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카로스의 날개
유선시에는 선계에서 노니는 도중 인간 세상을 굽어보는 하계조감(下界鳥瞰)의 묘사가 자주 나온다. 김시습(金時習)의 「능허사(凌虛詞)」 중 한 수다.
朝餐沆瀣暮流霞 | 아침엔 항해(沆瀣) 먹고 저녁엔 유하(流霞)로세 |
須信凌處有作家 | 허공 걷는 사람 있음 모름지기 믿을레라. |
下視塊蘇嗟渺渺 | 굽어보니 땅덩어리 너무도 아득한데 |
大鵬飛少蠛蠛多 | 대붕은 잘 안 뵈고 하루살이 우글댄다. |
人間無地不風波 | 인간 세상 어디에도 풍파 없는 곳이 없어 |
八翼凌風是大家 | 날개 달고 바람 타니 큰 집이 여기 있네. |
下界蜉蝣寰宇窄 | 하계엔 하루살이 온 세상에 가득한데 |
塵埃萬丈贐君何 | 만 길이나 쌓인 먼지 그댈 속임 어찌하리. |
이렇듯 유선사에서 하계는 하루살이만 득실대고, 풍파 잘 날이 없으며, 만 길이나 없으며, 만 길이나 쌓인 먼지가 시야를 흐르는 부정적인 공간으로 묘사된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티끌만 자옥하고, 급류 속에 온갖 잡귀가 질주하며, 온갖 근심이 인간의 실존을 질식시키는 공간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하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곳에서의 갈등을 떠올리고 하게의 존재 양태를 무의미하고 왜소한 것으로 비하시킴으로써 선계에서 노니는 기쁨을 극대화하려는 의식의 과정이다. 동시에 이는 현세의 갈등과 좌절에 대한 자기 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하늘 위 광한전을 노닌 꿈을 깨고 나서도 꿈속에서와 같은 득의의 시간이 현세에까지 지속되기를 열망한다. 현세에서 득의가 주어졌더라면 이들은 결코 선계를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하계를 향한 혐오감의 표현은 반동형성에 의한 양가감정의 투영이다. 현실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신체는 미화되고 하계의 모습은 일그러져 나타난다.
白雲入大梁 出自蒼梧山 | 흰 구름 대량(大梁)으로 들어가더니 창오산으로부터 피어나누나. |
仙人白雲裏 俯視天地間 | 선인은 흰구름 그 속에 들어 하늘과 땅 사이를 굽어본다네. |
汲汲名利輩 車馬相往還 | 세속의 명리에 급급한 무리 수레와 말 왔다갔다 부산스럽다. |
黃鵠絶四海 壤蟲焉能攀 | 황곡(黃鵠)이 사해를 막고 있으니 땅의 벌레 어이해 오를 수 있나 |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의 「유선사(遊仙詞)」 11수 가운데 한 수다. 흰 구름을 타고 하계를 굽어보는 선인과, 명리에 급급하여 부산스런 하루살이 같은 무리가 대립한다. 자신을 저 높은 하늘 위로 올려놓고, 먼지 자욱한 인간 세상을 굽어보는 것만으로도 현세의 온갖 시름과 걱정은 말끔히 사라진다.
그러나 꿈은 깨게 마련이고, 자아는 결국 변한 것 없는 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자아는 몽중 유선의 과정에서 더욱 확대된 세계와의 괴리 앞에 다시 직면한다. 탈출은 좌절의 새삼스런 확인일 뿐이어서 현실과의 불화나 첨예한 긴장 상태를 해결할 어떤 대안도 마련해주지 못한다.
