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사랑의 식물은 상대방을 구속하는 가시울타리로 자라난다. -pp 131
이웃 사랑에는 항상 주변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주변과 결탁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다 보니 “다섯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면 여섯 번째 사람은 항상 매장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먼 이웃을 ‘왕따’ 시키는 것이 이웃 사랑의 위험이다. 그렇게 패거리를 짜고 군중을 형성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독을 선택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pp 132
5. 신체야말로 큰 이성이다
창백한 범죄자
판관은 왜 그렇게 범죄자의 ‘의도’를 알아내는데 집착했던 걸까? 행위의 의도를 밝히는 것이 죄를 성립시키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는 행위자가 할 뜻이 있어서 행해진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우상의 황혼」) 니체는 여기에 “인간을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 만들려는 심리학”이 작동하고 있고, “책임을 따지는 것은 처벌하고 심판하려는 본능”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행위자는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 그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한 선택을 했다. 따라서 그는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니체는 이것이 심판을 끌어들이기 위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신학자들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자유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죄를 지었다면 신은 그 인간을 심판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니체는 말한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도록 창안된 것이다.” 자유의지의 창안은 “인류가 신학자들에게 의존하게 만드는데 사용되는 기술 중 가장 못돼먹은 기술이다.” -pp 166
신체는 생성하는 그 무엇이다
니체는 정신과 신체의 전통적인 위계를 뒤집고 있다. 그는 「권력의지」에서 “정신을 믿는 것보다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소유물이자 가장 확실한 존재인 신체를 믿는 쪽이 낫다.”고 말한다. 그는 정신이나 영혼, 주제에 대한 비판을 통해 신체의 중요성을 복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신체는 정신의 상대물인 육신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이나 육체보다 높은 차원의 것이다. pp 166
우리 안에는 어떤 자극에 대해 기쁨을, 다른 자극에 대해 슬픔을 느끼도록 하는, 그리고 어떤 행위를 바람직하다고 장려하고, 다른 행위를 사악하다고 금지하는 기준들이 있다. 특정한 정서들이 그 기준으로 차지하고 지배력을 확보하면 우리에겐 하나의 정체성이 생겨난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그런 정서들이 다른 정서들에 의해 전복되면 기쁨과 슬픔,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은 달라지게 되고, 결국 정체성 또한 완전히 달라진다. 교육을 비롯해서 정체성을 심고 관리하는 수많은 제도와 장치들 덕분에 우리는 비교적 고정된 정체성을 갖는 듯 하지만, 우리 신체 안에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정서들 사이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신체에 대해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라고 말했다. -pp 167
신체란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힘들의 복합체에 다름 아니다. 그런 힘들의 갈등과 경쟁이 조정을 거쳐 일시적인 평화를 유지할 때, 힘들의 잠정적인 중심을 우리는 ‘자아’ 혹은 ‘주체’라고 부른다. 자아의 입장에서야 어느 것 위에서든 제발 편히 오래 머물고 싶겠지만, 신체를 구성하는 힘들은 호시탐탐 자아를 낚아챌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의 영역은 힘 중심에 따라 계속해서 성장하거나 감소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신과 육신의 주인 자리는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다. 신체는 항상 당신의 극복을 꿈꾸는 생성의 존재인 것이다. -pp 168
6. 노동이 아니라 전쟁을 권한다.
노동에 대한 허영심과 수치심
니체는 ‘노동에 대한 찬미’와 ‘노동으로 피폐해진 삶’의 모순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근면한 사람을 칭찬한다. 그가 바로 그 근면 때문에 자신의 시력을 해치고 정신의 독창성이나 참신함을 상실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즐거운 지식」) 그는 근대 노동자가 고대 노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기 노동에 대한 독특한 위안을 가지고 있는 점뿐이라고 말한다. …… 노동하지 않을 수 없게 내몰면서도 노동하는 것을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물인 양, 심지어는 대단한 권리인 양 떠드는 현실을 니체는 “허깨비”이자 “환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아주 수치스러운 하면서도 사실상 “임금노예”인 자신의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노동을 찬미하는 일에 쉽게 동의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대 노예보다 더 가지고 있는 건 바로 ‘허영심’이다. -pp 174
물론 고대 사회에도 노동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고, ‘어떻게 노동 없는 사회가 가능하겠느냐’는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동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주장과 그것을 찬미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별개다. 노동에 수치심을 갖고 있는 사회는 그것을 줄이고 어떻게든 자유로운 활동을 늘리려 하겠지만, 노동에 허영심을 갖고 있는 사회는 그것을 확산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보기에는 허영심에 빠져 기본적인 권리와 존엄의 의미도 망각하고 있는 근대인들이야말로 노예 중의 노예다. -pp 175
노동이 아니라 전쟁이다
한 행동의 가치는 어떤 보편적인 잣대에 의해 정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행동이란 능력이나 지식, 욕망의 복합체로서, 그것이 구성되는 방식과 양상에 따라 가치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떤 효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만,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얼마나 많은 화폐를 획득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만 가치를 정한다. -pp 177
노동을 착취한 자들이 앞으로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를지는 알 수 없지만, 노동을 착취당한 자들은 지금까지 너무 큰 대가를 치러왔다. 노동으로 인한 심신의 상실도 컸지만 더욱 큰 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할 능력을 상실한 점이다. 그들의 노동은 가치를 창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그 가치는 그들이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핵심은 ‘생산한 가치를 빼앗겼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고 ‘타인의 가치’를 생산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활동이 자본주의적 가치 체계에 포섭된 노동인 한에서,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을 ‘타자의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로서 재생산하는 셈이다. 어떤 활동이 자기 자신을 자유인으로 만들어주기보다 노예로서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활동을 빨리 멈추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노동을 거부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노동을 거부하자고 하면 어떤 이들은 ‘우리 모두 게을러지자는 이야기냐’고 항변한다. 하지만 게으름이나 권태야말로 노동 사회의 이면이다. “권태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 일반에 대한 습관이다. …… 노동에 대한 습관이 강할수록, 더 나아가서 욕망으로 고통을 더 강력하게 받을수록 권태 역시 강력해졌을 것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노동이 자기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자유 활동이 아니므로 사람들은 자유에 대한 별도의 욕구, 심지어 게으름에 대한 욕구까지 갖는 것이다.
노동을 거부하는 일은 게으름이나 나태로 해결되지 않는다. 노동은 자기 가치를 창조하는 자유로운 활동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활동을 노동과 엄격히 구분했던 것이다. ……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싶은 삶의 전사들에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무엇이 선이냐? 너희들은 묻는다. 용맹한 것이 선이다.”(「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그것은 “스스로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태풍”을 갖는 일이며, “베스비오 화산 위에 자신의 도시를 건설하는 일”이기도 하다.(「즐거운 지식」) 하지만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전사라면 그 위험조차 사랑해야 한다. -pp 180
7.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조심하라
무시무시한 괴물의 냉혹한 시기
유서 깊은 민족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스스로의 언어를 만들고 생존에 도움이 되는 선악의 가치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국가는 그것을 가로채서 법으로 공표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선이고 약인지에 대한 언어적 혼란. 이 징표를 나는 국가의 징표로서 너희들에게 제시한다.”(「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국가는 마치 그 누구로부터도 불편부당한 존재인 양, 그 스스로가 보편적 선이고 정의인 양 행세한다. 실제로는 특정한 계층, 특정한 계급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혹은 그 스스로가 특정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사회로부터 초연한 양 거드름을 피운다. “국가에 있어서는 모든 게 거짓스럽다. 심지어 그 내장조차도 거짓스럽다.” -pp 185
자유보다는 복종을, 생명보다는 죽음을 부추기는데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진심어린 봉사를 끌어내는 존재, 그것이 국가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독배를 들게 되는 곳, 나는 그곳을 국가라고 부른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잃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서서히 자신의 목숨을 끊어가면서 ‘생’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pp 187
전쟁을 막는 국가, 국가를 막는 전쟁
더 이상 경쟁자들을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개인도 도시도 쇠퇴한다. 중요한 것은 챔피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전쟁 본능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의 “존중할 만한 적을 찾으라”는 말도 사실은 함께 경영할 친구를 찾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이 전쟁의 참된 의미다. 우리가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화약 냄새 나는 전쟁’은 아주 저급한 전쟁이다. 다양한 가치들의 창조와 그것의 치열한 경쟁을 의미하는 ‘향기 나는 전쟁’이야말로 고차원적인 전쟁인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전쟁을 가르친다. 전쟁을 멈춰서는 안 된다. “국가는 전쟁에 지친 너희들을 꿰뚫어 보고 있다!”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야말로 초월적인 존재의 출현을 막는다. 새로운 우상이 출현했다면 곧바로 전쟁을 벌여라. “유일한 수단은 전쟁 또 전쟁 뿐이다.”(「그리스 국가」) pp 191
9.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다
이미 와 있는 미래
번개의 섬광은 소리보다 먼저 도착했고, 이미 소멸한 별이 지금도 밤하늘에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우주에는 단 하나의 시계만 있는 게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에게 현재인 시간이 그의 청중들에게는 미래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계들은 불일치할 수 있다. 니체가 자신과 동류의 인간들을 ‘미래의 아들들’이라 부르고, 차라투스트라가 “미래라고 하는 나무에 보금자리를 마련한다.”(「천민들에 대하여」)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시계가 당대의 시계보다 앞서 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특히 그 시대가 포착하지 못하는 ‘광기’, ‘탈주’, ‘예외’ 등의 문제를 시간상의 불일치와 관련시켰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다”(「즐거운 지식」) 우리가 누군가를 ‘미쳤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건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사람들과 보편적인 신념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시간이 문제다. 「즐거운 지식」에서 차라투스트라를 상징하는 광인이 등불을 내동댕이쳤던 것도 자신이 너무 일찍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pp 211
가장 늦게 온 손님
시대의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사는 것. 바로 ‘비시대성’이 타임머신 없이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미래로 떠나고 싶다면 지금 여기서 그 미래를 만들어라. 그러면 너는 타임머신에 승선하지 않고도 미래를 살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머무른 채로 떠나기’이며, ‘앉은 채로 유목하기’ 아니겠는가. pp 215
무엇보다도 ‘그랬었다’로 지칭되는 과거는 우리의 의지의 대상이 아니지 않은가. 시간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차라투스트라가 풀어야 할 최고의 난제였다. 그는 그것을 어떻게 풀었던가? 그것은 창조와 생성을 이해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는 과거를 재창조해서 미래로 만들어 줌으로써, 과거에서 미래의 건축 소재를 발견함으로써, 그리고 과거 속에 들어 있던 미래를 발견함으로써 문제를 풀어냈다. “일체의 ‘그랬었다’는 창조하는 의지가 나서서 ‘나는 그것이 그러기를 원했다!’고 말할 때까지는 부서진 파편이요, 수수께끼이자 끔찍한 우연일 뿐이다.”(「주제에 대하여」)
시간상으로 보건대 지금 우리 자신이 서 있는 현재는 가장 늦게 온 손님이다. “가장 늦게 연회에 도착한 손님이라면 구석자리에 앉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연회의 최고 자리에 앉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최대의 일을 하면 된다. 그러면 가장 늦게 도착한 그대들에게도 자리가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당신이 훌륭한 일을 했다면 늦게 오는 것은 상관 없다. 아니 당신은 스타이므로 늦게 오는 것이 더 멋진 일이 아닐까? -pp 216
10. 순수한 인식을 꿈꾸는 자들은 음탕하다
불임증
자기개념, 자기 가치를 생성시키지 못한 채 정해진 사유체계를 따라가는 학자들은 ‘감아진 대로 풀리며 돌아가는 시계태엽’이나 ‘낟알을 던져주면 하얀 가루로 만들어 주는 맷돌’과 같다. 비록 그들이 정말 열심히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일을 수행한다고 해도 그것은 훌륭한 시계태엽이나 훌륭한 맷돌로서 그런 것일 뿐이다. -pp 225
학자들을 위한 사랑학 개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결국 문제는 사랑이고 생성이다. “천진난만함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생식의 의지가 있는 곳에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려는 자, 이 사람이야말로 순수한 의지를 갖는 것이다.”(「순수한 인식에 대하여」) pp 226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결실에 대해서도 기뻐한다. 당신들이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사랑을 향한 의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인지 모른다. “사랑하는 것과 몰락하는 것은 서로 조화를 이룬다. 사랑을 향한 의지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겁쟁이들만이 죽음을 새로운 탄생과 관련지어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두려워서 사랑조차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진리의 어머니이자 친구가 되려하지 그것이 폭군이니 신도가 되려 하지 않는다. 학자 너희들은 스스로의 진리를 낳아야하며 그것의 친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을 주며, 서로가 서로를 변신시켜 주는 관계, 그것이 되어야 한다. 심지어 신조차도 무서운 심판자의 얼굴을 해서는 연인을 얻을 수 없다. 그런 신이 얻는 것은 공포에 떨고 있는 성도들 뿐이다. -pp 227
11. 인간만큼 큰 귀를 보았다
알록달록한 얼굴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지식을 모은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당신도 언젠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용기와 함께 박식함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차라투스트라가 답했다. 박식함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긁어모은 지식들 모두가 그들의 것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현대인들의 얼굴을 알록달록한 얼룩들로 표현한 것은 제 것도 아닌 지식들을 모아 붙여 놓고는 예뻐졌다고 착가하는 현대인들의 위선을 드러내고 심어서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 스스로 자신의 앎을 창조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들이 무언가를 창조하려 했다면 그 많은 지식들은 기꺼이 귀한 재료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창조 속에서라면 그 지식들도 하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재료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창조와 생성의 의미를 모르는 현대인들의 그저 낡은 틀들 속에서 몇 가지 지식들을 훔쳐와 제 몸에 둘렀을 뿐이다. 그러니 현대인들의 정신은 서로 모순적이고 반목할 수밖에 없는 개념들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들의 정신 속에서 온갖 시대가 서로 반목하면서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pp 233
바닥에 붙은 키
내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 하면 난쟁이는 그것이 예전에 이미 시도되었던 낡은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예전에 해봤는데 아무 소용없어!’, ‘너 그러다 큰일 난다. 세상 물정을 통 모르는 녀석이군!’ 뭐 그런 식이다. 지혜와 관심을 가장한 난쟁이의 말들은 자유롭게 비상하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납덩어리이다. ‘중력의 영’은 경험, 관습, 도덕, 법률, 법칙 등 다양한 것들 속에 기거하면서 내 자유로운 비상을 가로막았다.
