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침술(鍼術)로 하층민에게 인술을 베푼 의의(義醫):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
1. 서사분절
피재길이 ‘웅담고(熊膽膏)’로 내의원의 침의로까지 발탁되어 이름을 날린 인물이라면, 조광일은 독특한 침술로 시정공간을 누비면서 오직 민(民)을 위해 인술을 베푼 의의(義醫)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광일의 삶은 피재길의 삶과 상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서사분절을 보기로 한다.
① 의술의 공은 나라를 다스리는 공에 버금가며, 어진 사람이면서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 의술에 은거한다는 작가의 전평(前評).
② 충청도 내포에 조광일(趙光一)이라는 의원이 있었는데, 그의 선조는 본래 태안(泰安)의 대성(大姓)이었으나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나그네로 합호(合湖)의 서쪽에 정착한다.
③ 조생은 침(針)으로 명성을 얻어 스스로 부르기를 침은(針隱)이라 하였으며, 권문세가들에게 가지 않았고 현달한 자와도 내왕하지 않는다.
④ 작가는 우연히 조생의 집에 지나다가 조생이 남루한 옷차림인 노파의 아들에게 왕진을 가서 치료해준 것을 목도한다.
⑤ 한번은 작가가 비가 오는 흙탕길에서 조생을 만나, 가는 곳을 묻는다. 조생은 일전에 어느 마을의 백성에게 놓은 침이 효험이 적어 재차 침을 놓으러 간다고 대답한다.
⑥ 작가가 아무런 이익이 없이 이렇게 고생하느냐고 묻자 조생이 빙그레 웃고 대답하지 않고 가버린다.
⑦ 이후 작가는 조생이 왕래하는 것을 살펴보고 범상치 않음을 알고 이후 친교를 맺는다. 그 사람됨이 소탈하고 너그러우며 남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⑧ 그는 오직 의원이 된 것을 기뻐하였으며, 옛 처방으로 치료하지 않고, 항상 작은 가죽주머니에 동침(銅針)과 철침(鐵針)으로 만든 십여 개의 길고 짧고 둥글고 모난 침을 가지고 다니면서 종기를 터트리고 부스럼을 다스리고 불치병도 낫게 한다.
⑨ 어느 날 작가가 “의원은 천한 기술이며 여항(閭巷)은 비루한 곳인데, 어찌 귀하고 현달한 사람들과 교류하여 명성을 얻으려 하지 않은가”라고 묻자, 조생은 “장부가 재상이 되지 못하면 의원이 되어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낫다”고 대답한다.
⑩ 이어서 조생은 ‘의원의 의술로 사람들을 살려 뜻을 행하는 것이 남의 녹을 먹으며, 때를 얻어 백성을 구제하는 도를 행하다가 불행을 만나기도 하고 비난과 벌을 감수해야만 하는 재상보다 낫다’고 한다.
⑪ 그리고 조생은 의술을 행하는 것은 이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행하려는 것일 따름이므로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내가 가장 가엽게 여기는 것은 오직 여항의 곤궁한 백성들이라고 말한다.
⑫ 또한 조생은 침술을 행한 지 십여 년 동안, 거의 수천 명의 목숨을 살렸는데, 앞으로 수십 여 년 동안 만 명을 살리고 내 일을 마칠 것이라고 대답한다.
⑬ 세태와 다른 명의 조광일을 입전(立傳)한 이유를 들면서 논찬을 한다.
여러 출전 내용 비교
조광일에 대한 내용은 유재건(劉在建: 1793~1880)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서 『이계집(耳谿集)』을 원출전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이경민(李慶民: 1814~1883)의 『희조일사(熙朝軼事)』도 『이계집(耳谿集)』을 원출전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과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의 「조의사광일(趙醫師光一」을 비교해보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의 내용은 축약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계(耳溪)의 평을 대신하여 유재건 자신의 평을 첨가시켜 놓고 있다. 그리고 이계가 직접 견문한 사실을 없애거나 축약시켜 작품의 서사도 평이하게 만들고 있어 이계의 전에서 느낄 수 있는 서사의 흥미와 생동성을 반감시키고 있다. 이경민(李慶民)의 『희조일사(熙朝軼事)』는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의 내용 중에 앞과 뒤의 논찬을 제외하고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희조일사(熙朝軼事)』를 보면 책의 앞부분에 ‘초촬군서목록(抄撮群書目錄)’이라 적시해두었다. 이는 초촬(抄撮)의 방식으로 작품화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경민은 『희조일사(熙朝軼事)』에서 자신이 보았던 문집의 이름을 부기해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희조일사(熙朝軼事)』의 대부분의 내용은 원문집의 내용을 많이 수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평을 한 부분이나 초촬(抄撮)하면서 문장에 어색한 부분만을 고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참고한 문집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따라서 『희조일사(熙朝軼事)』에 나오는 각 작품은 작가가 새롭게 창작한 작품으로 보기는 힘들다.】.
