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창 기녀 석개의 시첩에 쓰다
제석개시첩(題石介詩帖)
정유길(鄭惟吉)
夢賚元爲水月隣 兩翁分占一江春
君家奏樂吾家聽 絶勝屠門大嚼人
花無根蔕月無痕 白髮追思舊酒樽
莫漫行雲空自遏 爲予低唱感君恩 『林塘遺稿』 上
해석
夢賚元爲水月隣 몽뢰원위수월린 | 몽뢰는 원래 수월정의 이웃이 되어 |
兩翁分占一江春 량옹분점일강춘 | 두 노인이 한 강의 봄을 나누어 차지했다네. |
君家奏樂吾家聽 군가주락오가청 | 그대의 정자에서 음악을 연주하면 우리의 정자에서 들리니, |
絶勝屠門大嚼人 절승도문대작인 | 상상하는 사람보다 훨씬 낫구나. |
花無根蔕月無痕 화무근체월무흔 | 꽃은 뿌리와 꼭지가 없고 달은 흔적이 없어 |
白髮追思舊酒樽 백발추사구주준 | 백발에 옛 술자리 추억하네. |
莫漫行雲空自遏 막만행운공자알 | 부질없이 가던 구름 공연히 절로 멈추지 마라. |
爲予低唱感君恩 위여저창감군은 | 나를 위해 나지막하게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노래 불러주오. 『林塘遺稿』 上 |
해설
석개는 우리나라 역대 여자 명창 중에 가장 못생긴 명창으로는 상당히 상위권에 들지 않을까 싶게 기록되어 있다. 유몽인은 『어우야담』에, 석개를 늙은 원숭이 얼굴에다 좀 대추나무로 만든 화살같이 째진 눈을 한 여자 종이라고 묘사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아이 때 지방에서 올라와 시종으로 충당되었는데, 그는 중종의 딸인 정순옹주와 혼인한 여성위 송인(宋寅, 1516~1584)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 집은 세력 있는 부호가여서 곱게 화장하고 화려하게 꾸민 무수한 미인들이 좌우에서 응대하고 있었으므로, 석개는 나무통을 이고 물 길어 오는 일을 하였다.
그런데 석개는 물을 길러 우물에 가면 물통을 우물 난간에 걸어놓고는 나무꾼이나 나물 캐는 아녀자들이 부르는 노래 같은 것을 종일 부르다가 저녁에는 빈 통을 가지고 돌아왔다. 매를 맞아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다음날도 또 그렇게 했다. 나물을 캐오라고 광주리를 들려 교외로 내보내면 광주리를 들판에 놓아두고 또 노래를 불렀다. 작은 돌멩이를 많이 주워 모아 놓고 노래 한곡을 부르면 돌멩이 하나를 광주리에 집어넣어 그 광주리를 가득 채웠고, 그러면 다시 노래를 불러 한곡이 끝나면 광주리의 돌을 하나씩 들에 던지기를 반복하다가 날이 저물면 빈 광주리를 들고 돌아왔다. 매일 맞아도 역시 그렇게 하여, 여성위까지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성위는 기이하게 여기고 석개에게 노래를 배우게 했다.
그리하여 석개는 결국 근래 백여 년에 처음 본다는 평을 들을 만큼 장안 최고의 명창이 되었고 춤도 잘 추어서 당시에 견줄 만한 이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까닭에 영의정 홍성, 좌의정 정유길(鄭惟吉),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좌의정 정철(鄭澈), 우의정 이양원(李陽元)과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이 연이어 화답하여 큰 시첩을 이루어주기도 했다. 심수경은 “천한 여자의 몸으로 여러 명상(名相)들의 시를 얻었으니, 빼어난 예술이야 어찌 귀하지 않으리오?”라고 하며, 석개의 예술적 재능을 크게 평가했다.
정유길의 「석개의 시첩에 쓴다. 2수[題石介詩帖二首]」에는 송인과 이웃하여 살며 함께 음악을 듣던 시절이 그려져 있다.
몽뢰(夢賚)는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의 정자 이름이다. 정자를 사고 보니 전에 꿈에 보았던 경치와 꼭 같았으므로 정자 이름을 ‘몽뢰’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석개가 부르는 ‘감군은(感君恩)’을 듣고 벗과 함께 술을 마셨던 일을 추억하고 있다. 여성위 송인의 별장인 수월정은 경치가 아주 좋았던 모양이다.
-「노력 신화, 못 생긴 명창 석개」, 부산대 전임강사 이지양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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