한동안 말을 멈추고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차라투스트라가 되물었다. ‘유일신이 왜 그리 위대해졌는지 아는가?’ 엉뚱한 질문처럼 느껴졌다. 신이야 원래 위대한 자 아닌가? 그러나 뜻밖의 답이 나왔다. ‘그건 인간들이 왜소해졌기 때문이야.’ 신이 커진 게 아니라 인간들이 작아졌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한없이 작아진 자의 눈에는 별 것도 아닌 것이 대단히 커보이는 법이다. 내가 왜소해진 인간들을 보고 안 되겠다 싶어 새로운 가르침을 주려 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덕을 비방하러 온 줄 알고 적지 않게 경계했다. 그들의 선생이라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답했다. “그렇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왜소하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나는 그들이 신들에게 바친 에너지의 반만큼이라도 자신에게 투자했으면 그렇게 작아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pp 235
전도된 불구자
차라투스트라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을 ‘인간만큼 거대한 귀’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 시대 위대한 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바로 전문가들이 아닌가. 무언가 한 가지 능력만 있는 사람들, 그래서 누구는 귀로, 누구는 입으로 알려졌으며, 누구는 눈으로, 누구는 다리로 전문가가 되었다. 누구는 로봇 팔의 회전각만 연구하고, 누구는 자기공명 장치로 분자구조만 찍으며, 누구는 주식 시세표만 분석하고, 누구는 특정시대 문학 유파에 대해서만 빠삭하다. 전문적인 게 뭐가 문제냐고? 많이 알고 있는 게 잘못이냐고? 그것 자체론 문제도 잘못도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것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한 가지 능력만 키우느라 여러 가지 능력을 퇴화시킨 것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pp 240
만사가 귀찮은 게으름뱅이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으니 이들이 왜 ‘최후의 인간’인지도 알 것 같았다. 이들은 제 발로 선 적이 없는, 그래서 항상 무언가에 의존하고 그것을 숭배해 온 인간의 종착역과도 같다. 들뢰즈가 「니체와 철학」이라는 책에서 잘 정리했지만, 사실 허무주의도 나름의 운동을 한다. 처음에 그것은 세상을 평가절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세상을 그냥 평가절하할 수 없으니 ‘이 세계’와는 다른 ‘저 세계’를 창안하고 모든 진리와 도덕의 기준을 거기에 둔다. 그러고 나서는 ‘저 세계’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천국이라든지, 이데아의 세계라든지 하는 것들이 이렇게 생겨난다. 이 첫 단계를 부정적 허무주의라 한다.
그런데 어느덧 ‘저 세계’에 세워두었던 기준 자체가 의심을 받는 일이 생긴다. 이것이 허무주의 운동이 두 번째 단계인 반동적 허무주의인데, 첫 번째 단계가 ‘저 세계’에 세워둔 고차적 가치에 의한 ‘이 세계’의 평가절하였다면, 이 단계는 기준이 되었던 ‘고차적 가치’ 자체를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와 달리 두 번째 단계에서는 ‘저 세계’ 자체가 전쟁터가 된다. 신의 말을 방지하거나 아예 신의 자리를 꿰차려는 것들이 많아진다. 과학이나 자유, 진보, 최대다수의 행복 등 많은 것들이 고차적 가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한다. 그러나 그런 것도 한두 번이지 그 자리에 앉는 녀석이 계속해서 바뀌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영원히 그 자리를 차지할 녀석은 없을 것이라는 회의감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가치 평가 자체를 무의미하게 보고 그것을 포기하는 일이 나타난다. 이것이 허무주의의 세 번째 단계인 수동적 허무주의이다. ‘모든 것은 헛되다’ ‘해봤자 다 쓸데 없는 것이다.’되는 생각. 허무주의는 이렇게 완성된다.
최후의 인간은 허무주의의 완성이자 전형처럼 보인다. 니체는 현대성(혹은 유럽 민주주의)이 그런 인간형에 기초하고 있고, 그런 인간형을 양산한다고 보았다. 한 무리의 양 떼처럼, 한 무더기의 모래알처럼 그저 모여있을 뿐 아무런 능력도 없는 다수. 이들도 치유가 가능할까? 얼룩쟁이, 난쟁이, 전도된 불구자보다도 더 어려운 환자가 아닐까? 차라투스트라가 웃으며 답한다. “치유 불가능한 환자를 위해 의사가 되고자 해서는 안 된다. …… 종말을 고하는 것은 시구를 짓는 것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의사와 시인들은 이것을 알고 있다.” 종말이라니 너무한 것 아니냐고 묻자 미안했던지 한마디 덧붙인다. ‘피로에 지쳐 쓰러진 자’가 게으름뱅이가 아닌 영웅이라면 “그에게 시원한 비와 함께 잠을 찾아오도록 내버려두자. 잠이 피로를 물리치고 피로로 하여금 스스로의 가르침을 거두어들이게 할 것이다. 다만 그 영웅의 땀을 즐기는 이른바 ‘교양인’으로 불리는 해충들만은 쫓아주자!”(「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pp 246
12. 춤추고 웃는 법을 배워라
포겔프라이(Vogelfrei)-중력의 정신에 맞서
차라투스트라는 단호했다. “重力의 靈은 不俱戴天의 적이다. 나는 그것이 창조한 모든 것, 이를 테면 강제ㆍ율법ㆍ필요와 귀결, 목적과 의지, 선과 악을 뛰어 넘고자 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이해해서 뭔가를 시도하는 자들도 제도와 법, 관습과 도덕이 그어놓은 선을 쉽게 넘어서지 못했다. 조금 벗어났다가도 그들은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다시 돌아왔다.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범죄자마저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었다. 모두가 몸을 사렸다. ‘아무리 신이 죽었다고 그렇게까지야.’ ‘그래도 기본적인 도덕은 서로 지켜야지.’ ‘좋은 이야기이기는 한 데 그게 도대체 얼마나 가능할까.’ ‘괜히 나섰다가 나만 쪽박 차는 거 아냐.’ ‘다 만족하고 살 수가 있나.’ ‘삶이란 원래 고행인거야.’
이래서는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다. 몸을 가볍게 만들어도 시원찮을 판에 코끼리처럼 무거운 발을 해서는 날 수가 없다. 날기는커녕 물구나무서는 것조차 위태로워 보인다. 판갈이를 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새로 배울 수 없다. -pp 251
분명히 우리 주변에도 시대의 중력장에서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기 시대 자기 삶에 대한 거부감으로는 결코 날 수가 없다. 부정과 거부는 여전히 무거운 자들의 정신이다. 중력의 영은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중력의 영이 던진 그물에 걸리면 부정과 거부는 금세 반동이나 허무로 돌변할 수 있다.
무공을 잘못 익히면 몸을 망친다. 특히 이제 날개가 돋기 시작한 어린 새들이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부정을 통해 도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약은 긍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사랑하는 자만이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할 수가 있다. 자기 삶을 부정하는 자는 탈주할 때 고통의 비명이나 분노의 울분을 토한다. 그러나 자기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탈주하는 자, 탈주하는 방식으로 자기 삶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재창조를 위해 기존의 삶을 허무는 자는 탈주하면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다. 즐거움으로 비상했을 때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순진무구한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 때 만이 너와 하늘은 함께 미소짓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pp 253
댄서의 웃음, 코미디언의 춤
웃음과 춤은 중력의 영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보여주는 징표이다. 표정과 걸음걸이만큼 사람들의 생애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의 말보다도 그의 표정과 걸음걸이를 신뢰한다. 자유롭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환하게 웃는 사람, 사뿐사뿐 걷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다. pp 255
13. 세상은 주사위놀이를 하는 신들의 탁자다
세계의 어린이 제우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세계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이 세계의 도덕화를 초래하고 있음을 잘 지적한 바 있다. 태양은 왜 창조되었을까? 비추기 위해서, 바다는 왜 창조되었을까? 물고기를 기르기 위해서. 눈은 왜 창조되었을까? 보기 위해서. 이는? 씹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 최종판. 세계는 왜 창조되었을까? 우리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위해 세계가 창조되었다면 선악이 무엇인지도 분명하다.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 선이고 해로운 것이 악이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해로운 벼락이 치고 해일과 지진이 일어나지? (이쯤 되면 스스로의 해석이 틀렸다고 인정할 듯한데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누군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신이 노한거야. 아니 그럼 저 착한 사람은 빌딩 무너질 때 왜 함께 죽었지? 속으로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아님 신께서 긴히 쓰실 일이 있었던 게지.
