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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재교, 이계 홍양호의 의원전에 나타난 인물 형상 - 3.1 시정의 의원에서 어의로: 「피재길소전」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진재교, 이계 홍양호의 의원전에 나타난 인물 형상 - 3.1 시정의 의원에서 어의로: 「피재길소전」

건방진방랑자 2022. 10. 23.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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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작품의 분석

 

 

앞서 살펴 본 대이계(耳溪)가 남긴 11편의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작품 성취와 개성적인 작가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는 그의 작가의식이 두드러진 의원전(醫員傳)’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이 그 분석의 대상이다.

 

 

1) 시정(市井)의 의원(醫員)에서 어의(御醫):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

 

 

서사분절

 

동아시아 서사에서 ()’의 양식으로 의원(醫員)을 주목한 사례는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에서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을 하나의 독립 제목으로 마련하여, 당내 최고의 명의였던 태창공(太倉公)과 편작(扁鵲)의 의술과 삶을 주목한 바 있다. 이를 시원(始原)으로 하여 이후 의원에 대한 전()은 여러 사서(史書)에 두루 보인다. 열전(列傳)은 물론 개인의 사전(私傳) 또한 하나의 유형을 이룰 정도로 적지 않게 의원의 개성적 삶을 포착한 바 있다. 고려사(高麗史)에서 이상로전(李商老傳)설경성전(薛景成傳)을 독립시켜 특기한 사실이나, 조선조 초기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의원 백귀린(白貴麟)에 대한 이야기를 수록한 것도 그 예이다. 이후 사대부 문인들도 사전(私傳)으로 의원의 삶을 포착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조 후기 이덕주(李德胄, 1696~1751)의자권상륜전(醫者權尙綸傳)에서 볼 수 있고, 여향의 작가들 또한 두드러진다. 특히 다수의 의원을 입전한 이향견문록(異鄕見聞錄)은 그러한 사례의 대표격이다. 이계(耳溪)의 의원전도 이러한 유형 중의 한 사례일 것이다.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웅담고(熊膽膏)’라는 비방을 통해 시정의 무명 의원에서 내의원의 침의로 이름을 날리다가 정조의 사인(死因)과 함께 인생의 부침(浮沈)을 겪게 되는 피재길의 전기를 서술한 작품이다. 정조는 1793년에 자신의 종기를 낫게 한 피재길을 대상으로 입전하게 된다. 하지만 이계는 피재길의 전 생애를 모두 기술하지 않고 소전(小傳)’의 형태로 피재길의 특정 부분의 삶을 특기한다. 우선 서사분절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피재길은 의원 집안의 자식으로 그의 아버지는 종기를 잘 다스리고, 약 조제를 잘하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자 피재길은 의술을 전수받지 못하고, 어머니의 견문에 의지하여 여러 처방을 전수받는다.

피재길은 의서를 읽지 않았으나, 고약이 모든 부스럼을 낫게 한다는 비법만은 터득한다. 그는 그 비법을 팔아 생활하였으며, 사대부도 그 약을 시험해보고 효험을 얻자 칭송한다.

계축년(1793정조 17) 여름, 임금이 머리에 부스럼이 났으나, 오래도록 낫지 않고 점차 얼굴과 턱에까지 번져 잠자리조차 편안하지 못하게 된다.

모든 내의원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재길의 이름을 아뢰는 자가 있어 임금이 불러들여 치료 방법에 대해 묻는다.

재길이 식은땀을 흘리며 잘 대답하지 못하자 좌우의 내의원들이 속으로 비웃었으나, 임금이 가까이 다가와 진찰하도록 한다.

재길은 임금에게 한 가지 비책을 제시한 뒤, 웅담과 여러 가지 재료로 고약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친다.

임금이 그 고약을 바르니 하루가 지나자 통증이 그치고 사흘이 되자 병에 차도가 있게 된다.

임금이 약원(藥院)에 글을 써서 명의라 칭하고 고약을 신방(神方)이라 이르면서 그 공로에 보답할 방법을 의논하도록 한다.

원신들이 내의원의 침의(鍼醫)에 임명하고 6품의 관복을 하사하여 정직(正職)을 내려줄 것을 청한다.

임금이 나주(羅州)의 감목관(監牧官)에 제수하였고, 약원의 모든 의원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그 의술을 인정한다.

