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깨우침
옛날 분들은 가르치는 것을 ‘깨우친다’고 했습니다. 모르던 것을 이야기만 듣고 알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13~14쪽
차후에 알게 되는 것
우리의 강의는 여기 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 갈 것입니다.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날 문득 인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들이 모여서 운명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 나가다 그것이 서로 연결되어 선이 되고 인연이 됩니다. 그리고 인연들이 모여 面이 되고 場이 됩니다. 들뢰즈는 장을 배치agencement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담론들은 5년 후, 10년 후 고독한 밤길을 걷다가 문득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추억은 세월과 함께 서서히 잊혀 가다가 어느 날 문득 가슴 찌르는 아픔이 되어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15~16쪽
대중지성
영국의 과학자이며 우생학의 창시자 골턴francis galton이 여행 중에 시골의 가축 품평회 행사를 보게 됩니다. 그 행사에는 소의 무게를 알아맞히는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표를 사서 자기가 생각하는 소의 무게를 적어서 투표함에 넣는 것입니다. 나중에 소의 무게를 달아서 가장 근접한 무게를 써 넣는 사람에게 소를 상품으로 주는 행사였습니다. 골턴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확인하는 재미로 지켜보았습니다. 물론 정확하게 맞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800개의 표 중 숫자를 판독하기 어려운 13장을 제외한 78개의 표에 적힌 무게를 평균했더니 1.197파운드였습니다. 실제로 측정한 소의 무게는 1.198파운드였습니다. 군중을 한 사람으로 보면 완벽한 판단력입니다. -17쪽
탈문맥을 향한 고전공부
모든 고전 공부는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 그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독자 자신을 읽는 三讀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텍스트를 뛰어넘고 자신을 뛰어넘는 ‘脫文脈’이어야 합니다. 역사의 어느 시대이든 공부는 당대의 문맥을 뛰어넘는 탈문맥의 창조적 실천입니다.
(……)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19쪽
우직함이 세상을 바꾼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그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게도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세상이 조금씩 변화해왔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공부는 변화와 창조로 이어져야 합니다. -20~21쪽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 머물라
이러한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 창조 공간이 못 됩니다.
(……) 그러나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합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결코 창조 공간이 되지 못합니다. 중심부보다 더 완고한 교조적 공간이 될 뿐입니다. -21~22쪽
문사철에 갇히지 마라
우리는 두 개의 오래된 세계 인식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文史哲과 詩書畵가 그것입니다. 흔히 문사철은 이성 훈련 공부, 시서화는 감성 훈련 공부라고 합니다. 문사철은 고전문학, 역사, 철학을 의미합니다. 어느 것이나 언어ㆍ개념ㆍ논리 중심의 문학서사 양식입니다. 우리의 강의가 먼저 시에 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까닭은 우리의 생각이 문사철이라는 인식틀에 과도하게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고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소쉬르는 언어구조학이 그것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라는 그릇은 지극히 왜소합니다. 작은 컵으로 바다를 뜨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컵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이 바닷물이긴 하지만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24쪽
문사철을 깨는 게 공부의 시작
언어와 개념 논리라는 지극히 추상화된 그릇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담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방금 일별한 것처럼 문학, 역사, 철학 역시 세계를 온당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사철이라는 완고한 인식틀에 갇혀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의 시작임을 물론입니다. -25쪽
시는 전복을 꿈꾼다
시는 세계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상투적인 방식을 전복하고, 상투적인 언어를 전복하고, 상투적인 사유를 전복하고, 가능하다면 세계를 전복하는 것, 이것이 시인의 카타콤이며 그 조직 강령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26
문사철, 시서화악, 영상서사의 장점을 배합하라
우리는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악의 상상력, 영상서사의 압도적 전달력을 소중하게 계승하되 이것이 갖고 있는 결정적 장단점을 유연하게 배합하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문사철의 추상력과 함께 그것의 동일성 논리, 시서화악의 상상력과 함께 그것의 주관성과 관념성, 그리고 영상서사의 압도적 전달력과 함께 인식 주체의 소외 문제를 해결해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과 진실(영화 『big fish』 이해)