차라투스트라는 세상일을 어떤 목적―그것이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 해도―에 꿰어 맞추는 것에 질린 사람이다. 제발 저 “순진무구한 하늘”을 내버려둬라! 제발 사물들을 노예로 만들지 말라! 그는 어떤 목적을 가정하고 그 안에 세상을 가두려는 사람들에게 단단히 화가 났다. 제발 세상의 움직임에 초월적인 목적을 찾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말자! 무슨숭고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상이 ‘노는’ 방식이 그런 것일 수 있지 않느냐.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주사위 놀이’에서 ‘놀이’의 첫 번째 성격이 나타난다. 바로 목적론의 거부가 그것이다. 아마도 노는 데 신성한 목적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성한 목적을 갖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노는 게 아니다. -pp 267
헤라클레이토스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 “왜 그러냐고 묻지 말라. 그것은 하나의 유희일 뿐이다. 그것을 너무 비장하게 특히 도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니체는 이 말에 깜짝 놀랐다. “누가 이런 철학에 대고 ‘너는 무엇무엇을 해야 한다’는 필연적인 명법의 윤리학을 요청할 수 있겠는가!”(「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헤라클레이토스는 ‘놀고 있다’는 말을 통해 세계를 목적론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pp 269
영원한 돌아옴
우리는 학자들의 주사위 던지기와 아이들의 주사위 던지기를 전혀 다른 것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 두 가지 모두 어떤 반복을 나타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학자들의 경우엔 그것이 ‘동일한 법칙’이 확인, 다시 말해서 동일성의 반복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대로 아이들의 경우에 반복되는 것은 새로운 상황,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던지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의 주사위 놀이에서는 ‘행위의 반복’, ‘생성의 반복’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새로움의 반복’, ‘차이의 반복’을 의미한다. pp 276
14. 사자가 못한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예’와 ‘아니오’를 가르친다
자 여기 망치가 하나 놓여 있다. 이것은 긍정의 도구인가 부정의 도구인가, 이것은 창조와 생성의 도구인가 파괴와 해체의 도구인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그 다음을 보아야 한다. 망치가 무너뜨린 건물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만들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파괴를 하고 있을 때조차 창조와 생성의 도구이다. 그것은 부정의 도구가 아니라 긍정의 도구이다. 누군가가 현재의 삶에서 일탈하고 있다면 그것은 긍정일까 부정일까? 그가 단순히 현실에서 도피했을 뿐이라면 그것은 부정이지만 그가 새로운 삶을 생성시키고 있다면 긍정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낡은 가치표를 파괴하는 범죄자’를 칭찬했다. 그러나 그 파괴자가 단지 ‘창백한 범죄자’로 전락하지 않을까 무척 걱정했다. 낡은 삶이 부여하는 의무와 규율의 거부하며 사자처럼 으르렁댈 수도 있고, 약물을 복용해서 그 고통에서 도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결코 긍정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긍정의 아주 중요한 성질을 발견한다. 어떤 행위가 긍정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다음의 긍정에 의해 긍정될 때이다. 파괴가 긍정의 질을 갖기 위해서는 부정이 아닌 긍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의 생성은 다음 번의 생성에 의해 다시 긍정의 질을 획득한다. 한 번의 생성으로 그친다면 다음 번부터 그것은 집착을 의미하게 된다. 한 번의 파괴는 다음의 긍정에 의해, 그리고 한 번의 긍정은 다음의 긍정에 의해 긍정되어야 한다. -pp 298
15.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하나의 매듭
우리는 2부의 첫 장에서 신의 죽음을 다루면서 신이 ‘시체로도 살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신은 언제 죽는가? 그것은 신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 소멸되었을 때이다. 신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 그런 게 있나? 있다. 모든 것의 존재 원인으로 간주되어 왔던 신도 존재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갖는다. 그 원인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신보다 오래된 신앙을 지녔고, 그 신앙으로 신조차 창안했다. 신이 백 번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이유는 바로 신의 창조자인 인간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신앙을 가진 자들은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반대로 생각한다. 그는 신이야말로 인간의 피조물이고 그림자라고 본다. 인간은 태양이 넘어가는 황혼녘에 드러워진 자신의 긴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 그것을 섬기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림자가 사라질 ‘위대한 정오’가 오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 시간은 자기 ‘그림자의 그림자’로 존재했던 인간이 스스로를 극복했을 때 찾아오는 위버멘쉬의 시간이다. 따라서 신의 죽음도 위버멘쉬의 출현도 모두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위버멘쉬’라는 말 자체가 ‘인간을 넘어섬’, ‘인간을 극복함’이라는 뜻이다. -pp 303
인간, 세계의 코미디언
우리는 먼저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특히 자신을 지구, 아니 우주의 특별한 존재로 느끼는 인간의 놀라운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주의 망원경이 항상 자신을 향해 있다고 느끼는 대단한 ‘스타의식’,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창조된 것이라고 믿는 ‘황제병’, 그리고 지구는 자신이 지킨다는 독수리 5형제 식의 ‘주인의식.’ -pp 304
니체는 지구를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인간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숲 속 개미도 숲의 존재 목적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도대체 지구 나이가 몇인지 알고나 있는가? “지구의 나이를 하루로 치면 인간 아니 생명체 자체가 존재한 기간은 한 순간의 타오름에 불과하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런데도 지구라는 행성이 인간을 낳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간은 “세계의 코미디언”이다.
하지만 한 종으로서의 인간 전체가 이런 집단 망상에 빠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집단적 망상을 통해 태어난 신생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인간을 19세기적 산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세기 이전에도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살아갔는데 무슨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분명히 19세기 이전에도 숨쉬는 인간들이 있었고,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말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 때의 사람들은 모두 인간에 대한 객관적 규정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런 것을 갖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기준으로는 영락 없는 인간인 데도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자들(노예 or 야만족 등)이 있었고, 도저히 인간 세계에 들어올 수 없는 자들(반인반수나 천사 등)이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기도 했다.
인간이 자연의 모든 것들과 분리되어서 그 자체로 고찰된 것은 근대에 들어서다. 우리에겐 이상한 일로 생각되지만 인간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책들이 근대 이전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이 같은 상황을 잘 보여준다.(지금까지 발견된 것들 중 인간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책은 15세기 말에 나왔다) 더구나 인간을 하나의 종으로 사유해서 그 능력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은 19세기에 와서다. 칸트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원해도 좋은가’.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인간의 종 전체를 가리킨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 능력, 도덕 능력, 미적 능력을 자기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철학만이 인간을 주목한 게 아니다. 생물학은 진화론을 통해 진화의 쟁점에 있는 인간을 발견했고 경제학은 ‘노동가치설’을 통해 가치의 원천인 노동의 주체로서 인간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인간에 대한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인문학’이라는 말도 처음 생겨났다.
오늘날 인간은 객관적인 얼굴을 갖고 있다. 이제 그 누구도 인간과 다른 존재를 혼동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갖게 됨으로써 인간은 자연이나 세계와 분리된 자신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인간은 자신을 발견해냈던 그 잣대로 자연을 측량하고 계산했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Mensch)이라는 말은 측량자(Messende)를 뜻한다”고 했다. 인간은 자신의 잣대로 자연을 측량하면서 자신이 그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잣대가 자연에 대한 올바른 척도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자연은 인간이 자연의 이름을 부를 때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인간적으로 포착된 자연의 얼굴분이다. 우리는 우리 척도와 맞지 않는 자연이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망각은 세계 안에 존재하면서도 세계를 자신의 저울대 위에 제멋대로 올려 놓을 수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오만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pp 307
진화와 변신
니체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진화론에 거부 반응을 보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진화론에 목적론적 성향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즐거운 지식」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헤겔 철학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헤겔은 역사에 ‘발전’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사람이다. 그는 역사가 목적을 가지고서 자기 자신을 전개한다고 생각했다. 다윈의 진화론 역시 자연의 시간에 어떤 목적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물론 다윈의 진화론은 자신을 ‘자연 안의 특별한 존재’로 간주했던 인간의 자존심에 대단한 상처를 입혔다. 그의 이론은 동물과 인간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니체 역시 다윈의 이 ‘위험한 생각’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과 동물이 연속적이라는 점에 있는 게 아니라 ‘더 고등한 유형’이 ‘더 저급한 유형’을 압도해 왔다는, 즉 저급한 유형에서 고등한 유형으로 생물들이 ‘발전’해 왔다는 사고 방식에 있었다. 사람들은 동물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 차이가 부정됨으로써 입었던 자존심의 상처를 쉽게 회복했다. 인간은 자연 안에 존재하는 가장 고등한 유형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윈 이론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한 ‘사회적 다윈주의’의 경우엔 약소 민족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다윈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조차 했다.
헤겔의 역사철학이 시간 상 늦게 나온 것들을 더 고등한 유형으로 묘사하듯이, 다윈주의 역시 늦게 나온 것들을 더 고등한 유형으로 보고 있다. 이는 강함과 약함, 진보와 퇴보를 시간의 방향에 내맡기는 것과 같다. 다윈이 주장한 실제 내용과는 상관없이 다윈주의는 역사의 진보를 주창하는 이론으로 변질되었으며, 역사에서 살아남거나 뒤늦게 출현한 것들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다윈의 본래 생각과는 큰 차이가 있는 듯하다. 그는 ‘진화’라는 목적론의 냄새가 나는 단어의 사용을 극히 자제했으며, 고등한 존재의 생존이 아니라 환경에 적합한 존재의 생존을 말했고, 시간이 흐르면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거쳐 종들이 다양하게 변신한다는 주장을 폈기 때문이다.) -pp 312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에서 위버멘쉬(超人)로 넘어가는 것이 ‘발전’이나 ‘진화’라기보다는 철저한 ‘몰락’을 거친 ‘변신’임을 주장한다.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발전’과 차라투스트라의 ‘변신’은 전혀 다른 것이다. 위버멘쉬는 인간적인 것의 축적을 통해 일어난 질적 변화가 아니다. 위버멘쉬는 인간적인 그 어떤 것도 승계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것의 철저한 몰락만이 위버멘쉬의 출현 조건이다.
앞 장에서 이야기한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 아이로의 변신을 떠올려 보자. 사자는 낙타의 강화를 통해서 출현한 것도, 낙타의 부정을 통해서 출현한 것도 아니다. 사자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낙타를 닮지 않는다. 낙타가 무조건 ‘예’라고 말하는 짐승이라고 해서 사자가 무조건 ‘아니오’라고만 하는 짐승은 아니다. 사자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해야만 한다’는 명령에 대해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자는 ‘아니오’를 말하는 짐승이 아니라 ‘하고 싶다’고 말하는 짐승이다. 낙타가 자기욕망을 포기한 짐승이라면 사자는 자기욕망을 표출하는 짐승인 것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종이다.