다만 『청구야담(靑邱野談)』의 「활인병조의행침(活人病趙醫行針)」은 앞의 두 작품과 다소 다른 점이 있다. 이 작품의 서사방식에서 이계(耳溪)의 전과 차이가 난다. 「활인병조의행침(活人病趙醫行針)」은 일반 ‘전(傳)’에서 볼 수 있는 ‘논찬(論贊)’ 부분을 약화시킨 반면, 이 부분을 야담 작가의 시각으로 치환시켰다. 또한 시간과 공간, 인물의 구체성 그리고 전(傳) 작품에서 흔히 보여주는 견문에 바탕한 사실성 또한 약화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활인병조의행침(活人病趙醫行針)」은 이계의 견문과 경험을 거세한 반면, 다중이 공유하는 불특정한 ‘이야기’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이계는 조광일을 직접 만나보고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서사를 이끌고 있는 반면, 『청구야담(靑邱野談)』은 조광일을 알게 되는 과정을 비롯하여 전체 서사를 사실에 기대어 기록한 것에서 벗어나 구연에 바탕한 서사수법으로 그 사실을 바꿔 놓고 있다. 이를테면 『청구야담(靑邱野談)』은 이계의 사실 체험을 제거함으로서 개인의 견문에 바탕한 서사를 다중(多衆)이 공유하고 나누는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이는 조광일을 알게 되는 과정과 인물의 서사방식, 일화에서 보여주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불특정한 시점으로의 변환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서사방식은 「활인병조의행침(活人病趙醫行針)」의 전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리는 야담과 전에 대한 상호 비교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두 작품의 서사수법의 상이함을 확인하는 점만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이는 『청구야담(靑邱野談)』이 전(傳)을 소재로 하되, ‘전’의 서사문법이 아닌 야담적 문법 혹은 ‘야담’의 고유양식에 부합하도록 서사를 교직(交織)한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상이한 면모가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의 수준이 『청구야담(靑邱野談)』의 것과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용분석
그러면 작품으로 들어가 본다.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은 빈부(貧富)를 고려하지 않고 그야말로 하층민들에게 인술을 베풀어 의원의 진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과 그 서사지향부터 차이가 난다. 하층민에게 의술을 베푸는 인물의 서사는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보이기도 하지만【『용재총화(慵齋叢話)』를 보면 백귀린(白貴麟)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백귀린은 의술(醫術)을 잘하였으나 자신의 처지와 경제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하층민을 치료하는 데 진력을 한 특이한 인술(仁術)의 소유자로 그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조광일의 의술행위와 상통하는 바 있다.】, 이조 후기 인물전에서 이러한 인물을 형상한 경우는 적은 편이다. 여항인이 편찬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등과 같은 작품을 제외하면 사대부 문인들의 사전(私傳)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런 점에서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은 일단 소재의 참신함을 지적할 수 있겠다. 더욱이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조광일의 인물 성격 또한 매우 개성적이며 주체적이라는 점에 주목을 요한다.
이 지점에서 서사를 통해 조광일의 인물 성격을 알아보자.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은 이계(耳溪)가 경험한 3개의 일화, 그리고 서두의 의론과 말미의 논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이 서두의 의론이며 ④가 첫 번째 일화, ⑤와 ⑥이 두 번째 일화에 해당되고, ⑨에서 ⑫까지가 세 번째 일화다. ⑬은 말미의 논찬에 해당된다. 나머지 부분은 작가의 설명적 서술에 해당된다.