이에 재길의 명성이 온 나라 안에 알려지고 웅담의 고약은 마침내 천금의 처방으로 세상에 전해진다.

사신(史臣)의 평().

 

 

소전(小傳)’이라는 제명(題名)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계(耳溪)는 피재길의 전체적인 생애를 그리지 않고 있다. 다만 작품에서 피재길의 생애를 약술하는 한편, 피재길이 시정의 명의에서 일약 내의원의 침의로 활약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일화 부분만을 특기하고 있다. 더욱이 이게는 피재길의 구체적인 이력과 침의에서 물러난 후의 생애 부분도 전혀 기술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전형적인 삽화적 유형에 속한다. 특히 웅담고로 명의의 반열에 오른 피재길의 특이한 삶에 대한 이력은 이계(耳溪)는 물론 이후의 작가들에게도 대단한 관심과 흥미를 주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내용이 청구야담(靑邱野談), 이향견문록(異鄕見聞錄)에 수용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작품의 서두를 분석

 

위의 작품에 나타나 있지 않으나, 본래 피재길의 본관은 홍천(洪川)이며 자()는 여성(汝成)으로 1749(己巳)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1793(癸丑)년에 입사(入仕)하여 나주 감목관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야말로 그는 시정을 돌아다니던 무명의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기실 그의 구체적인 인적 사항을 알 수 있는 점은 흥미롭다. 아마도 그는 웅담고로 정조의 종기를 낫게 한 보상으로 내의원(內醫院)의 침의(鍼醫)로 입사하여 태의원선생안(太醫院先生案)에 기록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가 한다.

 

작품은 피재길이 민간의 떠돌이 의원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 작가의 설명 부분과 이후 정조의 종기를 낫게 하여 내의원의 침의가 되는 일화 부분, 그리고 작가의 의론 등으로 구성되었다. 서사는 이를 내적으로 연결하여 피재길의 의술과 의원으로서의 남다른 면모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우선 일화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작가가 설명하는 대목을 보기로 하자.

 

 

피재길이라는 사람은 의원 집안의 자식이다. 그의 아버지는 종기치료에 종사하였는데, 약을 잘 조제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뒤, 재길은 아직 어려서 아버지의 의술을 전수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견문한 것으로 여러 처방을 가르쳐 주었다. 재길은 일찍이 의서(醫書)를 읽은 적이 없었고, 다만 약제를 모아 고약을 달이는 것만을 알았을 뿐이었다. 모든 종기에 관한 약을 팔아 생활하며 마을을 돌아다녔으나, 감히 의원의 축에 끼지 못하였다. 사대부가 그 소문을 듣고 불러다가 그의 약을 시험해보니 자못 효험이 있었다.

皮載吉者, 醫家子也. 其父業治瘇, 善合藥. 旣歿, 載吉尙幼, 未及傳父術, 其母以聞見, 敎諸方. 載吉未嘗讀醫書, 但知聚材煎膏已. 一切瘡瘍, 賣以自給, 行于閭巷間, 不敢齒醫列. 士大夫聞而招致之, 試其藥, 頗有驗.

 

 

위의 인용문은 서사분절 에서 으로 작품의 서두 부분에 해당된다. 전통적인 인물전(人物傳)에 보이는 입전 인물의 가계에 대한 고증이나, 인물에 대한 배경, 그리고 구체적인 행적과 같은 인정기술(人情記述)이 매우 소략하다. 단지 피재길이 의원에 종사한 가계의 후예라는 사실과, 부친의 의술을 전해 받지 못해 어머니로부터 여러 처방을 배운 사실, 그리고 의원이면서 의서(醫書)조차 읽지 못한다는 특수한 사례 등을 사실적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계(耳溪)는 내의원을 관장하던 예조판서를 역임한 바 있어서 피재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그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있었을 터인데도, 작품에서는 이러한 점을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고약의 비법을 터득한 의술 부분만을 특기하여 피재길의 인간상을 포착하고 있다. 이처럼 특정 부분만을 압축적으로 특기하는 수법은 오히려 피재길의 독특한 개성과 의원으로서의 면모를 집중적으로 드러내는 데 유효한 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계(耳溪)는 당초에 피재길이 의서조차 읽지 않았고 정상적인 의학 교육을 받지 못하여 의원 축에도 들지 못한 점을 제시한다. 그런 다음 그가 고약을 만드는 비법을 터득하여, 이를 팔아 생활하면서 점차 이름을 얻게 되는 저간의 사실을 서두에 배치하였다. 에서 사대부가 그 소문을 듣고 불러다가 그의 약을 시험해보니 자못 효험이 있었다라는 언술은 그의 고약이 특효를 보아 점차 의원으로서 명성을 얻어가는 과정을 확인시켜 주는 언명이다. 더욱이 사대부가에서조차 그의 고약에 효험을 보았다는 점에서, 피재길은 이제 시정공간을 넘어 일약 전국적인 면의로 발돋움함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대목은 뒤의 정조를 치료하게 되는 일화와 연결되는 고리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복선의 기능을 하는 바 있다.

