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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돌베개, 1998 본문

책/밑줄긋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돌베개, 1998

건방진방랑자 2019. 6. 1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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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전에는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덥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思沈하여야 思無邪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선 제 사고의 서랍을 엎어 전부 쏟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까울 정도로 과감히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지독한 지식의 사유욕, 어설픈 관념의 야적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늦게 깨달은 저의 치부였습니다. 사물이나 인식을 더 복잡하게 하는 지식, 실천의 지침도, 실천과 더불어 발전하지도 않는 이론은 분명 질곡이었습니다. 이 모든 질곡을 버려야 했습니다. 躡屩擔簦(史記) 언제 어디로든 가뜬히 떠날 수 있는 최소한의 소지품만 남기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많은 것을 잃고 또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은 서운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버린다는 것은 상추를 솎아내는, 더 큰 것을 키우는 손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지난번 새마을 연수교육 때 본 일입니다만, 지식이 너무 많아 가방 속에까지 담아 와서 들려주던 안경 낀 교수의 강의가 무력하고 공소한 것임에 반해 빈 손의 작업복으로 그 흔한 졸업장 하나 없는 이가 전해주던 작은 사례담이 뼈 있는 이야기가 되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합니다. 그런 교수가 될 뻔했던 제 자신을 아찔한 뉘우침으로 돌이켜봅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봅니다. 지식은 책 속이나 서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경험과 실천 속에, 그것과의 통일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140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노자).’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 경우, 그릇으로서의 쓰임새는 그릇 가운데를 비움으로써 생긴다. ‘없음으로써 쓰임으로 삼는 지혜. 그 여백 있는 생각. 幽遠한 경지가 부럽습니다. 최근의 몇 가지 경험에서 자주 생각을 키우는 느낌입니다만 선행이든 악행이든 그것이 일회 완료의 대상화된 행위가 아니고 좋은 사람또는 나쁜 사람과 같이 그것이 사람인 경우에는 완전한 악인도 전형적인 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이 확인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추상된 도식이기 때문에 도리어 인간 이해를 방해하는 관념이라 생각됩니다. 전형적인 인간을 찾는 것은, 없는 것을 찾는 것이 됩니다.

 

있으면 없는 것보다 편리한 것도 사실이지만 玩物喪志, 가지면 가진 것에 뜻을 앗기면, 물건은 방만 차지함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마음 속에도 자리를 틀고 앉아 창의를 잠식하기도 합니다.

 

자는 ’‘의 회의로써 양이 크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큼직한 양을 보고 느낀 감정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그 고기를 먹고 그 탈을 입는 양은 당시의 물질적 생활의 기본이었으며, 양이 커서 생활이 풍족해질 때의 그 푼푼한 마음이 곧 미였고 아름다움이었다. 이처럼 모든 미는 생활의 표현이며 구체적 현실의 정서적 정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바깥에서 미를 찾을 수는 없다. 더욱이 생활의 임자인 인간의 미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용모나 각선 등 조형상의 구도만으로 인간의 아름다움을 판단할 수 없음은 마치 공간을 피해서 달아나거나 시간을 떠나 존재하거나, 쉽게 말해서 밑바닥이 없는 구두를 생각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너는 먼저 그녀의 생활 목표의 소재를 확인하고 그 생활의 자세를 관찰하며 나아가 너의 그것들과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랑이란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86

 

天雖高 不敢不局, 莫顯乎隱 莫見乎微 아무리 육중한 벽으로 圍繞된 자리라 하더라도 더 높은 시점에 오르고 더 긴 세월이 흐르면 그도 日食처럼 만인이 보고 있는 자리인 것을……저에게 주어진 이 작은 一隅가 비록 사면의 벽에 의하여 밀폐됨으로써 얻어진 공간이지만, 저는 부단한 성찰과 자기부정의 노력으로 이 닫힌 공간을 무한히 열리는 공간으로 만들어감으로써 벽을 침묵의 교사로 삼으려 합니다. 必愼其獨, 혼자일수록 더 어려운 생각이 듭니다. -119

 

필재가 있는 사람의 글씨는 대체로 그 재능에 의존했기 때문에 일견 빼어나긴 하되 재능이 도리어 함정이 되어 손 끝의 를 벗어나기 어려운데 비하여, 필재가 없는 사람의 글씨는 손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쓰기 때문에 그 속에 혼신의 힘과 정성이 배어 있어서 단련의 미가 쟁쟁히 빛나게 됩니다. 만약 필재가 뛰어난 사람이 그 위에 혼신의 노력으로 꾸준히 쓴다면 이는 흡사 여의봉 휘두르는 손오공처럼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런 경우는 관념적으로나 상징될 수 있을 뿐 필재가 있는 사람은 역시 오리새끼 물로 가듯이 손재주에 탐닉하게 마련이란 하겠습니다.