이 작품은 3개의 일화를 중심축으로 서로 연결되고 있는 바, 이 축으로 하층민을 대상으로 인술을 베푸는 조광일의 인간상과 민간의 영웅으로서의 개성이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이계는 조광일의 연대기적 기술에 치중하기보다는 특정한 사건을 경험한 실사를 근거로 특정 시기만을 특기하여 서술하되, 그 인간상을 압축시켜 특화시켜 서사로 구성하고 있다. 더욱이 앞 뒤 부분에 의론과 논찬을 배치하는 서사수법을 구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은 전형적인 삽화 유형의 전에 속한다.
삽화 유형의 전(傳)은 삽화에 해당되는 일화의 내용은 인물의 인간상과 개성적 성격을 드러냄은 물론, 그것은 작품의 질을 결정짓는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의 일화는 조광일의 덕성과 성격, 그리고 그의 행동이 보여주는 가치에 수렴되는 한편, 각 일화는 내부적으로 상호 연결되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서두 부분의 의론과 말미의 논찬 역시 조광일의 성격을 드러내는데 일조하고 있다.
서두에 드러난 호감어린 시선
여기서 먼저 서두의 의론 부분을 보기로 한다.
‘뛰어난 의술은 나라를 다스리고, 그 다음이 병을 다스린다’ 하니 이것은 무엇을 일컫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병을 다스리는 것과 같으니 의술의 도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비는 반드시 현달하여 높은 지위에 있어야 나라에 병든 것을 다스릴 수 있다. 혹 궁하여 시험할 수 없으면, 음양(陰陽)ㆍ허실(虛實)ㆍ약석(藥石)에 기술을 펼치니, 널리 베풀고 백성을 구제한 공이 나라를 다스리는 공에 버금간다. 때문에 옛날의 어진 선비이면서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은 왕왕 의가에 의거하였던 것이다.
醫居九流之一, 蓋雜流也. 吾聞上醫醫國, 其次醫病, 此何以稱焉? 治國猶治病, 有醫之道焉. 然士必顯而在上, 國可得醫也, 或窮而無所試, 則寓其術於陰陽虛實藥石之間. 其博施濟衆之功, 亞於醫國. 故古之賢而不遇者, 往往隱於醫.
입전 인물에 대한 이계(耳溪)의 시각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한편, 전개될 인물에 대한 예고를 해주고 있다. 사실 이 의론의 문맥을 꼼꼼하게 음미해보면 인물 성격에 대한 단순한 예고를 넘어 복선이 깔려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조광일은 어진 선비로 불우하여 의술에 숨어 지내는 인물이며, 나라를 다스려 공을 이룬 현자와 마찬가지로 인술로 생명을 구하는 인물이라는 의미를 내함(內含)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은 들머리부터 입전 인물에 대한 호감을 전제하고 작품을 이끌어 간다. 그래서 전개될 부분도 이러한 복선을 확인하는 것으로 채워짐을 알 수 있다. 위의 구절에 이어지는 서사는 이계가 입전 인물을 만나는 과정과 인술을 베푸는 실사를 목도한 경험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계(耳溪)는 젊은 시설 충청도 내포에 있으면서 조광일을 만나게 되는데, 지역 주민들에게 의원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그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近余僑居湖右, 不能其風土, 問土人以醫. 皆曰: “無良者.” 强之乃以趙生對]. 이계는 작품에서 조광일의 선조는 태안의 대성(大姓)이었는데 당대에 가난 때문에 유랑하다가 합덕의 내포에까지 들어온 사실을 먼저 적시해두고 있다[其先泰安大姓. 家貧客遊, 寓居合湖之西涯]. 당시 조광일은 몰락한 유랑지식인으로 자신의 능력을 의술에 맡겨 여항의 의원으로 숨어지내는 인물로 보여진다【이조 후기 지식인의 분화과정에서 유랑지식인이 출현하는데, 이들 유랑지식인은 의술ㆍ훈장ㆍ지관 등과 같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살아간다.】. 사실 그는 남다른 능력은 없었으나, 오직 침(針)으로 명성을 얻어 스스로 침은(針隱)이라 하였으며, 자기의 침술을 팔기 위해 권문세족들에게 발길을 들여놓지 않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無異能, 以針名, 自號曰針隱. 生足未嘗跡朱門, 門亦無顯者跡].