 

 

이계집과 실록의 서술차이

 

서사분절 에서 에 해당되는 두 번째 일화는 피재길이 웅담고를 조제하여 정조의 종기를 낫게 하여 침의가 되는 등 포상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언뜻 보면 앞의 설명 부분과 두 번째 일화는 계기적 관계를 가지지 않은 듯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부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다. 피재길이 고약으로 명성을 획득하여 명의(名醫)로까지 알려지게 된 부분과, 이를 계기로 종국에는 관료의 추천을 받아 정조의 종기를 치료하는 적임자로 불려간 것은 인과관계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일화는 피재길의 인간적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의원으로서의 진멱모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작품의 눈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그러면 이 부분을 보자. 피재길이 처음에는 비록 정식 의원 축에는 끼지 못하고, 여항을 떠돌며 의술로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삼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처지였으나 자신이 직접 제조한 웅담고에 대한 약효와 자신의 의술에 대한 강한 자부심만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정조와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조정의 신하들도 날마다 줄을 지어 기거하였는데, 재길의 이름을 아뢰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불러들이라고 명하고 물어보니, 재길은 신분이 낮아 전전긍긍하면서 능히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좌우에 있는 여러 의원들이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임금이 가까이 다가와 진찰하게 하며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대의 의술을 다하라.” 재길이 말하길 신에게 한 가지 처방이 있사온대 시험해봐도 되겠습니까.” 임금이 물러나도록 하여 약을 제조하도록 하였다. 이에 재길이 웅담(熊膽)에다 여러 가지 약재를 섞어서 달여 고약을 만들어 붙였다. 임금이 묻기를 며칠이면 다 나올 수 있겠는가?” 대답하기를 하루면 통증이 그치고 사흘이면 종기가 없어질 것입니다.”라 하였다. 얼마 후 과연 그 말과 같이 되었다.

廷臣日成班問起居. 有以載吉名白上者, 命召入問之. 載吉賤夫也, 戰汗不能對, 左右諸醫, 皆竊笑之. 上使近前診視曰: “毋畏也, 盡爾技.” 載吉曰: “臣有一方可試.” 命退而劑進, 乃以熊膽和諸料, 熬成膏傅之. 上問: “幾日可痊?” 對曰: “一日痛止, 三日收矣.” 已而一如其言.

 

임금의 병환이 평상시대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지방 의원인 피재길이 단방(單方)의 고약을 올렸는데, 즉시 신기한 효험을 내었기 때문이었다. 재길을 약원의 침의(鍼醫)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피재길이 정조를 치료하는 대목이다.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이고 정조실록(正祖實錄)38 정조 17716일조에 보이는 기록이다. 실록은 피재길이 정조를 치료한 사실과 그 공으로 내의원의 침의로 임명한 사실만을 짤막하게 기술해둔 데 반해, 이계(耳溪)는 작품에서 당시의 상황을 보다 상세하게 포착해내어 피재길의 성격과 개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피재길을 향한 부정적 시선

 

그런데 당시 피재길은 의학을 정상적인 수학하지도 않은 데다, 의서조차 제대로 읽지 않은 처지였기 때문에, 임금의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실사에 가까운 것으로 보여진다. 이계(耳溪)는 이를 마치 현장에서 일어난 정황을 직접 견문한 듯한 필치로 포착하여 피재길의 인간적 모습과 행동양식을 전해준다.