사자와 어린아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사자를 전혀 닮지 않았다. 사자는 ‘아니오’를 말할 때 으르렁거리지만 아이는 ‘아니오’를 말할 때 웃는다. 사자는 자기 욕망을 ‘하고 싶다’로 표출하지만 아이는 자기 욕망을 그대로 실현한다. 아이의 욕망은 ‘하고 싶다’가 아니라 ‘존재한다’이다. -pp 313~314
‘위버멘쉬’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인간을 넘어섬’, 혹은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숨쉬고 있는 생물학적 존재인 사람들의 사망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푸코가 ‘인간의 탄생’을 지칭하면서 말했듯이,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많은 규정들이 있다. 그런 규정들은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 주는, 다시 말해서 우리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들이다. 위버멘쉬란 이런 규정들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순종하느니 차라리 절망하라!” 차라투스트라는 기대를 한껏 높였다. 현실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미래가 만들어 질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좋다! 자!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이제야 비로소 인류의 미래라는 산이 해산의 진통으로 괴로워한다.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의 위버멘쉬가 살게 되기를 소망한다.” -pp 322
그러나 ‘보다 높은 인간들(두 사람의 왕, 실직한 교황, 고약한 마술사,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 정신의 양심가, 가장 추악한 자, 차라투스트라의 그림자를 자처했던 방랑자, 늙은 예언자 등)’은 차라투스트라의 믿음을 철저히 배신하고 말았다. 제 아무리 업그레이드를 했다해도 그들은 여전히 인간이었다. 그들은 제 발로 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차라투스트라는 나귀를 타고 온 왕들을 꾸짖으며 높이 오르려거든 스스로의 발을 사용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보다 높은 인간들에 대하여’_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무언가 의지할 것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 죽어버린 낡은 신을 새로운 신이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들의 공포를 이용해서 퍼져나갔다. 그들은 점차 깊은 신앙의 세계, 순종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었다. -pp 323
이들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들은 왜 신앙의 세계로 다시 돌아간 걸까? 교황의 말처럼 신은 죽었으나 신앙이 남았고, 그 신앙은 새로운 신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신앙을 만드는 것 자체를 그만두지 못했던 것이다. 미신과 주술을 거부하고 실증성과 엄밀성을 최고의 원칙으로 삼는 과학지조차 또 하나의 주술, 또 하나의 신앙에 빠져들 수 있다. 바로 실증성과 엄밀성 자체가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신보다 관찰 가능하고 실험 가능한 신이 좋다는 과학자의 이야기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보다 높은 인간들’은 모두 ‘인간적인 것’에 대한 경멸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데 주저했다. 그들은 ‘인간적인 것’을 비웃은 것까지만 할 뿐 막상 그것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것’에 대한 넘어섬은 역시 ‘인간’인 자신들까지 넘어서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변신이라는 불확실한 과정에 자신을 내맡기기보다는 뭔가 의지할 것을 찾음으로써 자신을 보존하고 지탱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pp 326
차라투스트라는이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차라투스트라의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극복’이었다. “보라, 나는 항상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이다.”(‘자기극복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오늘의 나’를 죽여야 ‘내일의 나’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pp 327
그의 마지막 깨달음은 ‘연민’과 ‘집착’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의 자신에 대한 연민과 집착, 그리고 구원해 주고 싶은 그 누군가에 대한 연민과 집착, 이 모든 것들이 매 순간의 변신을 가로막고 있음을 깨우친 것이다. “나의 고통과 나의 연민,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나는 행복을 열망하고는 있는가? 나는 나의 작품을 열망하고 있을 뿐이다. 좋다! 사자는 왔으며 내 아이들도 가까이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해졌다. 나의 때가 온 것이다”(‘신호’) 어떤 연민이나 집착도 없는 말 그대로의 ‘떠남’, 그것이 그의 위버멘쉬로의 변신이었다. -pp 329
기타
“명령하는 것은 순종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왜냐하면 명령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능력, 그리고 건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저 도덕과 관습이 시키는 대로, 또 법과 제도가 규정한 대로 살아가는 일은 환자나 노예들이 사는 방식이다. -pp 369
너는 과연 이런 고통(양아치가 뱀의 머리를 물어뜯음)을 견딜 수 있는가? “나는 어떻게 나의 삶을 견딜 수 있는가?” 그러나 진정한 긍정은 그것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긍정은 낙타의 인내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무한히 참고 견디기만 해서는 자기 삶을 사막으로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긍정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것은 과감한 실천을 요구한다. “물어뜯으라!” 네 삶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을 그대로 두지 말고 재창조하라. 긍정은 그렇게 말한다.
물론 그 실천은 원한이나 부정이 아니라 사랑과 긍정에서 나와야 한다. 세계와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일을 즐기지 않으면 그것은 긍정이 아니다. 따라서 긍정은 삶에 대한 다른 감수성을 요구한다. 똑같은 것이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기쁨의 원인이어야 하므로 긍정은 신체의 변화를 요구한다. 자기 삶을, 그리고 그것을 바꾸는 실천을 모두 고통으로 여기는 자에게는 쉽게 피로가 찾아올 것이다. 손에 든 망치가 원한에 사무친 파괴의 도구가 될지, 아니면 새로운 건설을 위한 기쁨의 창조도구가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어떤 권력의지 이래서 수행되느냐에 달린 문제다. -pp 381
그는 하늘과 대지를 주사위 놀이가 이루어지는 두 개의 바닥으로 이해한다. 하늘에 던져진 주사위는 순진무구한 우연을 나타낸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주사위는 새로운 말들, 새로운 의미들을 결정하는 필연이다. 주사위는 던져질 때마다 우연을 갖는다. 우연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흩어진 단순한 파편들도 아니고 무질서한 아나키 상태도 아니다. 의미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진다. 세계도 망가진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 진다. 주사위가 떠났던 대지는 주사위가 도착한 대지와 다르다. 주사위가 떨어진 순간 대지는 불길을 쏟아내며 새로운 대지로 변신한다. 주사위를 돌려받은 차라투스트라는 예전의 차라투스트라가 아니므로 이전보다 더 높이 주사위를 던진다.
이제 난쟁이를 대하는 차라투스트라의 태도에 한결 자신이 있다.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너는 왜 피로한 말들을 뱉는가? 너는 왜 동일한 것만이 반복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바로 너의 부정의 권력의지 때문이다. 세상을 모든 피로한 자들로 만들어서, 세상을 모두 약자로 만들어서 지배력을 확보하는 너의 권력의지가 그렇게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사위 놀이에서 반복되는 것은 ‘던지기’일 뿐 동일한 ‘눈’이 아니다. 동일한 눈이 나왔다해도 그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며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낸다. 주사위는 다시 내게 돌아오지만 그것은 나에게 다시 던져 달라고 말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던지고 있는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 반복하라! 그러나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그것은 이름의 돌아옴이 아니라 행위의 돌아옴이다. -pp 383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현재 입장에서 부당하게 과거를 단죄해선 안 된다. 과거는 미래의 기획 속에서 다뤄져야 한다. 아마 차라투스트라는 ‘심판’이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니체의 말에 100% 동의할 것이다. 사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는 과거를 심판할 필요가 없다. 사랑하면 된다. 그는 과거 속에서 미래를 위한 소재를 발견한다. 과거 속에서도 미래를 찾아내는 사람ㆍBack to the future할 수 있는 사람은 과거에 원한을 갖지 않는다. -pp 384
차라투스트라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을 묶어 줄 우리 시대의 굳건한 돛대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그 부하들처럼 밀랍으로 귀를 막은 채 그저 노만 저을 것인가. 둘 다 아니다. 뛰어들지 않은 채 그저 즐기기만 하는, 행여 끌려 들어갈까 봐 시대의 기둥 하나에 제 몸을 단단히 묶어 두는, 그런 지식인 무리들이 밀랍으로 귀를 막은 자들보다 나을 게 무언가.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귀를 열고 위험에 스스로를 내던져야 한다. -pp 9~10
그는 에머슨(Emerson)의 글을 인용하기도 했다. “위대한 신이 우리 행성에 한 사상가를 오게 할 때, 그대들은 조심하라. 그때 모든 것은 위험에 처해진다.” 사물들의 질서가 뒤바뀌며 순식간에 인간적 노력의 모든 체계가 전복될 것이다. 니체는 말할 것이다. 난 위험 인물이다. 그러나 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정작 두려운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노래가 아니라 당신이 계속 듣고 있으면서도 듣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노래이다. 정작 두려운 것은 저 먼 데서 들려오는 유혹의 노래가 아니라, 너무 중독되어 그 중독성조차 모르는 우리 시대의 소음과 습속들이다. 나 같은 사상가가 두려운가. 당신은 위험하지 않은 사상가들을 찾는가. “우리 대학의 사상가들은 왜 위험하지 않은지 아는가. 그들의 사상은 평온하게 인습적인 것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마 디오게네스의 말이 어울릴 것이다.
‘오래 철학을 했으면서도 아직 누구도 슬프게 한 적이 없는데 도대체 어떤 위대한 일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은 시작과 끝만이 아니라 생애의 대부분에서 주인노릇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왜 만들어 놓은지도 모르는 가치와 규범에 복종하고, 미리 정해져 있던 길을 따라 의미없는 생을 이어간다면 그 생은 죽음보다도 비참한 게 아닐까. -pp 22
기독교도들은 사람들에게 ‘이 세계’가 죄로 가득 차 있고 천국은 오직 ‘저 세계’에만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삶이란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그 이유를 오직 우리가 지은 죄탓으로 돌린다. 우리가 그들의 함정에 말려들어 삶에 대해 불행한 느낌을 크게 가질수록 우리는 더 큰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점점 삶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다는 심판이나 지옥 같은 공상적 이야기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삶을 죽음을 준비하는데 쓰는, 이른바 ‘삶을 배신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pp 27
새로운 신체, 그리고 安住
분명히 차라투스트라가 그 옛날 에덴 동산의 뱀처럼 다가와, 신의 모든 말씀이 거짓이라고 말할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도저히 버릴 수 없을 것 같은 가치와 신념들을 조롱하고, 때로는 그것들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우리 자신을 비웃기도 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을 묶어 줄 우리 시대의 굳건한 돛대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그 부하들처럼 밀랍으로 귀를 막은 채 그저 노만 저을 것인가. 둘 다 아니다. 뛰어들지 않은 채 그저 즐기기만 하는, 행여 끌려 들어갈까봐 시대의 기둥하나에 제 몸을 단단히 묶어 두는, 그런 지식인 무리들이 밀랍으로 귀를 막은 자들보다 나을 게 무언가.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귀를 열고 위험에 스스로를 내던져야 한다.