그 노인과 3~4년을 함께 살고 있는 우리도 신입자가 들어올 때마다 그 이야기를 또 듣습니다. 그가 빠트린 것이 있으면 우리가 채워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노인의 이야기가 계속 각색된다는 사실입니다. 창피한 내용은 빼고, 무용담이나 미담은 부풀려 넣습니다. 1~2년 사이에 제법 근사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도 각색된 이야기에 도취되어 어떤 대목에서는 눈빛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젊은 친구들은 노인네가 ‘구라푼다’고 핀잔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심정을 잘 이해합니다. 과거가 참담한 사람이 자위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늦가을이었습니다. 하염없이 철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 노인의 뒷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됩니다. 노인의 야윈 뒷모습이 매우 슬펐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분이 늘 얘기하던 자기의 그 일생을 지금 회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저분이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 최소한 각색해서 들려주던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색한 인생사에는 이루지 못한 소망도 담겨 있고, 반성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노인의 실제 인생사와 각색된 인생사를 각각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전자를 ‘사실’이라고 하고 후자를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노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망과 반성이 있는 진실의 주인공으로 그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0~31쪽
樂與政通
공자도 악여정통(樂與政通)이라 했습니다. 음악과 정치는 서로 통한다는 뜻입니다. 어느 나라에 들어가서 그 나라에서 불리는 노래를 들으면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공자가 서울에 와서 걸그룹 노래를 듣고 뭐라 할지 궁금하긴 합니다만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정치성이 분명 없지 않을 것입니다. 채시관들이 마을을 돌면서 노래를 수집할 이유 역시 노래의 사실성에 주목하고 노래를 통하여 백성들이 어떤 고뇌를 안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33쪽
인간은 본능 상 이기적이라 할 수 없다
특정 집단 내에서는 이기적인 개체가 자기 보존에 유리하지만, 집단 간의 투쟁에서는 이기적인 개체가 많은 집단이 이타적인 개체가 많은 집단에게 패배한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서바이벌이 실패합니다. 그래서 DNA도 집단 선택을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밀림에서 사자들이 만나면 금방 상대를 죽일 것 같이 으르렁거리지만 죽이는 일은 없습니다. 죽으면 개체 수가 줄어서 자기가 속한 사자 집단의 서바이벌이 불리하기 때문에 그냥 으르렁거리기만 합니다. DNA의 운동 원리만으로 인간이 이기적, 보수적이라고 얘기하기도 어렵습니다. -46~47쪽
생명은 DNA에 종속되는 게 아닌, 방랑하는 예술가
DNA는 생명을 구성하는 여러 요인 중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생명체는 생명체 자체가 ‘오토 포이에시스Auto Poiesis’, 즉 ‘자기 생산’ 또는 ‘생성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는 ‘생명체’로서의 운동이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DNA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는 생명체 자체가 자기 생성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생명을 ‘내추럴 드리프트natyral drift’, 자연 표류의 주체로 봅니다. DNA라는 확정된 논리 체계로 움직여 가는 게 아니라 주변 조건과 만나서 물처럼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투라나는 생명이란 ‘방랑하는 예술가’라고 합니다. 방랑하는 예술가처럼 자기 생성, 즉 자기가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47쪽
인과론과 환원론의 한계
근대적 패러다임 중에서 가장 완고한 것이 ‘인과론’입니다. 사물을 원인과 결과 관계로 질서화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과관계가 현실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과 과는 순방향뿐만 아니라 역방향의 화살표도 있습니다. 인이면서 동시에 과이기도 합니다. 인과 과는 일방적 선형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방향의 화살표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특정한 시공이라는 정태적 모델에 한정했을 때에도 그렇거든 하물며 시공의 변화를 포괄하는 동태적 모델에서는 더욱 역동적으로 전개됩니다. 인과론이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환원론 그 자체입니다. DNA를 생명의 궁극적 요소로 환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환원론과 인과론이 근대 인식의 기본 틀입니다. 지극히 단순화된 기계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50쪽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의 상상력의 조화
우리가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가장 필요한 능력이 바로 이 추상력입니다.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는 추상력입니다.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집어낼 숭 LT는 추상력이 긴급히 요구됩니다. 학창 시절의 경험입니다만 장황하게 많은 것을 나열하기만 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문제의 핵심이 뭐야?” 이런 핀잔을 듣게 됩니다. 진술의 순서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을 먼저 애기하고 그 다음에 그것과 관련된 것들을 시간적 순차성이나 중요도에 따라 내놓아야 옳습니다. 물론 여러 요인 중에서 핵심적인 것을 추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문제란 서로 얽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원인을 다 열거하자면 결국 “모든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순환론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핵심을 요약하고 추출할 수 있는 추상력을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문제를 옳게 제기하면 이미 반 이상이 해결되고 있다”고 합니다.
