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대상이 바로 ‘나’다”
아무리 심한(?) 배신을 당했다 할지라도 애초 모든 사건이 자신으로부터 비롯했음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원인이 될 때, 사랑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열심히 사랑한 다음, 그 대가로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천국인 것. 거기에는 배신과 복수 따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따라서 복수혈전이 펼쳐진다는 건 그 사랑의 원인이 내가 아니라, 상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 이렇듯,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한마디로 대상만 잘 고르면 만사형통이라 여기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건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고, 아직까지 사랑을 못해 본 건 ‘이상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14쪽
상식적인 말이지만, 사랑 따로 대상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나와 사랑과 대상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사랑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각자 따로 존재하다 서로 플러스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노동이거나 거래지. 그러므로, 노동이나 거래가 아닌 제대로된 사랑을 꿈꾼다면, 반드시 환기해야 한다. 사랑과 대상과 나 사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 나아가 사랑하는 대상,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15쪽
실연은 행운이다
죽기 위해 사랑을 하는 인간은 없다. 살기 위해, 더 충만하게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럼 산다는 건 뭘까? 존재외 자유와 해방을 향한 여정이다. …… 그러므로 연애와 존재가 충돌하면 당연히 존재를 택해야 한다. ……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나에게 엄청난 호의를 베풀고 있는 상대를 뿌리친다는 건 웬만한 배짱이 아니고선 결코 쉽지 않다. “지옥으로 가는 길엔 호의와 친절로 가득 차 있다.”는 건 그 때문이리라. -16쪽
결별의 진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랑할 때 아무 이유가 없었듯이, 헤어질 때 역시 마찬가지다. …… 굳이 원인을 찾는다면, 시절인연이 어긋난 탓이라고밖에는.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듯이 말이다. 사람도, 삶도 마찬가지다. 시절인연이 바뀌면 서로 헤어져야 한다. 심하게 말하면 어떤 사건들 때문에 헤어진다기보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 그런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그러니 이 역할극에서 더 불리한 건 먼저 결별을 선언하는 쪽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가책과 회한을 짊어지고 다녀야 할 테니 말이다. 차이는 쪽은 그 반대다. 처음엔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후련해진다. 하여, 아주 가뿐하게 길을 떠날 수 있다. 고로, 실연은 행운이다! 나로 하여금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미리 미리 길을 ‘비켜 준’ 존재들한테 축복 있기를! -17쪽
자의식
“자의식이라는 것은,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점점 더 예민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일거수일투족도 자연스럽게 할 수 없게 되지. …… 앉으나 서나 ‘나’, 자나 깨나 ‘나’가 항상 따라다니기 때문에 인간의 언행이나 행위가 공산품처럼 자질구레해지고, 저절로 옹색해지고, 세상이 괴로워질 뿐이어서 아침부터 밤까지 마치 맞선 보는 젊은 남녀처럼 잔뜩 긴장한 상태로 지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거거든. …… 사시사철 두리번두리번 살금살금하면서,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잠시도 안심할 수 없는 게 현대인이 안고 있는 마음의 병이야. 문명의 저주인 거지” -나쓰메 소세키 著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그의 말대로 이 자의식은 문명의 저주다. 타자와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기 때문이다. -42쪽
열정과 충동
충동이란 무엇인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래서 늘 충동적 상태로 치닫는 힘이다. 나에게 엄청난 쾌락을 주긴 하지만, 그 원인은 늘 외부에 있따. 그러므로 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나는 노예적으로 끄달리게 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죽음충동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알코올과 마약, 게임, 도박 같은 걸 떠올리면 된다. 열정은 정확히 그 반대의 벡터를 지닌다. 즉, 아무리 뜨겁게 솟구친다 해도 삶의 의지와 연동되어 있다. 그러므로 절대 중독되지 않는다. 충동이 존재 전체를 불안으로 요동치게 한다면, 열정은 ‘유래 없는 평온’을 선사한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대개의 연인들은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한다. 그래서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 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 분명한 건 충동이 잦아들어야만 열정이 순연히 타오를 수 있다는 점. 그렇지 못할 경우, 둘 중 하나의 코스를 밟는다. 순식간에 냉각 되거나 아니면 중독 되거나, 쿨하거나 미치거나! -46쪽
차거나 차이거나
사랑이 둘만의 역학적 배치를 만들어 내는 건 맞다. 또 열정의 차이에 따라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맞다. 헌데, 가장 중요한 건 시절인연이다. 말하자면, 대상이 누구냐보다 언제 어디서 만났느냐가 더 결정적이다. 즉, 어떤 특별한 ‘시공간적 배치’ 속에서 사랑이라는 특별한 감정이 생기고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그 관계에 균열이 일어났다면, 즉 누군가 먼저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일단 둘의 인생행로에 커다란 ‘시공간적 격차’가 생겼다는 걸 의미한다.