 

문면(文面)에 보이듯 작품에서는 피재길의 자신 없는 듯한 어눌한 말투, 자신이 처방한 약에 대한 답변, 그리고 그만이 소유한 비방(秘方)과 인간적 면모가 서로 교차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외견상으로 정상적인 의학 수업을 받지 못해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과, 비법으로 조제하여 당당하게 웅담고를 지어 바치는 대목은 어찌 보면 썩 어울리지 않을 법하다. 이러한 부조화는 의서조차 읽을 줄 모르는 자격 미달의 의원으로서의 인간적 특이성을 말해주는 언표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방을 전수 받아 뛰어난 의술을 지닌 소유자라는 점을 더욱 잘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함께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작품에 서술되지 않았으나 피재길은 웅담고를 계기로 정조가 사망할 때까지 내의원의 침의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그는 오직 웅담고라는 고약을 만드는 비법으로 내의원에 들어간 매우 특이한 사례에 속하거니와, 사실 이 점이 이계(耳溪)가 정조의 명으로 이 전을 짓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계가 소전(小傳)’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듯이,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은 의원을 입전하였다는 소재적 참신성을 제외하면 분량도 그렇지만 서사 구성과 인물의 초점화하는 데서 자신의 다른 작품에 비해 생동감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이는 피재길의 전 생애를 통해 한 인물의 삶을 조명한 것이 아니라, 특정 시기의 특정 사건을 매개로 인물을 특기한 데 연유하는 바 있다. 한편으로는 작가 자신이 피재길에 대한 내면과 구체적인 정보 등이 소략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작품의 생동감을 떨어지게 하는 데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논찬 부분 역시 재미와 생동감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한다. 논찬에서 보여준 작가의 평은 피재길의 인간적 면모와 재능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측면도 없지 않으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피재길의 의술을 주목한 한편 그를 특이한 인물로만 인식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계(耳溪)는 인물과 사건을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인식한 바탕 위에서 평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선은 피재길의 의술에 신뢰감을 가지지 않는 인상이 짙은 듯하다. 말미의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寧不異哉]’라는 마지막 표현은 이를 말해준다. 이는 인물의 특이함에 대한 긍정적 표현이라기보다는 부정적 시각이 강하게 느껴지는 언명이다.

 

더욱이 논찬의 분량 또한 전체 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하여 서사 또한 균형을 잃은 감이 없지 않다. 이는 소전(小傳)’이라는 형식적 한계에 연유하는 바도 있으나, 작가의 서사방식이 스스로 초래한 측면도 있다. 작가가 피재길의 전체적인 상을 그리기보다는 독특한 그의 개성을 하나의 일화에 수렴하여 너무 초점화시킨 결과, 서사의 균형을 어긋나게 한 것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작품에 드러난 이후의 삶

 

작품은 여기서 그치고 있으나, 이후 피재길은 계속 내의원의 침의로 계속 활동한다. 그러다가 정조의 사망과 함께 그는 정조의 사인(死因)에 연루되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는 인물로 다시 부각된다. 종지로 임종한 정조의 사인은 당시 정치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약원(藥院)의 의원들 역시 역의(逆醫)로 지목되어 국문을 당하거나 문책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조의 병을 치료하였던 내의(內醫) 강명길(康命吉)과 방외의(方外醫) 심인(沈鏔) 등이 국문을 당하게 된다. 그 결과 강명길은 역의로 지목되어 작처(酌處)하기 전에 물고(物故)되고, 심인(沈鏔) 역시 역의로 지목되어 경흥부로 유배형을 당하게 된다. 또한 침의였던 피재길(皮載吉)ㆍ백성일(白成一)ㆍ정윤교(鄭允僑)도 역의로 지목받아 유배를 가게 된다.

 

결국 피재길은 순조 원년 7월에 무산부에 유배되었다가, 순조 32월에야 해배되는 등 인간적 고초를 겪는다. 해배 이후의 피재길의 대한 행적은 더 이상 사료에 나타나 있지 않다.

 

어쨌거나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에서 이계(耳溪)는 시정(市井)의 의원에서 웅담고를 만들어 일약 어의(御醫)로 이름을 날린 한 의원의 삶을 특기하였다. 그리고 이계는 이 인물을 통해 당대 관습과 규범의 획일성에서 벗어난 특이한 개성적 인물을 선입관 없이 포착하고 있거니와, 여기서 이계의 작가의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인용

목차 / 지도

1. 머리말

2. 이계전의 현황과 그 특징

3. 작품의 분석

1) 시정의 의원에서 어의로: 피재길소전

2) 침술로 하층민에게 인술을 베푼 의의: 침은조생광일전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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