추상력과 나란히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작은 것, 사소한 문제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이 상상력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다만 작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빙산의 몸체를 볼 수 있는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세상에 사소한 것이란 없습니다. 다만 사소하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사소한 문제라고 방치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단 한 사람의 문제라거나, 일시적인 문제라고 치부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한 마리의 제비를 보면 천하에 봄이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능력, 즉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의 상상력을 유연하게 구사하고 적절히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52~53쪽
말은 듣는 이가 즐거워야 한다
귀곡자는 “병법은 병사의 배치이고, 시는 언어의 배치이다”라고 했습니다. 병사의 배치가 전투력을 좌우하듯이, 언어의 배치가 설득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적인 레토릭과 문법을 중요시합니다.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어』의 첫 구절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에서 ‘說’자는 ‘설’자로 쓰고 뜻은 ‘悅’로 읽습니다. 귀곡자의 주장은 ‘설이 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듣는 상대가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言의 배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54쪽
득위란 70%의 자리에 앉는 것
득위의 비결을 소개하겠습니다. 개개인의 위를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득위의 기본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70%의 자리’가 득위의 비결입니다. “70%의 자리에 가라!” 자기 능력이 100이면 70의 역량을 요구하는 곳에 가는 게 득위입니다. 반대로 70의 능력자가 100의 역량을 요구하는 자리에 가면 실위가 됩니다. 그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로 채우거나 권위로 채우거나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맡은 소임도 실패합니다. ‘30%의 여유’,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여유가 창조성으로, 예술성으로 나타납니다.
‘70%가 득위다’라는 주장에 반론도 없지 않습니다. 학생들로부터 능력이 70%밖에 안 되더라도 100의 자리에 가면 그만한 능력이 생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그것이 기회가 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을 몹시 고통스럽게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사람의 능력이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딱히 70이다 100이다 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합니다만 자리와의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자리와 관련해서 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의 권능을 자기 개인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그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63~64쪽
완성이란 없다
(주역의 마지막 괘인 ‘火水未濟卦’는 미완성의 괘다) 세상에 완성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실제로 완성 괘는 이 미완성 괘 앞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완성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어떤 국면의 완성일 뿐 궁극적인 완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고 세상의 변화도 그렇습니다. 작은 실수가 있는 어떤 국면이 끝나면 그 실수 때문에 다시 시작하는 그런 경로를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71쪽
같은 현실 다른 인식
모스크바의 지하철에서는 전혀 다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노인이 탑승하자 청년들이 얼른 일어서서 자기 자리로 모셔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 세 번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 현지 교민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대단은 “당연한 일이지요!”였습니다. “이 전철을 저 노인들이 건설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혁명적 열정으로 청춘을 바쳐 건설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대학의 학생들은 다른 대답이었습니다. 노인들이 건설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월급을 받기 위해서 일한 것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것 역시 당연한 대답이었습니다. 문제는 같은 사안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읽히는 이유입니다. 세대 간의 만남도 단절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109쪽
인간에게 절망을 심어주는 수사기관