인술을 택한 두 가지 일화
이러한 그의 성격과 행동에서 당시 의원들이 인술을 저버리고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만을 치료하는 행위와 정반대의 모습을 예견할 수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일화의 한 부분을 보자.
①
내가 일찍이 조생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동틀녘에 어떤 노파가 남루한 옷차림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그 문을 두드리며 말하길, “나는 아무 마을에 백성으로 아무개의 어미입니다. 나의 자식이 아무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으니 감히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조생은 “그러지요. 우선 가 있으면 나도 즉시 가겠소.”라 대답하고 바로 일어나 뒤따랐다. 걸어가면서도 난처한 기색이 없었다.
吾嘗過生廬. 淸晨, 有老嫗藍縷匍匐而扣其門曰: “某也. 某村百姓某之母也. 某之子病某病殊死, 敢丏其命.” 生卽應曰: “諾. 第去, 吾往矣.” 立起踵其後, 徒行無難色.
②
한번은 길에서 만났는데, 마침 비가 내려 흙탕 길이 되었다. 조생이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고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시오?”하니 “아무 마을의 백성 중에 아무개의 아비가 병이 들었어요. 내가 일전에 한번 침을 놓아주었는데 효과가 없어 오늘 다시 가서 침을 놓아주기로 약속하여 가는 중입니다.” 괴이한 생각이 들어, “그대에게 무슨 이익이 된다고 몸소 이같이 고생을 하시오?” 조생은 빙그레 웃고 대답하지 않고 가버렸다.
嘗遇諸塗, 時天雨道泥. 生頂蒻跋屐而疾行. 問生何之, 曰: “某鄕百姓某之父病, 嚮吾一針而未効. 期是日將再往針之.” 恠而問曰: “何利於子而躬勞苦乃爾?” 生笑不應而去.
작가가 직접 경험한 일화들이다. 동틀 녘에 남루한 차림의 노파가 병든 아들을 위해 조광일에게 치료를 부탁하자 그가 주저없이 왕진을 나가는 모습이 ①의 일화다. 그리고 일전에 놓은 침이 차도가 없자, 비 오는 흙탕길인데도 불구하고 재차 왕진을 나가는 모습이 ②의 일화다. 어떠한 상황에도 주저 없이 빈민을 위해 진료하러 간다는 점에서 ①과 ②의 일화는 연결된다. 두 일화 모두 진정한 인술을 행하는 조광일의 의의(義醫)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일조하는 바 있다.
두 번째 일화에서 “그대에게 무슨 이익이 된다고 몸소 이같이 고생을 하시오?[何利於子而躬勞苦乃爾]”라는 작가의 세속적인 질문에 빙그레 웃고 대답조차 하지 않고 가버리는 조광일의 행동은 매우 개성적이며 한편으로는 흥미롭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의원으로서의 그의 활동이 당대 일반적인 의원들의 행위와는 상이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작가가 ‘괴이한 생각이 들’었던 것도 조광일의 행위가 의원의 일반적 행동과 전혀 다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는 오히려 여기서 참다운 의원으로서 모습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을 터이다.
두 일화에서 보듯이 조광일이 인식한 진정한 의술이란 신분적 차별은 물론 치료비에 관계없이 병자라면 누구에게나 가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가난하고 병든 처지로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는 자면 누구든 마다 않고 가는 삶의 자세는 의의(義醫)로서의 면모가 뚜렷하다. 앞에서 ‘침으로 명성을 얻어 스스로 침은[以針名, 自號曰針隱]’이라 불렀던 사실과 후반부에 ‘스스로 의원이 된 것을 기뻐하였다[自喜爲醫]’라는 구절을 여기서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침을 잘 놓는다거나 의술하는 행위에 자족(自足)하였다는 의미라기보다 가난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푸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으며 자부하였으며, 이러한 의원의 자세를 자신의 소명으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당대인들이 조광일의 인술(仁術)과 인생관을 인정하고 주목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대목은 침술을 베푸는 조광일의 인간상을 간명(簡明)하면서도 인상적으로 포착하는데 썩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 하겠다.