결국 서도는 그 성격 상 토끼의 재능보다는 거북이의 끈기를 연마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글씨의 훌륭함이란 글자의 자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묵 속에 갈아넣은 정성의 양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평가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리라 생각됩니다.

사람의 아름다움도 이와 같아서 타고난 얼굴의 조형미보다는 그 사람의 지혜와 경험의 축적이 내밀한 인견이 되어 은은히 배어나는 아름다움이 더욱 높은 것임과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을 보는 시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첩경과 행운에 연연해하지 않고, 역경에서 오히려 정직하며, 기존의 權富에 몸 낮추지 않고, 진리와 사랑에 허심탄회한.... 그리하여 스스로 선택한 우직함이야말로 인생의 무게를 육중하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나무와 달라서 나이를 더한다고 해서 그저 굵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젊음이 신선함을 항상 보충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가 원숙이, ‘가 청신함이 되고 안 되고는 그 年月을 안받침하고 있는 체험과 사색의 갈무리 여하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새해란 실상 면면한 세월의 똑같은 한 토막이라 하여 1월을 13월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만약 새로움이 완성된 형태로 우리 앞에 던져진다면 그것은 이미 새로움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모든 새로움은 그에 임하는 우리의 心機가 새롭고, 그 속에 새로운 것을 채워나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주어지는 새로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33

 

징역 속에는 풍부한 역사와 사회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견고한 벽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각양의 세태, 각색의 사건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현존하는 모든 고통과 가난과 갈등을 인정하도록 하며, 그 해결에 대한 일체의 환상과 기만을 거부케 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자유, 즉 이성을 얻게 해줍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가슴들은 그 緩急, 曲直, 廣狹, 方圓으로 하여 우리를 다른 수많은 가슴들과 부딪치게 함으로써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칩거하고 있는 감정도 수많은 叢中의 한낱에 불과하다는 개안을 얻게 하고 그 협착한 甲殼을 벗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사건에 매몰되거나 각자의 감정에 칩거해 들어가는 대신 우리들의 풍부한 이웃에 충실해갈 때 비로소 벽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바다가 하늘을 비추어 그 푸름을 얻고, 細流를 마다하지 않아 그 넓음을 이룬 이치가 이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결벽증과 정돈벽이 남보다 덜하지 않았던 제가, 결코 자발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징역살이라는 장기 망태기속에서 부대끼는 사이에 어느덧 그것을 버리고 난 지금 어느 면에서는 상당한 정신적 여유와 편안함마저 향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이 치러야 하는 긴장감, ‘모범이 요구하는 타율성에 비해 중간은 풍요하고’ ‘꼴찌는 편안하며’ ‘쪼다는 즐겁다는 역설도 그것을 단순한 자기합리화나 패배주의의 변이라 단정해버릴 수 없는 상단한 야의 진실을 그 속에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06

 

작은 실패가 있는 쪽이 없는 족보다 길게 보아 나은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작은 실패가 있음으로해서 전체의 국면은 완결이 아니라 미완에 머물고 이 미완은 더 높은 단계를 향한 새로운 출발이 되어 줍니다. 더구나 작은 실패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자신과 사물을 돌이켜보게 해줍니다. 괘사에도 완결을 의미하는 旣濟享小初吉終亂이라고 하여 그것을 미제의 하위에 놓고 있습니다.

도대체 奧義를 숙지하기도 쉽지 않고 또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도 않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소위 가운데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인 작은 실패를 간과하지 않는 자기비판의 자세입니다.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패와 그 실패의 발견, 그것은 산에 나무가 있고 땅 속에 바위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 튼튼한 뼈대를 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계주의 최종 주자가 승리의 영광을 독차지할 수 없습니다. 특히 목표가 원대한 것일수록 최후보다는 그 과정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후란 전·후로 격절된 별개의 영역으로서 우리들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과정의 전부’, 또는 어느 기간의 총합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하리라 믿습니다.

 

낯선 환경을 배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것이란 점에서 사소한 생활의 불편 그 자체까지 포함해서 하나의 기쁨입니다. 익숙한 환경과 친분 있는 사람들의 양해 속에서는 미처 발견되지 못하던 자신의 作風上의 결함이 흡사 백지 위의 墨痕처럼 선연히 드러납니다. 저는 이러한 발견이 지금껏 무의식중에 굳어져 온 안이한 습관의 甲殼을 깨뜨리고 좀더 너른 터전 위에 저의 자세를 다시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용

목차

없음으로써 쓰임으로 삼는 지혜

건빵이 교컴 겨울 수련회에 참석한 까닭?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동자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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