…… 어떤 경우건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사건에는 두 사람의 성향 및 행로를 포함하여 시공간적 흐름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
반쪽이는 없다
중요한 건 반쪽이를 향한 무한도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짝을 찾는 일이다. 함께 걸으려면 최소한 방향이나 시선이 갚아야 한다.
…… 시절인연이란 서로 다른 길을 가던 두 사람이 어떤 강한 촉발에 의해 공통의 리듬을 구성하게 된 특정한 시간대를 뜻한다. 일종의 매트릭스 같은 것이다. 사랑은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다.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가 아니라, 내 안에 잠재하고 있던 욕망이 표면으로 솟구칠 때 사랑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 욕망이 솟아오르려면 시절을 타야 한다. 시절을 타게 되면 아주 작은 촉발만으로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 시절인연이 바뀌면 아무리 불같던 사랑이라도 결별을 맞이한다. -61쪽
美德은 不運
니체가 말했다. 벗을 원한다면, 그를 위해서 기꺼이 전쟁이라도 일으킬 각오를 해야 한다,고. 친구사이만 그러겠는가. 연인 사이, 부모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다. 희생이라는 포장 속에 어설픈 평화를 누리가보다 솔직하게 서로의 욕망을 드러내면서 화끈하게 전투를 벌이는 것이 사랑의 본래 면목에 더 가깝지 않을까. 고로, 희생과 헌신이라는 미덕만큼 사랑과 거리가 먼 항목도 없다. -68쪽
變奏(走)
사람은 평생 단 하나의 병만을 앓는다는 말이 있다. 신체적으로 볼 때, 하나의 약한 고리를 중심으로 다양한 병들이 변주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사람은 평생 단 한 종류의 연애만 한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위안이나 동정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사랑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진정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법이다. -79쪽
精
「동의보감」에 따르면 생명의 원천은 精ㆍ氣ㆍ神이다. ‘농담’의 설명을 덧붙이면, 외부세계가 나한테 개입하는 것 ‘神’, 내가 외부세계를 향해 쓰는 기운이 ‘氣’라고 할 때, 氣와 神이 마주치는 교집합만큼 精이 형성된다. 존재와 외부의 상응, 딱 그만큼이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 곧 精이다. 헌데, 기운이 온통 외부를 향해 치달으면 내 안에 精이 쌓일 여지가 없어진다. 사지말단의 말초신경만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이 부족하면 제일 많이 생기는 것이 공포심이다. 그리고 이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수단이 쾌락 아니면 냉소다. 작업의 기본 패턴이 딱 이렇지 않은가. -149쪽
자의식을 무너뜨릴 힘
니체는 말했다. “네 안에 너를 멸망시킬 태중이 있는가?” 나를 멸망시킨다는 건 바로 지금까지의 나, 자아 혹은 자의식의 성채를 무너뜨리는 힘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 순간, ‘신체의 역동적인 복합성’이 만개하게 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사랑에 빠지면 우리의 신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쟁과 평화를 경험한다. 혹은 들개처럼 날뛰기도 하고, 혹은 뱀처럼 똬리를 튼 채 독을 내뿜기도 한다. 그야말로 나 자신과의 전면전이 벌어진다. 이런 식의 폭풍을 체험할 수 있다면, 가히 운명적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터. 사랑을 통한 존재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것도 바로 이 순간이다.
…… 그러므로 진정,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나를 멸망시킬 용기가 있는가?” -154쪽
상상에서 관찰로!
많은 커플들이 수년간 연애를 하고 심지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살면서도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신체적 감응이 아니라 망상 속의 이미지만을 교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오래 살면 살수록 정이 쌓이는 게 아니라 소외가 심화되는 역설이 일어난다. -155쪽
실연은 없다
‘실연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실패란 없으며, 사랑이 끝난 다음엔 실패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따져 봐도, 사랑과 실패라는 개념은 공존불가능하다. 사랑은 대상이 나를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어 가는 시공간적 인연의 장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연은 없다! 생명이 그 자체로 기쁨인 것처럼. -172쪽
결별과 극복
“열흘 걸려 나을 병은 열흘 앓아야 한다.”(농담)는 말이 있다. 사랑의 고통 역시 마찬가지다. 어설픈 위안을 꾀하지 말고 차라리 아플 만큼 충분히! 아픈 게 훨씬 낫다. -178쪽
결별로 인해 고통을 받을 때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 들일 수 있다면, 그 고통은 휴식이 될 수 있다. 질병을 통해 인생의 전기가 마련되듯이, 결별 자체가 축복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위해서 그런 진통을 겪은 것이 아닐까. 질병이 오는 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전략 가운데 하나다. 결별 또한 그렇다. 충격과 아픔을 수반하는 건 틀림없지만, 생명의 관점에서보면 그것이 삶을 유지하는 최선책일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해서 나를 ‘버리고’ 떠난 이들에게 진정 감사하는 순간이 도래할 것이다.