②의 일화에서 조광일이 이계(耳溪)의 질문에 ‘빙그레 웃고 대답하지 않고 가버[生笑不應而去]’린 점 또한 향후 복선으로 작용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앞으로 서사로 전개될 것임을 예고해준다. 이계는 이러한 질문을 계기로 조광일과 교유를 하게 되고[余心異之, 伺其來往, 遂得狎而交焉], 이를 통해 예전에 듣지 못한 대답을 재차 질문하고, 마침내 조광일의 속내와 내면세계의 진면목을 확인하게 된다. 이 문답이 세 번째 일화에 해당된다.
의술로 세상을 통찰하다
이계(耳溪)는 “무릇 의원은 천한 기예로 여항(閭巷)의 비천한 곳에 해당된다. 그대의 능력으로 어찌 귀하고 현달한 사람들과 교류하여 명성을 얻으려 하지 않고, 이에 여항의 소민(小民)들과 교우하면서 어찌 자신을 자중하지 않는가[夫醫者賤技, 閭巷卑處也. 以子之能, 何不交貴顯取聲名, 乃從閭巷小民遊乎, 何其不自重也]?”라는 세속적인 질문을 하자, 이에 대한 조광일의 대답은 그야말로 그가 도달한 인생관의 정점을 보여준다.
장부가 재상이 되지 못하면 차라리 의원이 되는 것이 낫지요. 재상은 도로써 백성을 구제하지만 의원은 의술로 사람들을 살리니, 궁(窮)하고 현달(顯達)하는 것이 그 공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같을 뿐이라오. 그러나 재상은 때를 얻어서 그 도를 행하더라도 행(幸)과 불행(不幸)이 있어요. 남의 녹을 먹고 책임을 맡아서 한번이라도 원하는 것을 다하지 못하면 비난과 벌이 뒤따르는 법이지요. 의원은 그렇지 않으니 의술로 뜻을 행하면 뜻을 얻지 못함이 없는 법이라오. 병을 다스릴 수 없으면 두고 떠나더라도 나의 허물이 아니지요. 나는 그렇기 때문에 이 의술에 처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니 내가 이 의술을 하는 것은 이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행하려는 것일 뿐이라오. 그러므로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지요.
丈夫不爲宰相, 寧爲醫. 宰相以道濟民, 醫以術活人, 窮達則懸, 功等耳. 然宰相得其時行其道, 有幸不幸焉, 食人食而任其責, 一有不獲則咎罰隨之. 醫則不然, 以其術行其志, 無不獲焉. 不可治則舍而去之, 不吾尤焉. 吾故樂居是術焉. 吾爲是術, 非要其利, 行吾志而已. 故不擇貴賤焉.
의술로 세상을 통찰하는 조광일의 언명들은 의원으로서의 자기 소신을 넘어 여항의 은자(隱者)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단순하게 의술을 베푸는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세계의 폭과 인술을 베푸는 인생관의 깊이를 적실하게 보여준다. 조광일이 “의술을 하는 것은 이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행하려는 것이[吾爲是術, 非要其利, 行吾志而已]”라거나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는다[故不擇貴賤焉]”라는 언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터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는 주체적 인간상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인간상을 주목한 그 자체는 한 의원의 개인적 삶을 인정하고 그 자체를 선입관 없이 그려내려는 작가정신의 소산일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표현은 인간의 삶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이해와 통찰이 전제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언명들이다.
꼴불견 의원들을 향한 신랄한 비판
이어지는 조광일의 대답은 당시 인술을 저버린 의원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꼬집는 것으로 채워진다. 조광일이 진단한 의원들의 비뚤어진 의술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을 위해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의술을 믿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의원들의 꼴불견, 재상들의 요구에도 거들먹거리며 마지못해 가는 행위, 권세 있는 부유한 집이 아니면 가지 않는 작태, 그리고 가난하거나 권세가 없으면 아프다고 핑계를 대며 부재중이라고 딴청을 피우는 모습 등[吾疾世之醫, 挾其術以驕於人. 門外騎相屬, 家設酒肉以待, 率三四請, 然後肯往. 又所往, 非貴勢家則富家也. 若貧而無勢者, 或拒以疾, 或諱以不在, 百請而不一起, 是豈仁人之情哉]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의원으로서의 본분을 저버린 세태를 경멸적인 시선으로 여지없이 비판한다.