내가 전기고문을 당하다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간신히 정신이 들었을 때입니다. 취조관이 의무실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의료 처치를 요청하려나 보다’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우리 집 애 감기약 부탁했는데 그걸 퇴근하기 전에 내 책상에 갖다 놓으라는 전화였어요. ‘남의 아들에 대한 전기 고문과 자기 딸의 감기약’, 그 극적 대비는 차라리 슬픈 것이었습니다. ‘나는 절대 결혼하지 않아야지. 저 지독한 가족 이기주의를 난들 어떻게 할 거야.’ 인간에 대한 실망이었습니다. 권력의 오만함과 잔혹함에 이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마저 포기해 갔던 절망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남산 취조 현장의 경험을 서로 이야기하다가 놀랍게도 ‘감기약’이 연출된 수사 기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 역시 비슷한 경험을 토로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냉혹한 인간으로 연출함으로써 피의자를 몸서리치게 하는 수사 기법은 한 인간에 대한 절망을 넘어서 정치권력 그 자체에 대한 소름끼치는 공포였습니다. 남한산성은 이러한 절망의 끝 부분에 놓여 있습니다. -217쪽
아름다움과 모름다움
미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글자 그대로 ‘앎’입니다. 미가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은 미가 바로 각성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각성하게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고 미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모름다움’이라고 술회합니다. 비극이 미가 된다는 것은 비극이야말로 우리를 통절하게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얇은 옷을 입은 사람이 겨울 추위를 정직하게 만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는 한매寒梅, 늦가을 서리 맞으며 피는 황국黃菊을 기리는 문화가 바로 비극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문화입니다. 우리가 비극에 공감하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세상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252~253쪽
‘얼의 꼴’ 얼굴
나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신분보다는 그 사람의 얼굴을 주목합니다. 얼굴을 주목하는 경우에도 이목구비보다는 얼굴에 담겨 있는 분위기를 주목합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달관이 있는 경우를 최고로 칩니다. 좋은 피부와 아픔이 없는 얼굴은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얼굴’의 옛말은 얼골입니다. 얼골은 얼꼴에서 왔습니다. ‘얼의 꼴’ 다시 말하자면 ‘영혼의 모습’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위가 바로 얼굴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였습니다. 얼굴에는 자연히 그 사람의 ‘얼’이 배어 나오게 마련입니다. -254쪽
위악과 위선
위악이 약자의 의상이라고 한다면, 위선은 강자의 의상입니다. 의상은 의상이되 위장입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 그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시위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있습니다. 붉은 머리띠, 문신입니다. 단결과 전의를 과시하는 약자들의 위악적 표현입니다. 강자들의 현장은 법정입니다. 검은 법의의 엄숙성과 정숙성이 압도합니다. 시위 현자으이 소란과 대조적입니다. -268쪽
待人春風 持己秋霜
내가 쓰는 붓글씨 중에 충푼추상春風秋霜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봄바람과 가을 서리라는 뜻입니다만 방서에 원문을 부기합니다. ‘待人春風 持己秋霜’입니다.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게 하고, 반면에 자기를 갖기는 추상같이 엄격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반대로 합니다. 자기한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까다로운 잣대로 평가합니다. -324쪽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우리가 잘 아는 경제원칙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최대의 희생으로 최소의 효과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입니다. 고뇌와 방황과 좌절이 인간을 얼마나 성숙하게 하는지에 대하여 경제원칙은 무지합니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구호도 비인간의 극치입니다. 단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최대의 소비는 전쟁입니다. 전쟁이야말로 미덕이 된다는 역설입니다. 지금 그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359쪽
자본의 속성
자본은 자기 증식하는 가치입니다. ‘資’는 ‘滋’와 같은 뜻입니다. 불어난다는 뜻입니다. 캐피탈capital은 카푸트caput라는 소를 세는 단위, 즉 ‘마리’가 어원입니다. 소도 새끼를 낳고 우유를 만듭니다. 자본은 그 자체가 증식하는 가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자본은 반드시 자본축적으로 이어집니다. 축적은 자본의 강제 법칙입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자본축적의 역사입니다. -360쪽
떨리는 지남철, 끝없는 고심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영규, 『예루살렘 입성기』
인용
슬픈 정감으로도, 시원한 정감으로도 읽히는 기이한 김종직의 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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