…… 그러므로 정말 복수하고 싶다면 성난 얼굴로 들어보라! 그런 인연의 장을 만든 자기 자신을, 자신을 얽어매는 온갖 망상들을. 그리고 나서 고개를 돌리고 성큼! 길을 나서라. -179쪽
발원하라! ‘고양이-되기’
부처님은 인간의 모든 번뇌의 뿌리에는 ‘貪瞋癡’가 있다고 했다. 탐욕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 물론 셋은 나란히 함께 간다. 그런데 사랑만큼 이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건도 없다. 대상을 맹렬하게 욕망하고(貪), 그것이 뜻대로 안 되면 분노의 화염에 휩싸이고(瞋), 그 다음엔 앞이 깜깜해지는 무명의 늪(癡)에 빠진다. 간신히 그 늪에서 벗어난 다음엔 다시 똑같은 틀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이 貪瞋癡의 사슬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아주 간단하다. 간절히 발원하면 된다! 발원은 욕심과 다르다. 아니, 그 반대다. 욕심이 내가 상대를 소유하기 위해 안달하는 것이라면, 발원은 자기로부터 벗어나 더 큰 인연의 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즉, 그것은 ‘현재의 나’와 ‘대상’을 고정시켜 놓고 대상만 나에게 굴러 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이라는 “사건 속으로 入流하는 것”(농담)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선 마음을 어지럽히는 각종 번잡한 것들을 다 놓아 버려야 한다. -184쪽
간절히 원하면 당연히 이루어진다. 천 리 밖의 공간, 사회적 통념, 시간의 벽, 어떤 난관도 간단히 뛰어넘을 수 있다. “당신은 어차피 저를 좋아하실 겁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미리 좋아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작가 이외수는 지금의 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프로포즈 했다고 한다. 당시 부인은 ‘미스 강원’이었고, 자신은 빈털터리 거지에 가까웠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믿음, 사랑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걸 수 있다고 확신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186쪽
짝사랑과 시절인연
짝사랑도 이렇게 하면 된다. 일단 인연이 교차하기 시작하면, 수많은 변곡점들이 생기게 되면서 그러다 보면 시절인연을 만나게 된다. “어떤 현장조건하고 내가 투입하고자 하는 기운하고 만났는데 전기가 바짝 통해서 불이 환하게 들어”(농담) 오면 그게 바로 시절인연이다. 시절인연을 만나면 구체적인 행동방식은 저절로 결정된다. …… 그런 점에서 원초적으로 짝사랑이란 없다! 더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 아주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진정한 결실이다. 그러니 간절히 발원하라. 그리고 때를 기다리라. -188쪽
주인되어 홀로 가기
“언제나 그 스스로가 농사짓는 농부가 되라. 이 존재세계의 因이 되어라. 주인이 되라.”
우리 모두가 인이 될 때, 이 인과 인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걸 因緣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은 인연, 이거는 인연이 성숙되지 않았거나 인연이 넘었다, 인연이 끝났다 그럽니다. 그래서 인연이 성숙되지 않은 중생은 부처도 구제하지 못한다 그러죠. 사무치게 한 번 생각해봅시다. 緣이 되지 말고, 因이 되라는 소리. 이게 바로 ‘닦는다’는 개념입니다. -농담 「삶과 수행」-
고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혼자 갈 수 있는 자만이 누군가를 사무치게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니. -230쪽
운명애 (Amor Fati)
대상은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을 하고 싶어도 사람이 없다는 말은 결국 대상을 창조할 능력이 없다는 뜻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몸이 무겁다. 자의식도 엄청 강하다. 몸이 무겁고 자의식이 강하다는 건 사랑을 가로막는 각종 망상들을 몸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붙이고 다닌다는 뜻이다. 그런 상태로 누군가가 나타나 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인연이 올 리가 있는가? 만약 자신의 그런 케이스라고 여겨진다면, 일단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나의 욕망이 어떤 가치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는가를. 내 몸의 동선이 어떤 식으로 왜곡되어 있는가를. 그리고 일단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려는 투지를 불태워야 한다. 그런 다음엔 전전긍긍하지 말고 시절인연이 오기를 기다려라. 대신 그냥 기다리면 왔다가도 휘리릭 지나갈 뿐 아니라, 겨우 이어진다해도 지리멸렬한 상태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니 그냥 멍하게 기다리지 말고 욕망의 코드를 바꾸기 위한 치밀한 훈련을 해야 한다. - 257쪽
만약 그게 싫다면? 그냥 자신의 운명을 즐기면 된다. 대신 결핍이 없어야 한다. 결핍을 속으로 쌓아 두면 입장이 더욱 두터워질 테니까. 그리고 사랑을 하지 않고도 충만하게 살려면 연애보다 더 크고 넓은 비전이 있어야 할 테니, 역시 그걸 위해서도 몸과 마음, 그리고 운명에 대한 통찰을 멈춰서는 안 된다. -258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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