한 편에서 그는 이러한 세속적 의원들의 세태에 대해 의원(醫員)으로서의 삶의 지표를 날카롭게 세워 세속적인 그것과 대립적으로 보여준다. 이 부분, 조광일의 인술(仁術)이 가장 정채를 발하는 대목이면서 서사의 절정에 해당된다. 그러면 과연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의원의 자세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곧 민에게 베푼 참다운 ‘인술(仁術)’이었음은 아래의 언급에서 알 수 있다.
나는 그래서 오로지 백성들과 놀면서 부귀와 권세 있는 자에게 구하지 않아 이러한 무리들을 징계하고자 한 것이지요. 저 귀하고 현달한 자들도 어찌 우리들을 작게 여길 수 있겠소? 내가 슬프고 가엽게 여기는 것은 오직 여항의 곤궁한 백성들일 따름이지요. 또 내가 침을 잡고 사람들 사이에서 침술을 행한 것이 십여 년인데, 혹 어떤 날에는 몇 사람을 살리고 어떤 달에는 십 수인을 살렸으니, 침으로 온전하게 살린 사람을 계산하면 족히 수천 사람은 될 것입니다. 내 지금 나이 사십 여세로 다시 수십 년 동안에 만 명을 살릴 수 있고, 살린 사람이 만 명이 되면, 내 일을 마치는 것이지요.
吾所以專遊民間, 而不干於貴勢者, 懲此輩也. 彼貴顯者, 寧少吾輩哉. 所哀憐, 獨閭巷窮民耳. 且吾操針而遊於人, 十餘年矣. 或日療數人, 月活十數人, 計所全活, 不下數百千人. 吾今年四十餘, 復數十年, 可活萬人. 活人至萬, 吾事畢矣.
추호도 세리(勢利)에 따라 자신의 의술을 베풀지 않고, 오로지 곤궁한 백성들만을 위해 인술을 베푼 의의(義醫)로서의 삶의 견결함을 보여준다. 그는 민간의 부유한 자들과 노닐며, 귀하고 권세 있는 자들에게 이권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의 삶은 오직 여항의 곤궁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치료하고, 이러한 인술로 십여 년 동안에 수천 사람의 생명을 구했음을 강개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민의 영웅인 셈이다. 그의 삶의 목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여생도 이러한 삶을 지속하여 만여 명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목표라는 점을 단호하게 제시하고 있다.
조광일이 자신의 삶의 주체와 인생관을 실현하는 공간은 바로 인술(仁術)이었고, 그는 인술로써 삶의 의미를 확인하였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주인공 조광일의 인간상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이계(耳溪)의 시각 역시 의원으로서의 주체적 삶을 살면서도 인술을 견지하고자 한, 한 인간의 견결(堅決)한 의지와 의의(義醫)에 초점을 맞추어 조광일의 인간상을 더욱 부각시키는 바 있다.
논찬을 통해 칭송한 이계
더욱이 조광일이 인술을 베풀어 새로운 의원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인간상에 대한 이계의 후평도 서사에 조응한다.
이계는 조광일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 한편 그의 품성과 삶의 미덕을 극구 칭송하고 있다. 뛰어난 의술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명예나 보답을 바라지 않은 점, 곤궁한 사람을 우선하는 자세 등을 들어 호감 어린 시선으로 극찬하고 있다[趙生術高而不干名, 施博而不望報, 趍人急而必先乎窮無勢者, 其賢於人遠矣].
요컨대 이계는 논찬을 통해 조광일의 인술과 인간적 풍성에 대해 최대치로 끌어올린 표현으로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계가 인술을 베푼 조광일을 의의(義醫)로 바라보는 시각은 대단히 시사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도 따져볼 수 있을 것 같다.
어찌 보면 이 작품이 흥미롭고 새로운 인물을 입전한 문제작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도 이계의 이러한 시선과 입전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입전 인물의 선택에서 서사 방향과 시각은 오로지 작가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계의 논찬은 그러한 구실을 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
1. 머리말
3. 작품의 분석
2) 침술로 하층민에게 인술을 베푼 의의: 침은조생광일전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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