夜夢靑童引我去 | 밤 꿈에 푸른 동자 나를 끌고 가더니만 |
忽到雲霞最深處 | 어느새 구름 안개 자옥한 곳 이르렀지. |
仙樂風飄自帝所 | 신선 음악 궁궐에서 바람결에 들려오고 |
玉樓十二高入天 | 백옥루 열두 기둥 하늘까지 솟았네. |
五色靄靄煙非煙 | 오색구름 뭉게뭉게 안개인 듯 아닌 듯 |
攝身飛上身飄然 | 몸 떨쳐 날아올라 몸이 나부끼는 양. |
金支翠蓋相後先 | 황금 자기 비춰 일산 앞뒤로 벌여 있고 |
左右環佩羅群仙 | 좌우론 패옥 두른 신선들 늘어섰네. |
余乃長跪玉皇前 | 옥황상제 앞에서 내 길게 무릎 꿇고 |
焚香敬受長生編 | 향 사르며 공경스레 장생편을 받으니 |
一讀可度三千年 | 한 번만 읽어도 삼천 년을 산다 하네. |
簷間語燕聲呢喃 | 처마 사이 제비는 지지배배 재잘대고 |
破窓透雨寒𩁺𩁺 | 부서진 창 비 새어 찬 기운 스멀스멀. |
招魂不復煩巫咸 | 넋 부름에 무함(巫咸)을 번거롭게 할 것 없네. |
此身兀兀仍世間 | 이 몸 변함없이 세간에 있는 것을. |
眼前萬事頭欲斑 | 눈앞에 온갖 일에 터럭만 세려 하니 |
幾時長往巢神山 | 언제나 길이 가서 신선(神仙)에 깃들거나. |
권필(權韠)의 「기몽(기夢)」이다. 꿈에 청의동자의 안내로 상계에 올라 군선(群仙)이 둘러싼 가운데 옥황으로부터 장생편(長生編)을 받았다. 한 번만 읽어도 3,000수를 한다는 그 장생편을 막 읽으려는데 창밖 처마 밑에서 재잘대는 제비 소리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백옥루의 웅장한 광경과 늘어선 군선의 장관이 깨진 창으로 찬 기운이 스멀스멀 돋아나는 방 안으로 급강하되면서,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화렿나 장식의 황금 궁궐이나 신선의 음악소리가 아니라 눈앞의 온갖 근심뿐이다. 심의가 지은 「대관재몽유록(大觀齋夢遊錄)」의 각몽 대목도 이와 유사하다.
이색이 등을 어루만지며 좁은 방으로 데려갔다. 나를 난탕(蘭湯)에 목욕시키고는 금도(金刀)로 배를 갈라 먹물 몇 말을 들이부으며 말했다. “마땅히 40여 년을 기다려 다시 이곳에 와 함께 부귀를 누릴 터이니 근심하지 마시오.” 배가 동그랗게 불러오더니 칼로 찌르는 것 같이 아팠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배는 불러 북과 같고, 가물거리는 등불은 꺼지려 하고, 병든 아내는 누워 끙끙 신음하고 있을 뿐이었다.
환상적 장관과 득의에 찬 날들은 간데없고, 비가 새어드는 창과 병든 아내의 신음만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올 뿐이다. 인간에 낙원은 있는가? 낙원은 없다.
선계로의 비상은 이카로스(Icarus)의 날개를 연상시킨다. 그리스ㆍ로마신화에 나오는 그는, 날개를 만들어 태양 가까이까지 날아올랐다가 날개가 녹아 떨어져 죽었다. 한계를 초월코자 하는 비상의 욕구는 결국 죽음의 징벌을 부르고 말았다. 초월의 소망을 담은 유선의 행위가 현실의 새로운 비전과 연결되지 못한다 해서 선계를 향한 꿈 자체를 배격할 필요는 없다. 실현될 수 없다 해서 더 나은 삶을 향한 열망이 배격되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절망이요 공포가 아닐 수 없다. 유선의 과정에서 만끽한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해방감은 세속적 가치의 무의미함과 인간 존재의 왜소함을 새삼 인식케함으로써 현실의 불우와 모순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해준다.
유선시는 ‘중세적 꿈꾸기’의 산물이다. 이러한 꿈꾸기는 허망한 몽상이나 환상이 아니다.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는 꿈을 꿀 수 있다. 문학이 다만 실천의 도구일 때 꿈자리를 잃어버린다. 꿈이 없을 때 사회개조는 있을 수 없다.” 김현의 이 말은 바로 유선시에서 ‘중세적 꿈꾸기’가 갖는 의미를 매우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의 혈관 속에 내재한 원초적 상징들을, 까맣게 잊고 있던 그 기호들을 유선시는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 고구려 5회분 4호묘 고분벽화 가운데 학과 용을 탄 신선.
학을 탄 신선과 용을 탄 신선이 젓대를 불며 두꺼비를 지키는 월굴(月窟)을 향해 간다. 흰 관을 쓴 사람이 무덤의 주인이었을 게다.
인용
1. 풀잎 끝에 맺힌 이슬
3. 구운몽, 적선의 노래
4. 이카로스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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