니체는 그와 관계 맺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위험이다. 니체 주석가들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그것을 말해왔다. 그러나 니체는 웃으며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예외적인 사람들이며 위험인물들이다.” 그는 에머슨의 글을 인용하기도 했다. “위대한 신이 우리 행성에 한 사상가를 오게 할 때, 그대들은 조심하라. 그 때 모든 것은 위험에 처해진다.” 사물의 질서가 뒤바뀌며 순식간에 인간적 노력의 모든 체계가 전복될 것이다. 니체는 말할 것이다. 난 위험 인물이다. 그러나 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정작 두려운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노래가 아니라 당신이 계속 듣고 있으면서도 듣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노래이다. 정작 두려운 것은 저 먼 데서 들려오는 유혹의 노래가 아니라, 너무 중독되어 그 중독조차 모르는 우리 시대의 소음과 습속들이다. 나 같은 사상가가 두려운가. 당신은 위험하지 않은 사상가들을 찾는가. “우리 대학의 사상가들은 왜 위험하지 않은지 아는가. 그들의 사상은 평온하게 인습적인 것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마 디오게네스의 말이 어울릴 것이다. ‘오래 철학을 했으면서도 아직 누구도 슬프게 한 적이 없는데 도대체 어떤 위대한 일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 적혀 있던 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미지수가 들어서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미지수 X 위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문 부호를 들고 찾아온 한 사상가로 인해 우리의 삶이 대단한 위험에 빠진 듯 허둥댄다. 그러나 답이 사라질 때 오답도 함께 사라진다는 걸 알아야 한다. 정해진 답에 삶을 꿰맞추는 건 끝났다. 이제 우리 삶을 위해 답이 수정될 것이다. 당신의 삶도, 당신이 사는 세계도 말랑말랑한 진흙덩어리로 당신 앞에 놓여 있다. 니체는 그저 기대에 찬 눈으로 당신 작품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pp 12
확고한 토대
사람들은 확고한 토대도 없는 이상들을 왜 그렇게 쉽게 믿으려 하는 것일까? 확고하지도 않은 토대에 대한 믿음이 왜 그렇게 확고한 것일까? 니체는 사람들이 그런 이상들을 자신들의 생존조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무언가 확고한 도덕, 무언가 확실한 진리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잘 따져보지도 않고 쉽게 믿어 버린다. 대개 제 스스로 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할 것을 찾는 데 지나치게 서두르는 법이다. -pp 35
망각은 무언가를 단순히 잊어버리는 부정적인 작업이 아니다. 니체에게 망각은 하나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수만 개를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자기 안에 카오스를 만드는 것과 같다. 카오스란 길의 사라짐이 아니라 길의 과잉이다. 그것은 한 개의 시각이 갖는 특권을 제거하는 대신 수만 개의 시각이 가능함을 보이는 것이다. 니체는 자신이 질병과 치유를 반복함으로써 무엇보다도 ‘하나의 시각[퍼스펙티브]만을 갖는 맹목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다’고 말한다. 또한 니체는 이 과정을 ‘수많은 대립적 사유 방법에 길을 내주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너는 너 자신을 멸망시킬 태풍을 네 안에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의 자아, 하나의 주체성에 그토록 익숙한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영혼의 단일성을 기정하는 기독교식의 사고 방식 때문일 수도 있고, 모든 술어에다 주어를 쓰는 언어적 습관(‘번개가 친다’는 말에서처럼, 섬광이나 소리를 숨어 있는 번개라는 주체의 행위인 듯 묘사하는 언어습관)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다양하게 나타나는 행동들을 단일한 자아, 단일한 주체로 환원시킴으로써 행동에 대한 책임을 환기시키려는 도덕적 의지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pp 48
한 정서의 특권적 지배는 그 신체의 변신 능력을 떨어뜨린다. 불행히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제도나 장치들이 힘들의 동일한 배치를 습속화하도록 만들고 있으며, 힘들을 점차 과소 상태로 만들고 있다. 니체가 관습이나 제도, 법 등에 그토록 적대적 태도를 보였던 것도 그것들이 우리에게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양식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또 니체가 서구의 민주주의를 “힘의 해방이 아닌 피로함의 해방”이라고 불렀던 것도, 정치적 힘들의 과소 상태를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다양한 정치적 힘들을 투표 용지에 흡수함으로써(정치 행위는 투표 행위로 축소되고, 다양성은 나열된 항을 선택하는 문제로 제한됨으로써), 민주주의는 “미래를 낳는 능력을 상실한다”. -pp 49
2. 너희는 너희 가치를 창조하라
시장으로부터 멀어져라
가치의 보편적인 척도인 양 제시되는 화폐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환상을 심어준다. 가령 그림과 책은 그 가치를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질적으로 상이한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폭에 100만원, 한 권에 1만원 하는 식의 화폐 양으로 표시되면, 그 그림 한 폭은 그 책 한 권의 100배 가치를 갖는 것처럼 인식된다. 물건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활동도 그런 식으로 가치가 매겨진다. 고귀한 활동이든 천박한 활동이든 일단 ‘노동력’이라는 상품으로 변질되면, 활동의 가치는 화폐 양으로 표시되며, 따라서 판매와 구매가 가능해진다. -pp 116
강함과 선함
니체는 「서광」에서 “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한다.”고 비꼬면서 “일반화 할 수 없는 것들까지 일반화하려 하기 때문에 도덕이 항상 기괴한 모습을 띠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도덕의 역사 자체는 그런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대와 역사, 종족과 문화에 따라 수많은 선악의 기준들이 존재해 왔다. 우리가 보편적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들은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시대, 우리 문화에 한정된 것이다.
가령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어떤 고대 국가들에서는 거짓말을 ‘적을 속이는 탁월한 기술’로 높이 평가한다. ‘시기심’을 나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도덕책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서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신의 말씀이 그대로 새겨졌다고 하는 ‘십계’만 하더라도, 여성을 집에 있는 가축과 같은 재산으로 다루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날 여성을 남성의 재산처럼 다루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실제 역사를 보면 선악에 관한 수천 개의 도덕적 기준이 존재해 왔고, 오늘날에도 선악에 대한 판단 기준은 엄청나게 많이 존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끔찍한 전쟁들의 대부분이 선악에 대한 보편적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강박에서 나온 것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전쟁은 상대방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그에 맞서는 자신을 ‘선의 수호자’로 생각하는 잘못된 가치 판단 양식에서 나오는 훨씬 많다.
선하고 의로운 자들을 조심하라
그 누구도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인간은 진실로 사물들에 가치를 심으며, 어떤 것은 ‘좋은’ 것인지, 어떤 것이 ‘나쁜’ 것인지를 판단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것을 ‘선함’과 ‘악함’으로 판단할 때 그것이 무척 위험하다. 전체를 포괄하는 ‘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기 준에 부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철저한 배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pp 123
3. 사랑을 가르친다. 벗을 가르친다
사랑이라 불리지만 사랑이 아닌 것
어떤 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우상화해서 스스로 복종하는 노예가 되고, 어떤 이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그 대상을 구속해서 노예로 삼는다. 이러한 구속은 희생이라는 아름다운 포장지를 뒤집어쓰고, ‘진정한 사랑’이라는 영예를 얻기도 한다. 우리의 사랑 감별 수준은 인간적으로 길들인 강아지를 안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우정은 사랑이 구속이 아닌 자유여야함을 잘 보여준다. -pp 129
무언가 서로에게 줄 것이 있어, 자신에게 넘쳐나는 것이 있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받고 싶은 것이 있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어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결혼이다. 풍성한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을 서로를 선물하는 친구로 만들어 주지만,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사랑의 식물은 상대방을 구속하는 가시울타리로 자라난다. -pp 131
이웃 사랑에는 항상 주변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주변과 결탁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다 보니 “다섯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면 여섯 번째 사람은 항상 매장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먼 이웃을 ‘왕따’ 시키는 것이 이웃 사랑의 위험이다. 그렇게 패거리를 짜고 군중을 형성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독을 선택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pp 132
5. 신체야말로 큰 이성이다
창백한 범죄자
판관은 왜 그렇게 범죄자의 ‘의도’를 알아내는데 집착했던 걸까? 행위의 의도를 밝히는 것이 죄를 성립시키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는 행위자가 할 뜻이 있어서 행해진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우상의 황혼」) 니체는 여기에 “인간을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 만들려는 심리학”이 작동하고 있고, “책임을 따지는 것은 처벌하고 심판하려는 본능”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행위자는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 그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한 선택을 했다. 따라서 그는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니체는 이것이 심판을 끌어들이기 위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신학자들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자유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죄를 지었다면 신은 그 인간을 심판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니체는 말한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도록 창안된 것이다.” 자유의지의 창안은 “인류가 신학자들에게 의존하게 만드는데 사용되는 기술 중 가장 못돼먹은 기술이다.” -pp 166
신체는 생성하는 그 무엇이다
니체는 정신과 신체의 전통적인 위계를 뒤집고 있다. 그는 「권력의지」에서 “정신을 믿는 것보다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소유물이자 가장 확실한 존재인 신체를 믿는 쪽이 낫다.”고 말한다. 그는 정신이나 영혼, 주제에 대한 비판을 통해 신체의 중요성을 복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신체는 정신의 상대물인 육신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이나 육체보다 높은 차원의 것이다. pp 166
우리 안에는 어떤 자극에 대해 기쁨을, 다른 자극에 대해 슬픔을 느끼도록 하는, 그리고 어떤 행위를 바람직하다고 장려하고, 다른 행위를 사악하다고 금지하는 기준들이 있다. 특정한 정서들이 그 기준으로 차지하고 지배력을 확보하면 우리에겐 하나의 정체성이 생겨난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그런 정서들이 다른 정서들에 의해 전복되면 기쁨과 슬픔,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은 달라지게 되고, 결국 정체성 또한 완전히 달라진다. 교육을 비롯해서 정체성을 심고 관리하는 수많은 제도와 장치들 덕분에 우리는 비교적 고정된 정체성을 갖는 듯 하지만, 우리 신체 안에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정서들 사이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신체에 대해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라고 말했다. -pp 167
신체란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힘들의 복합체에 다름 아니다. 그런 힘들의 갈등과 경쟁이 조정을 거쳐 일시적인 평화를 유지할 때, 힘들의 잠정적인 중심을 우리는 ‘자아’ 혹은 ‘주체’라고 부른다. 자아의 입장에서야 어느 것 위에서든 제발 편히 오래 머물고 싶겠지만, 신체를 구성하는 힘들은 호시탐탐 자아를 낚아챌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의 영역은 힘 중심에 따라 계속해서 성장하거나 감소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신과 육신의 주인 자리는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다. 신체는 항상 당신의 극복을 꿈꾸는 생성의 존재인 것이다. -pp 168
6. 노동이 아니라 전쟁을 권한다.
노동에 대한 허영심과 수치심
니체는 ‘노동에 대한 찬미’와 ‘노동으로 피폐해진 삶’의 모순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근면한 사람을 칭찬한다. 그가 바로 그 근면 때문에 자신의 시력을 해치고 정신의 독창성이나 참신함을 상실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즐거운 지식」) 그는 근대 노동자가 고대 노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기 노동에 대한 독특한 위안을 가지고 있는 점뿐이라고 말한다. …… 노동하지 않을 수 없게 내몰면서도 노동하는 것을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물인 양, 심지어는 대단한 권리인 양 떠드는 현실을 니체는 “허깨비”이자 “환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아주 수치스러운 하면서도 사실상 “임금노예”인 자신의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노동을 찬미하는 일에 쉽게 동의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대 노예보다 더 가지고 있는 건 바로 ‘허영심’이다. -pp 174
물론 고대 사회에도 노동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고, ‘어떻게 노동 없는 사회가 가능하겠느냐’는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동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주장과 그것을 찬미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별개다. 노동에 수치심을 갖고 있는 사회는 그것을 줄이고 어떻게든 자유로운 활동을 늘리려 하겠지만, 노동에 허영심을 갖고 있는 사회는 그것을 확산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보기에는 허영심에 빠져 기본적인 권리와 존엄의 의미도 망각하고 있는 근대인들이야말로 노예 중의 노예다. -pp 175
노동이 아니라 전쟁이다
한 행동의 가치는 어떤 보편적인 잣대에 의해 정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행동이란 능력이나 지식, 욕망의 복합체로서, 그것이 구성되는 방식과 양상에 따라 가치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떤 효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만,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얼마나 많은 화폐를 획득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만 가치를 정한다. -pp 177
노동을 착취한 자들이 앞으로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를지는 알 수 없지만, 노동을 착취당한 자들은 지금까지 너무 큰 대가를 치러왔다. 노동으로 인한 심신의 상실도 컸지만 더욱 큰 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할 능력을 상실한 점이다. 그들의 노동은 가치를 창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그 가치는 그들이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핵심은 ‘생산한 가치를 빼앗겼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고 ‘타인의 가치’를 생산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활동이 자본주의적 가치 체계에 포섭된 노동인 한에서,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을 ‘타자의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로서 재생산하는 셈이다. 어떤 활동이 자기 자신을 자유인으로 만들어주기보다 노예로서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활동을 빨리 멈추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노동을 거부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노동을 거부하자고 하면 어떤 이들은 ‘우리 모두 게을러지자는 이야기냐’고 항변한다. 하지만 게으름이나 권태야말로 노동 사회의 이면이다. “권태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 일반에 대한 습관이다. …… 노동에 대한 습관이 강할수록, 더 나아가서 욕망으로 고통을 더 강력하게 받을수록 권태 역시 강력해졌을 것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노동이 자기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자유 활동이 아니므로 사람들은 자유에 대한 별도의 욕구, 심지어 게으름에 대한 욕구까지 갖는 것이다.
