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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인의 사회 - 8. 남과 같지 않기를 본문

연재/시네필

죽은 시인의 사회 - 8. 남과 같지 않기를

건방진방랑자 2019. 10. 2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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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남과 같지 않기를

 

키팅은 단순히 욕을 한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말은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하고, 행동은 말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言行一致, 行言一到). 그래서 키팅은 학생들에게 서문을 모조리 찢어라는 아주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교과서를 찢으라니, 학생들의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쓰레기를 가차 없이 뜯어 버리라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만해도 교과서에 낙서를 한다거나, 교과서를 비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었다. ‘교과서=진리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익히고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하니 교과서를 찢는다는 건, 매우 불경스러운, 그래서 양심의 가책까지 느껴지는 일이었던 것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때도 그랬는데 1950년대가 배경인 이 학교의 학생들에게 키팅의 말은 장난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머뭇거렸고, 달튼이 먼저 행동하기 전까진 누구 하나 찢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과감히 달튼이 먼저 찢어버렸다. 못할 게 있는 게 아니라,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가로 막는다.

 

 

그런데 이쯤 되면 왜 키팅은 그 내용을 찢으라고 할 수밖에 없었는지 궁금해진다. ‘단순히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기에 그런 것일까? 그게 학생들에겐 전혀 유용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인가? 왜 가치를 측정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걸까?’라는 온갖 의문이 따른다.

우린 어떤 것이든 하나의 잣대로 재는 것에 너무도 익숙하다. 물론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평가해야 하고 선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무조건 나쁘다고는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량적인 평가가 불가능한 영역까지도 서슴없이 하나의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해 버리니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인성, 성숙, 문학작품의 가치, 예술의 가치와 같이 추상적인 부분들 말이다. 평가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부분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고 그게 절대적인 판단인 양 떠들고 있으니 문제가 된다.

 

 

측정해선 안 되는 것을 측정하게 하고, 줄을 세우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찢어버려야 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평가는 평가로 끝나는 게 아니라, 획일화 된다는 점이다. 좋은 평가를 받은 것과 나쁜 평가를 받은 것 사이엔 위계가 생기며, 그만한 영향력이 생긴다. 그러니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좋은 것’, ‘옳은 것’, ‘제대로 된 것으로 인정되고, 나쁜 평가를 받은 것은 나쁜 것’, ‘그른 것’, ‘잘못된 것으로 낙인찍힌다. 그러니 누구 할 것 없이 좋은 평가를 받도록 그 기준에 따라 갈 수밖에 없다.

친구에게 미대 입시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미대 입시는 각 대학이 원하는 양식으로 최적화하여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펜의 사용법부터 굵기, 기울기까지 완벽하게 복사하는 수준으로 그릴 수 있어야 한단다. 반복 연습만이 살 길이고, 하나의 기준에 나를 최대한 일치시키는 게 관건이란다. 그런데 문제는 미대에 들어가고 나선 독창적인 작품 활동을 해야 하니, 이때 난관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여태껏 나의 개성을 죽이고 하나의 기준에만 맞춰왔는데 이젠 개성을 다시 살리라고 하니 까무러칠 노릇이라는 얘기다.

이처럼 획일화란 나를 죽이고 외부의 가치 기준을 받아들여 나를 재편성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는 누가 써도 똑같아지고, 그림은 누가 그려도 비슷해지며, 내 자신이 아닌 남의 욕망을 대변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런 문제를 알기에 키팅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나를 옥죄어 오는 쓰레기들을 과감하게 찢어 버려라고 주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만 카르페디엠의 삶을 살 수 있고 나만이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나를 가두는 기준들을 과감히 찢어 버려라.

 

 

 

너 자신이 시가 되는 삶을 살라

 

학생들은 쭈뼛거리다가 결국 서문을 찢기 시작한다. 그 장면은 마치 하나의 카니발 같은 느낌이었다. 학생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기존의 체제에 균열을 내기라도 하듯 과감하게 서문을 찢어버렸다. 이때는 누구 할 것 없이 자신의 욕망에 가장 충실했고 그 순간엔 기쁨만이 가득했다.

 

 

학생들의 표정엔 금기를 넘어서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만족감이 가득찬 표정이 어린다.

 

 

기쁨의 들뜬 학생들 사이로 키팅은 파고 들어가 진정한 시의 이해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시가 아름다워서 읽고 쓰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이다. (중략)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바로 너 자신이 시가 된다는 내용을 지닌 휘트만의 시를 인용하며 마무리 짓는다. 그 순간 닐과 토드의 얼굴엔 무언가 강렬한 깨달음이 온 것 같은 의미심장한 표정이 어린다.

 

 

닐 페리는 키팅의 말에 빠져 들고 있다. 이런 걸 현혹된다고 할까, 매료된다고 할까?

 

 

서문의 시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시를 어떻게 분석하고 평가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었다면, 키팅의 시의 이해는 너 자신이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이때 키팅은 교탁에서 내려와 책상 주위에 쭈그려 앉아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건 수업을 한다기보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키팅이 말한 시의 이해를 신영복 선생의 언어로 풀면, “시는 세계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상투적인 방식을 전복하고, 상투적인 언어를 전복하고, 상투적인 사유를 전복하고, 가능하다면 세계를 전복하는 것, 이것이 시인의 카타콤이며 그 조직 강령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담론, 26)”이라 할 수 있다. 키팅이 말하는 시의 정의와 신영복 선생이 말하는 시의 정의는 깊은 곳에서 일맥상통한다.

 

 

쇠귀 선생님의 글귀는 여전히 울림이 있다.

 

 

 

키팅과 학생들의 마주침이 빚어내는 이야기, 그 속으로

 

두 번째 수업은 더욱 더 시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리고 시라는 게 결코 나 자신과 동떨어진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닌 내가 한껏 녹아난 세계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두 번의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이건 뭐지?’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이 선생 왠지 끌리는데라는 호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클리나멘의 우연한 마주침이 우주 생성의 단초가 되었듯, 키팅과의 마주침은 지금껏 억눌러 왔던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했으며 카르페디엠의 삶이 무엇인지 받아들이도록 했다. 과연 이런 마주침은 어떻게 전개될까?

 

 

시는 누구나 쓸 수 있고, 나 자신을 드러내기에 나만이 쓸 수 있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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