노동을 거부하는 일은 게으름이나 나태로 해결되지 않는다. 노동은 자기 가치를 창조하는 자유로운 활동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활동을 노동과 엄격히 구분했던 것이다. ……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싶은 삶의 전사들에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무엇이 선이냐? 너희들은 묻는다. 용맹한 것이 선이다.”(「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그것은 “스스로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태풍”을 갖는 일이며, “베스비오 화산 위에 자신의 도시를 건설하는 일”이기도 하다.(「즐거운 지식」) 하지만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전사라면 그 위험조차 사랑해야 한다. -pp 180
7.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조심하라
무시무시한 괴물의 냉혹한 시기
유서 깊은 민족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스스로의 언어를 만들고 생존에 도움이 되는 선악의 가치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국가는 그것을 가로채서 법으로 공표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선이고 약인지에 대한 언어적 혼란. 이 징표를 나는 국가의 징표로서 너희들에게 제시한다.”(「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국가는 마치 그 누구로부터도 불편부당한 존재인 양, 그 스스로가 보편적 선이고 정의인 양 행세한다. 실제로는 특정한 계층, 특정한 계급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혹은 그 스스로가 특정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사회로부터 초연한 양 거드름을 피운다. “국가에 있어서는 모든 게 거짓스럽다. 심지어 그 내장조차도 거짓스럽다.” -pp 185
자유보다는 복종을, 생명보다는 죽음을 부추기는데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진심어린 봉사를 끌어내는 존재, 그것이 국가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독배를 들게 되는 곳, 나는 그곳을 국가라고 부른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잃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서서히 자신의 목숨을 끊어가면서 ‘생’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pp 187
전쟁을 막는 국가, 국가를 막는 전쟁
더 이상 경쟁자들을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개인도 도시도 쇠퇴한다. 중요한 것은 챔피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전쟁 본능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의 “존중할 만한 적을 찾으라”는 말도 사실은 함께 경영할 친구를 찾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이 전쟁의 참된 의미다. 우리가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화약 냄새 나는 전쟁’은 아주 저급한 전쟁이다. 다양한 가치들의 창조와 그것의 치열한 경쟁을 의미하는 ‘향기 나는 전쟁’이야말로 고차원적인 전쟁인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전쟁을 가르친다. 전쟁을 멈춰서는 안 된다. “국가는 전쟁에 지친 너희들을 꿰뚫어 보고 있다!”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야말로 초월적인 존재의 출현을 막는다. 새로운 우상이 출현했다면 곧바로 전쟁을 벌여라. “유일한 수단은 전쟁 또 전쟁 뿐이다.”(「그리스 국가」) pp 191
9.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다
이미 와 있는 미래
번개의 섬광은 소리보다 먼저 도착했고, 이미 소멸한 별이 지금도 밤하늘에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우주에는 단 하나의 시계만 있는 게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에게 현재인 시간이 그의 청중들에게는 미래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계들은 불일치할 수 있다. 니체가 자신과 동류의 인간들을 ‘미래의 아들들’이라 부르고, 차라투스트라가 “미래라고 하는 나무에 보금자리를 마련한다.”(「천민들에 대하여」)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시계가 당대의 시계보다 앞서 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특히 그 시대가 포착하지 못하는 ‘광기’, ‘탈주’, ‘예외’ 등의 문제를 시간상의 불일치와 관련시켰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다”(「즐거운 지식」) 우리가 누군가를 ‘미쳤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건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사람들과 보편적인 신념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시간이 문제다. 「즐거운 지식」에서 차라투스트라를 상징하는 광인이 등불을 내동댕이쳤던 것도 자신이 너무 일찍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pp 211
가장 늦게 온 손님
시대의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사는 것. 바로 ‘비시대성’이 타임머신 없이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미래로 떠나고 싶다면 지금 여기서 그 미래를 만들어라. 그러면 너는 타임머신에 승선하지 않고도 미래를 살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머무른 채로 떠나기’이며, ‘앉은 채로 유목하기’ 아니겠는가. pp 215
무엇보다도 ‘그랬었다’로 지칭되는 과거는 우리의 의지의 대상이 아니지 않은가. 시간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차라투스트라가 풀어야 할 최고의 난제였다. 그는 그것을 어떻게 풀었던가? 그것은 창조와 생성을 이해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는 과거를 재창조해서 미래로 만들어 줌으로써, 과거에서 미래의 건축 소재를 발견함으로써, 그리고 과거 속에 들어 있던 미래를 발견함으로써 문제를 풀어냈다. “일체의 ‘그랬었다’는 창조하는 의지가 나서서 ‘나는 그것이 그러기를 원했다!’고 말할 때까지는 부서진 파편이요, 수수께끼이자 끔찍한 우연일 뿐이다.”(「주제에 대하여」)
시간상으로 보건대 지금 우리 자신이 서 있는 현재는 가장 늦게 온 손님이다. “가장 늦게 연회에 도착한 손님이라면 구석자리에 앉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연회의 최고 자리에 앉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최대의 일을 하면 된다. 그러면 가장 늦게 도착한 그대들에게도 자리가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당신이 훌륭한 일을 했다면 늦게 오는 것은 상관 없다. 아니 당신은 스타이므로 늦게 오는 것이 더 멋진 일이 아닐까? -pp 216
10. 순수한 인식을 꿈꾸는 자들은 음탕하다
불임증
자기개념, 자기 가치를 생성시키지 못한 채 정해진 사유체계를 따라가는 학자들은 ‘감아진 대로 풀리며 돌아가는 시계태엽’이나 ‘낟알을 던져주면 하얀 가루로 만들어 주는 맷돌’과 같다. 비록 그들이 정말 열심히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일을 수행한다고 해도 그것은 훌륭한 시계태엽이나 훌륭한 맷돌로서 그런 것일 뿐이다. -pp 225
학자들을 위한 사랑학 개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결국 문제는 사랑이고 생성이다. “천진난만함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생식의 의지가 있는 곳에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려는 자, 이 사람이야말로 순수한 의지를 갖는 것이다.”(「순수한 인식에 대하여」) pp 226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결실에 대해서도 기뻐한다. 당신들이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사랑을 향한 의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인지 모른다. “사랑하는 것과 몰락하는 것은 서로 조화를 이룬다. 사랑을 향한 의지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겁쟁이들만이 죽음을 새로운 탄생과 관련지어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두려워서 사랑조차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진리의 어머니이자 친구가 되려하지 그것이 폭군이니 신도가 되려 하지 않는다. 학자 너희들은 스스로의 진리를 낳아야하며 그것의 친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을 주며, 서로가 서로를 변신시켜 주는 관계, 그것이 되어야 한다. 심지어 신조차도 무서운 심판자의 얼굴을 해서는 연인을 얻을 수 없다. 그런 신이 얻는 것은 공포에 떨고 있는 성도들 뿐이다. -pp 227
11. 인간만큼 큰 귀를 보았다
알록달록한 얼굴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지식을 모은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당신도 언젠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용기와 함께 박식함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차라투스트라가 답했다. 박식함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긁어모은 지식들 모두가 그들의 것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현대인들의 얼굴을 알록달록한 얼룩들로 표현한 것은 제 것도 아닌 지식들을 모아 붙여 놓고는 예뻐졌다고 착가하는 현대인들의 위선을 드러내고 심어서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 스스로 자신의 앎을 창조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들이 무언가를 창조하려 했다면 그 많은 지식들은 기꺼이 귀한 재료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창조 속에서라면 그 지식들도 하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재료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창조와 생성의 의미를 모르는 현대인들의 그저 낡은 틀들 속에서 몇 가지 지식들을 훔쳐와 제 몸에 둘렀을 뿐이다. 그러니 현대인들의 정신은 서로 모순적이고 반목할 수밖에 없는 개념들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들의 정신 속에서 온갖 시대가 서로 반목하면서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pp 233
바닥에 붙은 키
내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 하면 난쟁이는 그것이 예전에 이미 시도되었던 낡은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예전에 해봤는데 아무 소용없어!’, ‘너 그러다 큰일 난다. 세상 물정을 통 모르는 녀석이군!’ 뭐 그런 식이다. 지혜와 관심을 가장한 난쟁이의 말들은 자유롭게 비상하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납덩어리이다. ‘중력의 영’은 경험, 관습, 도덕, 법률, 법칙 등 다양한 것들 속에 기거하면서 내 자유로운 비상을 가로막았다.
한동안 말을 멈추고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차라투스트라가 되물었다. ‘유일신이 왜 그리 위대해졌는지 아는가?’ 엉뚱한 질문처럼 느껴졌다. 신이야 원래 위대한 자 아닌가? 그러나 뜻밖의 답이 나왔다. ‘그건 인간들이 왜소해졌기 때문이야.’ 신이 커진 게 아니라 인간들이 작아졌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한없이 작아진 자의 눈에는 별 것도 아닌 것이 대단히 커보이는 법이다. 내가 왜소해진 인간들을 보고 안 되겠다 싶어 새로운 가르침을 주려 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덕을 비방하러 온 줄 알고 적지 않게 경계했다. 그들의 선생이라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답했다. “그렇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왜소하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나는 그들이 신들에게 바친 에너지의 반만큼이라도 자신에게 투자했으면 그렇게 작아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pp 235
전도된 불구자
차라투스트라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을 ‘인간만큼 거대한 귀’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 시대 위대한 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바로 전문가들이 아닌가. 무언가 한 가지 능력만 있는 사람들, 그래서 누구는 귀로, 누구는 입으로 알려졌으며, 누구는 눈으로, 누구는 다리로 전문가가 되었다. 누구는 로봇 팔의 회전각만 연구하고, 누구는 자기공명 장치로 분자구조만 찍으며, 누구는 주식 시세표만 분석하고, 누구는 특정시대 문학 유파에 대해서만 빠삭하다. 전문적인 게 뭐가 문제냐고? 많이 알고 있는 게 잘못이냐고? 그것 자체론 문제도 잘못도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것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한 가지 능력만 키우느라 여러 가지 능력을 퇴화시킨 것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pp 240
만사가 귀찮은 게으름뱅이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으니 이들이 왜 ‘최후의 인간’인지도 알 것 같았다. 이들은 제 발로 선 적이 없는, 그래서 항상 무언가에 의존하고 그것을 숭배해 온 인간의 종착역과도 같다. 들뢰즈가 「니체와 철학」이라는 책에서 잘 정리했지만, 사실 허무주의도 나름의 운동을 한다. 처음에 그것은 세상을 평가절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세상을 그냥 평가절하할 수 없으니 ‘이 세계’와는 다른 ‘저 세계’를 창안하고 모든 진리와 도덕의 기준을 거기에 둔다. 그러고 나서는 ‘저 세계’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천국이라든지, 이데아의 세계라든지 하는 것들이 이렇게 생겨난다. 이 첫 단계를 부정적 허무주의라 한다.
그런데 어느덧 ‘저 세계’에 세워두었던 기준 자체가 의심을 받는 일이 생긴다. 이것이 허무주의 운동이 두 번째 단계인 반동적 허무주의인데, 첫 번째 단계가 ‘저 세계’에 세워둔 고차적 가치에 의한 ‘이 세계’의 평가절하였다면, 이 단계는 기준이 되었던 ‘고차적 가치’ 자체를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와 달리 두 번째 단계에서는 ‘저 세계’ 자체가 전쟁터가 된다. 신의 말을 방지하거나 아예 신의 자리를 꿰차려는 것들이 많아진다. 과학이나 자유, 진보, 최대다수의 행복 등 많은 것들이 고차적 가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한다. 그러나 그런 것도 한두 번이지 그 자리에 앉는 녀석이 계속해서 바뀌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영원히 그 자리를 차지할 녀석은 없을 것이라는 회의감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가치 평가 자체를 무의미하게 보고 그것을 포기하는 일이 나타난다. 이것이 허무주의의 세 번째 단계인 수동적 허무주의이다. ‘모든 것은 헛되다’ ‘해봤자 다 쓸데 없는 것이다.’되는 생각. 허무주의는 이렇게 완성된다.
최후의 인간은 허무주의의 완성이자 전형처럼 보인다. 니체는 현대성(혹은 유럽 민주주의)이 그런 인간형에 기초하고 있고, 그런 인간형을 양산한다고 보았다. 한 무리의 양 떼처럼, 한 무더기의 모래알처럼 그저 모여있을 뿐 아무런 능력도 없는 다수. 이들도 치유가 가능할까? 얼룩쟁이, 난쟁이, 전도된 불구자보다도 더 어려운 환자가 아닐까? 차라투스트라가 웃으며 답한다. “치유 불가능한 환자를 위해 의사가 되고자 해서는 안 된다. …… 종말을 고하는 것은 시구를 짓는 것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의사와 시인들은 이것을 알고 있다.” 종말이라니 너무한 것 아니냐고 묻자 미안했던지 한마디 덧붙인다. ‘피로에 지쳐 쓰러진 자’가 게으름뱅이가 아닌 영웅이라면 “그에게 시원한 비와 함께 잠을 찾아오도록 내버려두자. 잠이 피로를 물리치고 피로로 하여금 스스로의 가르침을 거두어들이게 할 것이다. 다만 그 영웅의 땀을 즐기는 이른바 ‘교양인’으로 불리는 해충들만은 쫓아주자!”(「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pp 246
12. 춤추고 웃는 법을 배워라
포겔프라이(Vogelfrei)-중력의 정신에 맞서
차라투스트라는 단호했다. “重力의 靈은 不俱戴天의 적이다. 나는 그것이 창조한 모든 것, 이를 테면 강제ㆍ율법ㆍ필요와 귀결, 목적과 의지, 선과 악을 뛰어 넘고자 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이해해서 뭔가를 시도하는 자들도 제도와 법, 관습과 도덕이 그어놓은 선을 쉽게 넘어서지 못했다. 조금 벗어났다가도 그들은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다시 돌아왔다.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범죄자마저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었다. 모두가 몸을 사렸다. ‘아무리 신이 죽었다고 그렇게까지야.’ ‘그래도 기본적인 도덕은 서로 지켜야지.’ ‘좋은 이야기이기는 한 데 그게 도대체 얼마나 가능할까.’ ‘괜히 나섰다가 나만 쪽박 차는 거 아냐.’ ‘다 만족하고 살 수가 있나.’ ‘삶이란 원래 고행인거야.’
이래서는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다. 몸을 가볍게 만들어도 시원찮을 판에 코끼리처럼 무거운 발을 해서는 날 수가 없다. 날기는커녕 물구나무서는 것조차 위태로워 보인다. 판갈이를 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새로 배울 수 없다. -pp 251
분명히 우리 주변에도 시대의 중력장에서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기 시대 자기 삶에 대한 거부감으로는 결코 날 수가 없다. 부정과 거부는 여전히 무거운 자들의 정신이다. 중력의 영은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중력의 영이 던진 그물에 걸리면 부정과 거부는 금세 반동이나 허무로 돌변할 수 있다.
무공을 잘못 익히면 몸을 망친다. 특히 이제 날개가 돋기 시작한 어린 새들이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부정을 통해 도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약은 긍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사랑하는 자만이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할 수가 있다. 자기 삶을 부정하는 자는 탈주할 때 고통의 비명이나 분노의 울분을 토한다. 그러나 자기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탈주하는 자, 탈주하는 방식으로 자기 삶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재창조를 위해 기존의 삶을 허무는 자는 탈주하면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다. 즐거움으로 비상했을 때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순진무구한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 때 만이 너와 하늘은 함께 미소짓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pp 253
댄서의 웃음, 코미디언의 춤
웃음과 춤은 중력의 영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보여주는 징표이다. 표정과 걸음걸이만큼 사람들의 생애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의 말보다도 그의 표정과 걸음걸이를 신뢰한다. 자유롭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환하게 웃는 사람, 사뿐사뿐 걷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다. pp 255
13. 세상은 주사위놀이를 하는 신들의 탁자다
세계의 어린이 제우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세계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이 세계의 도덕화를 초래하고 있음을 잘 지적한 바 있다. 태양은 왜 창조되었을까? 비추기 위해서, 바다는 왜 창조되었을까? 물고기를 기르기 위해서. 눈은 왜 창조되었을까? 보기 위해서. 이는? 씹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 최종판. 세계는 왜 창조되었을까? 우리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위해 세계가 창조되었다면 선악이 무엇인지도 분명하다.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 선이고 해로운 것이 악이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해로운 벼락이 치고 해일과 지진이 일어나지? (이쯤 되면 스스로의 해석이 틀렸다고 인정할 듯한데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누군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신이 노한거야. 아니 그럼 저 착한 사람은 빌딩 무너질 때 왜 함께 죽었지? 속으로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아님 신께서 긴히 쓰실 일이 있었던 게지.
차라투스트라는 세상일을 어떤 목적―그것이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 해도―에 꿰어 맞추는 것에 질린 사람이다. 제발 저 “순진무구한 하늘”을 내버려둬라! 제발 사물들을 노예로 만들지 말라! 그는 어떤 목적을 가정하고 그 안에 세상을 가두려는 사람들에게 단단히 화가 났다. 제발 세상의 움직임에 초월적인 목적을 찾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말자! 무슨숭고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상이 ‘노는’ 방식이 그런 것일 수 있지 않느냐.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주사위 놀이’에서 ‘놀이’의 첫 번째 성격이 나타난다. 바로 목적론의 거부가 그것이다. 아마도 노는 데 신성한 목적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성한 목적을 갖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노는 게 아니다. -pp 267
헤라클레이토스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 “왜 그러냐고 묻지 말라. 그것은 하나의 유희일 뿐이다. 그것을 너무 비장하게 특히 도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니체는 이 말에 깜짝 놀랐다. “누가 이런 철학에 대고 ‘너는 무엇무엇을 해야 한다’는 필연적인 명법의 윤리학을 요청할 수 있겠는가!”(「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헤라클레이토스는 ‘놀고 있다’는 말을 통해 세계를 목적론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pp 269
영원한 돌아옴
우리는 학자들의 주사위 던지기와 아이들의 주사위 던지기를 전혀 다른 것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 두 가지 모두 어떤 반복을 나타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학자들의 경우엔 그것이 ‘동일한 법칙’이 확인, 다시 말해서 동일성의 반복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대로 아이들의 경우에 반복되는 것은 새로운 상황,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던지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의 주사위 놀이에서는 ‘행위의 반복’, ‘생성의 반복’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새로움의 반복’, ‘차이의 반복’을 의미한다. pp 276
14. 사자가 못한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예’와 ‘아니오’를 가르친다
자 여기 망치가 하나 놓여 있다. 이것은 긍정의 도구인가 부정의 도구인가, 이것은 창조와 생성의 도구인가 파괴와 해체의 도구인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그 다음을 보아야 한다. 망치가 무너뜨린 건물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만들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파괴를 하고 있을 때조차 창조와 생성의 도구이다. 그것은 부정의 도구가 아니라 긍정의 도구이다. 누군가가 현재의 삶에서 일탈하고 있다면 그것은 긍정일까 부정일까? 그가 단순히 현실에서 도피했을 뿐이라면 그것은 부정이지만 그가 새로운 삶을 생성시키고 있다면 긍정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낡은 가치표를 파괴하는 범죄자’를 칭찬했다. 그러나 그 파괴자가 단지 ‘창백한 범죄자’로 전락하지 않을까 무척 걱정했다. 낡은 삶이 부여하는 의무와 규율의 거부하며 사자처럼 으르렁댈 수도 있고, 약물을 복용해서 그 고통에서 도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결코 긍정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긍정의 아주 중요한 성질을 발견한다. 어떤 행위가 긍정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다음의 긍정에 의해 긍정될 때이다. 파괴가 긍정의 질을 갖기 위해서는 부정이 아닌 긍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의 생성은 다음 번의 생성에 의해 다시 긍정의 질을 획득한다. 한 번의 생성으로 그친다면 다음 번부터 그것은 집착을 의미하게 된다. 한 번의 파괴는 다음의 긍정에 의해, 그리고 한 번의 긍정은 다음의 긍정에 의해 긍정되어야 한다. -pp 298
15.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하나의 매듭
우리는 2부의 첫 장에서 신의 죽음을 다루면서 신이 ‘시체로도 살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신은 언제 죽는가? 그것은 신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 소멸되었을 때이다. 신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 그런 게 있나? 있다. 모든 것의 존재 원인으로 간주되어 왔던 신도 존재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갖는다. 그 원인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신보다 오래된 신앙을 지녔고, 그 신앙으로 신조차 창안했다. 신이 백 번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이유는 바로 신의 창조자인 인간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신앙을 가진 자들은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반대로 생각한다. 그는 신이야말로 인간의 피조물이고 그림자라고 본다. 인간은 태양이 넘어가는 황혼녘에 드러워진 자신의 긴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 그것을 섬기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림자가 사라질 ‘위대한 정오’가 오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 시간은 자기 ‘그림자의 그림자’로 존재했던 인간이 스스로를 극복했을 때 찾아오는 위버멘쉬의 시간이다. 따라서 신의 죽음도 위버멘쉬의 출현도 모두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위버멘쉬’라는 말 자체가 ‘인간을 넘어섬’, ‘인간을 극복함’이라는 뜻이다. -pp 303
인간, 세계의 코미디언
우리는 먼저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특히 자신을 지구, 아니 우주의 특별한 존재로 느끼는 인간의 놀라운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주의 망원경이 항상 자신을 향해 있다고 느끼는 대단한 ‘스타의식’,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창조된 것이라고 믿는 ‘황제병’, 그리고 지구는 자신이 지킨다는 독수리 5형제 식의 ‘주인의식.’ -pp 304
니체는 지구를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인간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숲 속 개미도 숲의 존재 목적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도대체 지구 나이가 몇인지 알고나 있는가? “지구의 나이를 하루로 치면 인간 아니 생명체 자체가 존재한 기간은 한 순간의 타오름에 불과하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런데도 지구라는 행성이 인간을 낳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간은 “세계의 코미디언”이다.
하지만 한 종으로서의 인간 전체가 이런 집단 망상에 빠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집단적 망상을 통해 태어난 신생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인간을 19세기적 산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세기 이전에도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살아갔는데 무슨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분명히 19세기 이전에도 숨쉬는 인간들이 있었고,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말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 때의 사람들은 모두 인간에 대한 객관적 규정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런 것을 갖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기준으로는 영락 없는 인간인 데도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자들(노예 or 야만족 등)이 있었고, 도저히 인간 세계에 들어올 수 없는 자들(반인반수나 천사 등)이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기도 했다.
인간이 자연의 모든 것들과 분리되어서 그 자체로 고찰된 것은 근대에 들어서다. 우리에겐 이상한 일로 생각되지만 인간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책들이 근대 이전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이 같은 상황을 잘 보여준다.(지금까지 발견된 것들 중 인간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책은 15세기 말에 나왔다) 더구나 인간을 하나의 종으로 사유해서 그 능력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은 19세기에 와서다. 칸트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원해도 좋은가’.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인간의 종 전체를 가리킨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 능력, 도덕 능력, 미적 능력을 자기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철학만이 인간을 주목한 게 아니다. 생물학은 진화론을 통해 진화의 쟁점에 있는 인간을 발견했고 경제학은 ‘노동가치설’을 통해 가치의 원천인 노동의 주체로서 인간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인간에 대한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인문학’이라는 말도 처음 생겨났다.
오늘날 인간은 객관적인 얼굴을 갖고 있다. 이제 그 누구도 인간과 다른 존재를 혼동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갖게 됨으로써 인간은 자연이나 세계와 분리된 자신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인간은 자신을 발견해냈던 그 잣대로 자연을 측량하고 계산했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Mensch)이라는 말은 측량자(Messende)를 뜻한다”고 했다. 인간은 자신의 잣대로 자연을 측량하면서 자신이 그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잣대가 자연에 대한 올바른 척도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자연은 인간이 자연의 이름을 부를 때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인간적으로 포착된 자연의 얼굴분이다. 우리는 우리 척도와 맞지 않는 자연이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망각은 세계 안에 존재하면서도 세계를 자신의 저울대 위에 제멋대로 올려 놓을 수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오만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pp 307
진화와 변신
니체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진화론에 거부 반응을 보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진화론에 목적론적 성향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즐거운 지식」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헤겔 철학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헤겔은 역사에 ‘발전’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사람이다. 그는 역사가 목적을 가지고서 자기 자신을 전개한다고 생각했다. 다윈의 진화론 역시 자연의 시간에 어떤 목적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물론 다윈의 진화론은 자신을 ‘자연 안의 특별한 존재’로 간주했던 인간의 자존심에 대단한 상처를 입혔다. 그의 이론은 동물과 인간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니체 역시 다윈의 이 ‘위험한 생각’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과 동물이 연속적이라는 점에 있는 게 아니라 ‘더 고등한 유형’이 ‘더 저급한 유형’을 압도해 왔다는, 즉 저급한 유형에서 고등한 유형으로 생물들이 ‘발전’해 왔다는 사고 방식에 있었다. 사람들은 동물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 차이가 부정됨으로써 입었던 자존심의 상처를 쉽게 회복했다. 인간은 자연 안에 존재하는 가장 고등한 유형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윈 이론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한 ‘사회적 다윈주의’의 경우엔 약소 민족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다윈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조차 했다.
헤겔의 역사철학이 시간 상 늦게 나온 것들을 더 고등한 유형으로 묘사하듯이, 다윈주의 역시 늦게 나온 것들을 더 고등한 유형으로 보고 있다. 이는 강함과 약함, 진보와 퇴보를 시간의 방향에 내맡기는 것과 같다. 다윈이 주장한 실제 내용과는 상관없이 다윈주의는 역사의 진보를 주창하는 이론으로 변질되었으며, 역사에서 살아남거나 뒤늦게 출현한 것들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다윈의 본래 생각과는 큰 차이가 있는 듯하다. 그는 ‘진화’라는 목적론의 냄새가 나는 단어의 사용을 극히 자제했으며, 고등한 존재의 생존이 아니라 환경에 적합한 존재의 생존을 말했고, 시간이 흐르면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거쳐 종들이 다양하게 변신한다는 주장을 폈기 때문이다.) -pp 312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에서 위버멘쉬(超人)로 넘어가는 것이 ‘발전’이나 ‘진화’라기보다는 철저한 ‘몰락’을 거친 ‘변신’임을 주장한다.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발전’과 차라투스트라의 ‘변신’은 전혀 다른 것이다. 위버멘쉬는 인간적인 것의 축적을 통해 일어난 질적 변화가 아니다. 위버멘쉬는 인간적인 그 어떤 것도 승계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것의 철저한 몰락만이 위버멘쉬의 출현 조건이다.
앞 장에서 이야기한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 아이로의 변신을 떠올려 보자. 사자는 낙타의 강화를 통해서 출현한 것도, 낙타의 부정을 통해서 출현한 것도 아니다. 사자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낙타를 닮지 않는다. 낙타가 무조건 ‘예’라고 말하는 짐승이라고 해서 사자가 무조건 ‘아니오’라고만 하는 짐승은 아니다. 사자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해야만 한다’는 명령에 대해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자는 ‘아니오’를 말하는 짐승이 아니라 ‘하고 싶다’고 말하는 짐승이다. 낙타가 자기욕망을 포기한 짐승이라면 사자는 자기욕망을 표출하는 짐승인 것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종이다.
사자와 어린아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사자를 전혀 닮지 않았다. 사자는 ‘아니오’를 말할 때 으르렁거리지만 아이는 ‘아니오’를 말할 때 웃는다. 사자는 자기 욕망을 ‘하고 싶다’로 표출하지만 아이는 자기 욕망을 그대로 실현한다. 아이의 욕망은 ‘하고 싶다’가 아니라 ‘존재한다’이다. -pp 313~314
‘위버멘쉬’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인간을 넘어섬’, 혹은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숨쉬고 있는 생물학적 존재인 사람들의 사망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푸코가 ‘인간의 탄생’을 지칭하면서 말했듯이,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많은 규정들이 있다. 그런 규정들은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 주는, 다시 말해서 우리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들이다. 위버멘쉬란 이런 규정들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순종하느니 차라리 절망하라!” 차라투스트라는 기대를 한껏 높였다. 현실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미래가 만들어 질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좋다! 자!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이제야 비로소 인류의 미래라는 산이 해산의 진통으로 괴로워한다.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의 위버멘쉬가 살게 되기를 소망한다.” -pp 322
그러나 ‘보다 높은 인간들(두 사람의 왕, 실직한 교황, 고약한 마술사,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 정신의 양심가, 가장 추악한 자, 차라투스트라의 그림자를 자처했던 방랑자, 늙은 예언자 등)’은 차라투스트라의 믿음을 철저히 배신하고 말았다. 제 아무리 업그레이드를 했다해도 그들은 여전히 인간이었다. 그들은 제 발로 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차라투스트라는 나귀를 타고 온 왕들을 꾸짖으며 높이 오르려거든 스스로의 발을 사용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보다 높은 인간들에 대하여’_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무언가 의지할 것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 죽어버린 낡은 신을 새로운 신이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들의 공포를 이용해서 퍼져나갔다. 그들은 점차 깊은 신앙의 세계, 순종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었다. -pp 323
이들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들은 왜 신앙의 세계로 다시 돌아간 걸까? 교황의 말처럼 신은 죽었으나 신앙이 남았고, 그 신앙은 새로운 신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신앙을 만드는 것 자체를 그만두지 못했던 것이다. 미신과 주술을 거부하고 실증성과 엄밀성을 최고의 원칙으로 삼는 과학지조차 또 하나의 주술, 또 하나의 신앙에 빠져들 수 있다. 바로 실증성과 엄밀성 자체가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신보다 관찰 가능하고 실험 가능한 신이 좋다는 과학자의 이야기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보다 높은 인간들’은 모두 ‘인간적인 것’에 대한 경멸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데 주저했다. 그들은 ‘인간적인 것’을 비웃은 것까지만 할 뿐 막상 그것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것’에 대한 넘어섬은 역시 ‘인간’인 자신들까지 넘어서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변신이라는 불확실한 과정에 자신을 내맡기기보다는 뭔가 의지할 것을 찾음으로써 자신을 보존하고 지탱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pp 326
차라투스트라는이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차라투스트라의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극복’이었다. “보라, 나는 항상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이다.”(‘자기극복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오늘의 나’를 죽여야 ‘내일의 나’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pp 327
그의 마지막 깨달음은 ‘연민’과 ‘집착’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의 자신에 대한 연민과 집착, 그리고 구원해 주고 싶은 그 누군가에 대한 연민과 집착, 이 모든 것들이 매 순간의 변신을 가로막고 있음을 깨우친 것이다. “나의 고통과 나의 연민,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나는 행복을 열망하고는 있는가? 나는 나의 작품을 열망하고 있을 뿐이다. 좋다! 사자는 왔으며 내 아이들도 가까이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해졌다. 나의 때가 온 것이다”(‘신호’) 어떤 연민이나 집착도 없는 말 그대로의 ‘떠남’, 그것이 그의 위버멘쉬로의 변신이었다. -pp 329
기타
“명령하는 것은 순종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왜냐하면 명령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능력, 그리고 건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저 도덕과 관습이 시키는 대로, 또 법과 제도가 규정한 대로 살아가는 일은 환자나 노예들이 사는 방식이다. -pp 369
너는 과연 이런 고통(양아치가 뱀의 머리를 물어뜯음)을 견딜 수 있는가? “나는 어떻게 나의 삶을 견딜 수 있는가?” 그러나 진정한 긍정은 그것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긍정은 낙타의 인내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무한히 참고 견디기만 해서는 자기 삶을 사막으로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긍정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것은 과감한 실천을 요구한다. “물어뜯으라!” 네 삶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을 그대로 두지 말고 재창조하라. 긍정은 그렇게 말한다.
물론 그 실천은 원한이나 부정이 아니라 사랑과 긍정에서 나와야 한다. 세계와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일을 즐기지 않으면 그것은 긍정이 아니다. 따라서 긍정은 삶에 대한 다른 감수성을 요구한다. 똑같은 것이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기쁨의 원인이어야 하므로 긍정은 신체의 변화를 요구한다. 자기 삶을, 그리고 그것을 바꾸는 실천을 모두 고통으로 여기는 자에게는 쉽게 피로가 찾아올 것이다. 손에 든 망치가 원한에 사무친 파괴의 도구가 될지, 아니면 새로운 건설을 위한 기쁨의 창조도구가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어떤 권력의지 이래서 수행되느냐에 달린 문제다. -pp 381
그는 하늘과 대지를 주사위 놀이가 이루어지는 두 개의 바닥으로 이해한다. 하늘에 던져진 주사위는 순진무구한 우연을 나타낸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주사위는 새로운 말들, 새로운 의미들을 결정하는 필연이다. 주사위는 던져질 때마다 우연을 갖는다. 우연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흩어진 단순한 파편들도 아니고 무질서한 아나키 상태도 아니다. 의미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진다. 세계도 망가진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 진다. 주사위가 떠났던 대지는 주사위가 도착한 대지와 다르다. 주사위가 떨어진 순간 대지는 불길을 쏟아내며 새로운 대지로 변신한다. 주사위를 돌려받은 차라투스트라는 예전의 차라투스트라가 아니므로 이전보다 더 높이 주사위를 던진다.
이제 난쟁이를 대하는 차라투스트라의 태도에 한결 자신이 있다.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너는 왜 피로한 말들을 뱉는가? 너는 왜 동일한 것만이 반복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바로 너의 부정의 권력의지 때문이다. 세상을 모든 피로한 자들로 만들어서, 세상을 모두 약자로 만들어서 지배력을 확보하는 너의 권력의지가 그렇게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사위 놀이에서 반복되는 것은 ‘던지기’일 뿐 동일한 ‘눈’이 아니다. 동일한 눈이 나왔다해도 그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며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낸다. 주사위는 다시 내게 돌아오지만 그것은 나에게 다시 던져 달라고 말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던지고 있는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 반복하라! 그러나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그것은 이름의 돌아옴이 아니라 행위의 돌아옴이다. -pp 383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현재 입장에서 부당하게 과거를 단죄해선 안 된다. 과거는 미래의 기획 속에서 다뤄져야 한다. 아마 차라투스트라는 ‘심판’이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니체의 말에 100% 동의할 것이다. 사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는 과거를 심판할 필요가 없다. 사랑하면 된다. 그는 과거 속에서 미래를 위한 소재를 발견한다. 과거 속에서도 미래를 찾아내는 사람ㆍBack to the future할 수 있는 사람은 과거에 원한을 갖지 않는다. -pp 384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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